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나가.”
피검사를 할 때도 바로 옆에 꼭 붙어 있고, 흉부 엑스레이를 찍을 때도 엑스레이 촬영실에 들어오더니, 기어이 초음파실까지 따라 들어온 에반을 본 시우는 입을 벙긋거려 자신의 의사를 전하며 손을 휘저어 나가라는 뜻을 표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복부 내놓고 초음파 받는 곳까지 따라온 것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반의 집안에서 운영한다는 병원의 VIP 병동에 있는 시우는 검사를 받으러 다니는 동안 병원 관계자 외에는 어떤 외부인도 만나지 않았다. 지나치는 병원 관계자들 역시 그들에겐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검사를 받는 시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적인 생활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과 언론에 예민하게 구는 시우를 위한 에반의 조치라는 건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이 궁금해하는 건 갑자기 나타나 VIP 병동을 좌지우지하는 그들의 배경이었다.
에반이 시우를 위해 VIP 병동을 통제하는 것도 모르는 시우는 저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그를 향해 어서 나가라는 뜻을 담아 손짓하며 눈총을 보냈다.
“조금 차갑습니다.”
복부 초음파이니 당연히 상의는 조금 위로, 하의는 조금 아래로 내려야 했다. 의사가 다가와 옷을 걷어 달라는 말에 그리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문가에 삐뚜름하게 서서 팔짱을 낀 에반의 표정엔 못마땅함이 가득 묻어났다.
이내 투명한 젤이 배 위로 떨어지자, 그 이상한 느낌에 시우는 몸을 흠칫 떨었다.
이제 와서 에반이 나갈 것 같지도 않았기에 포기한 시우는 의사가 바라보는 모니터를 같이 응시했다. 의학에 무지한 제가 본다고 뭘 알겠느냐마는 시선을 둘 곳이 마땅히 없었다.
“오메가 맞으신데, 알고 계셨죠?”
모니터를 응시한 채, 제게 건네는 의사의 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베타잖아. 베타로 알고 지낸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스물세 살에 매번 회귀했으니, 군대를 가 본 적은 없었다.
“피검사로도 오메가인 걸 알 수 있죠?”
문득 한 가지 이상함을 느낀 시우는 조금 전 페이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의사에게 오히려 질문을 했다.
“물론이죠. 다 됐습니다.”
신병 검사를 받을 때, 피검사도 받았다. 그런데 분명 현역 판정을 받았고, 불과 입대를 며칠 남기지 않고 있었다. 입대를 며칠 앞둔 상태에서 회귀했고, 그로부터 불과 다섯 달 남짓한 시간만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제가 오메가란다. 초음파 검사가 끝났다는 말을 하며 의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을 이었다. 모든 장기가 제자리에 잘 있다고. 복잡한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긴 신병 검사에 복부 초음