128화
“코코, 지금 네가 느낄 수 있는 향은 어떤 게 있어?”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지만, 시우는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늘 제 주위를 맴도는 것 같은 에반의 페로몬과 달달한 자두 향이 어우러져 있었다.
예찬의 말대로 페로몬으로 에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안정적이고 평범한, 크게 어떤 색을 띠지 않은 박하 향이 주를 이루고 잘 익은 자두 향이 그 곁을 떠돌았다.
이번엔 자두 향을 의식하며 다시금 숨을 들이마셨다.
자두 향 역시 딱히 어떤 느낌이 없었다. 그저 시원한 박하사탕과 달달한 자두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 외의 향을 찾던 시우는 문득 든 생각에 표정을 굳혔다. 낭패다.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하는 알파나 오메가는 없었다. 분명 예찬도 그리 말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조절한다고. 정말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페로몬을 숨기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그랬기에 모두들 페로몬을 감췄고, 혹시나 하는 걱정에 탈취제를 사용했다.
시우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이거 어떻게 숨기는 거지? 당황한 나머지 눈이 커지는 시우의 표정에 에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순식간에 박하 향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자두 향뿐이었다.
“페이든이…….”
그날 밤, 차 안에서 제 피를 뽑던 페이든은 분명히 말했다. 차 안에는 에반의 페로몬만 있다고. 그리고 오늘도 제 페로몬 수치를 이야기하면서 발향 부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메가와 알파는 모두 다른 페로몬 향을 가진다고 했다.
향이 없다고, 무향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체향을 가지고 있다. 알파, 오메가가 아닌 베타도 저마다 고유의 체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향이 없다고? 아니다. 그럼 지금 이 자두 향은 어떻게 설명하지?
“그럼 네가 오늘 몇 명의 알파를 만났을 것 같아?”
여전히 에반의 질문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시우는 눈을 천천히 깜박거렸다.
“페이든, 복부 초음파를 하던 의사, VIP 병동에서 지나쳤던 사람 중 한 명, 방금까지 이 공간에 같이 있던 집사님.”
질문을 해 놓고 대답까지 제가 다 하는 에반을 보는 시우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나만 알아.”
바닥에 앉아 있던 에반의 손이 시우의 종아리에 닿았다.
“네가 어떤 향을 가지고 있는지, 그게 얼마나 달콤한지. 그래서 미친 듯이 먹어 치우고 싶은데. 그걸 오직 나만 안다는 게 얼마나 축복처럼 여겨지는지 알아?”
한 손으로 제 발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 종아리를 부드럽게 문지르면서 속삭이는 말에 시우의 손이 살짝 떨렸다. 혹여나 들고 있는 음료를 쏟을까 봐 두 손에 힘을 준 시우는 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고는 머그잔에 입술을 대었다.
따스한 뱅쇼를 입 안에 머금고 천천히 삼켰다. 제 향을 에반만 안다고? 그게 가능한가?
모든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을 낳았다.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어땠는지 기억해?”
뭉근하게 종아리를 만지는 그 손길을 애써 무시하며 괜스레 뱅쇼만 마시던 시우는 대답 대신 눈을 깜박였다. 목이 아픈 제가 굳이 많은 말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의 대화를 이끄는 건 에반이었다.
비행기에서 만난 그는 저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선뜻 제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처음 보는 자신을 참으로 반겨 줬다.
하지만 이 질문엔 답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시간대의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알지 못하니까.
“골든 알파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어. 몇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대부분 나처럼 그걸 대놓고 밝히진 않지. 나 역시 추측성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한 번도 내 입으로 골든 알파라고 말한 적이 없어.”
굳이 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에반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메가의 향을 맡지 못하는 알파. 하지만 자신을 만나는 순간 그의 삶에 제가 들어왔다는 로맨틱한 고백에 시우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의학적으로도 베타 판정을 받은 제게 그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긴 말했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테니까. 저 역시도 제가 그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의심했다. 그가 자신을 ‘페어’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도 그저 좋아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그런 애칭을 빗댄 말처럼 여겼다.
히트 사이클이 터진 날은 다른 날도 아니고 정확히 만 스무 살의 생일날이었다. 후발현이라고도 충분히 오해할 수 있었다. 뮤직 어워드에서 이미 전조 증상이 나타났으니, 아마도 자신은 페로몬 조절 같은 건 조금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 있던 찬과 예찬조차 그저 감기로 아픈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이상하리만치 제 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에반의 모습이 그들의 모습과 겹쳐졌다.
“한약…….”
다른 일에는 다 져 주고 적당히 눈감아 주면서도 한약 먹는 것만큼은 철두철미하게 지키던 에반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직접 가져와서 제 눈앞에서 먹는 것을 매일 확인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스케줄에도 그것만큼은 확실히 챙겼다. 한 번쯤 빼먹을 만도 했는데 그런 날조차 없었다.
“한약으로도 억제제를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너한테 설명하고 이해시킬 방법이 없어서, 그것도 내 멋대로 한 거니 사과해야 하는 거네. 생각해 보니 나 진짜 제멋대로다. 그렇지?”
한쪽 종아리를 풀어 주던 에반의 손이 다른 쪽 발목을 잡았다.
히든 오메가와 골든 알파.
골든 알파를 만나지 않는다면 평생을 제가 오메가인지 모르고 베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이란다. 하지만 이미 그를 만났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 거라는 설명에 시우는 입 안에 머금고 있던 뱅쇼를 꿀꺽 삼켰다.
“넌 어디까지 생각한 거야? 뭘 알고 있어?”
시우는 머그잔을 옆에 있는 테이블에 두고는 제 종아리를 만지는 에반의 손을 겹쳐 잡았다. 본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히든 오메가와 골든 알파에 관해 설명하는 에반은 시우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무덤덤한 그 표정에 시우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 혼자 빙글빙글 헤매고 있는 모든 시간대를 그가 아는 것 같았다. 허무함과 슬픔, 외로움, 좌절과 희망, 꿈, 상처.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무감각해졌다.
기쁜 일도 없고 슬픈 일도 없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도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회귀를 하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건 없다. 함께할 수 있는 건 머릿속에 남은 기억뿐이었다. 그에게 전해 주지 못한 노란 작은 새 같은 것들도 다 기억에만 남아 있었다.
‘Journey’ 촬영이 끝나고 둘만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본 사진들도 기억에만 존재했다. 많은 시간대가 겹치면서 그 사진도 점차 흐릿해졌다. 단 하나, 노을을 받은 채 춤을 추고 있던 제 사진만큼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에반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자신과 절대 같이할 수 없는 스타, 하늘의 별, 그저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럼 그때의 너도 날 정말 좋아했던 거야? 고민하고 후회하고 밀고 밀어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제가 그에게 가진 감정을 인정하면서도 군대로 도망갈 생각만 하던 자신이다.
촬영지에 도착해서 같이 택시를 타고 가다 문득 제게 코를 맞대던 에반. 넌 그때도 내 페로몬을 맡았어? 나보고 미워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에도 이런 감정이었어?
아니, 아니다. 그 전부터다.
에반은 제 팬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라이브를 하던 중 저에 대한 정보를 줄줄 읊으며 허리 뒤에 있는 점 두 개까지 말했었다.
무덤덤한 에반과 다르게 시우의 얼굴에 슬픔이 스며들었다. 아랫입술을 아무리 깨물어도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눈을 크게 뜨고 심호흡을 해도 눈가가 젖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뭐가 그렇게 슬픈 거야? 그거 말고도 사과할 게 또 있나? 지금이면 네가 다 용서해 줄 것 같으니까. 다 말해야겠다.”
울먹이는 자신을 보는 그의 얼굴엔 오히려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자두…….”
흘러나오는 울음을 꾹꾹 누른 시우는 겨우 한 단어를 내뱉었다. 왜 나 자두로 꼬셨어? 한 알씩 주던 그게 얼마나 감질났는데. 그런데 왜 지금도 자두를 준 거야? 계속 두 사람이 겹쳐 보이게 왜 넌 한결같아?
“좀 알아채라고. 알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소파에 앉아 있던 시우는 미끄러지듯 내려가 에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 팔로 그의 목을 꽉 끌어안자, 그 역시 망설이지 않고 둘 사이에 어떤 공간도 하락하지 않겠다는 듯 시우를 꽉 끌어안았다.
“너 나 버리면 죽여 버릴 거야.”
에반처럼 로맨틱한 말 따위는 할 줄 모른다. 솜사탕같이 사르르 녹아 버릴 것 같은 달콤한 말도 할 줄 모른다.
“네 손이라면 얼마든지 죽어 줄게.”
“아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 좋아지면 그땐 진짜 말해 줘야 해. 나 눈치 없어. 알아도 모른 척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확실하게 말해 줘.”
“그럴 일 없다는 거 알잖아. 그런데 난 너 못 놔줘. 네가 다른 사람 좋다고 해도 못 그럴 거 같아. 미리 사과할게.”
방금까지 꽉 끌어안아 주던 에반이 제 허리를 잡아 둘 사이에 거리를 만들자 시우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멍청하게 우는 꼴을 들킬 순 없었다.
“맨날 사과한대.”
에반이 기분 좋아질 만한 말, 듣기 좋은 말.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또 불퉁한 말이 입에서 나갔다.
“사과받아 줄 거야?”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려 했지만, 이내 제 턱을 잡아 오는 손길에 얼굴을 든 시우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따스한 에반의 입술이 시우의 입술에 가볍게 맞닿았다. 꾹 누르는 것도 거칠게 탐하는 것도 아니었고, 장난스러운 뽀뽀도 아니었다.
“그럼 또 사과할게. 이건 지금부터 내가 할 일에 대한 사과.”
에반이 속삭이자 덩달아 시우의 입술도 같이 움직였다. 오늘따라 수수께끼 같은 말을 많이 하는 에반의 말뜻을 생각하던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야…… 이…….”
아직 대화가 다 끝난 거 아닌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질척한 페로몬이 확 들러붙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 손을 제 티셔츠 안에 넣고 다른 손을 바지 안으로 넣어 엉덩이를 움켜쥐는 행동에 시우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 다디단 초콜릿을 먹는 양 제 입술을 덮쳐 오는 그의 입술에 먹혀 버렸다.
“너…… 또 숨기는 거 있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어느새 제가 입고 있던 옷들이 사라지고 그가 만들어 내는 잔인하리만큼 강한 쾌감에 빠진 시우는 급히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멤버들이 알아, 우리 사이.”
“뭐?”
미적거리던 에반이 말하는 순간 시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매니저도.”
멤버뿐 아니라 매니저도 안다고? 어떻게 아냐고, 네가 말한 거냐고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고개를 숙이고는 제 것을 입 안에 머금어 버리는 에반 때문에 그 뒤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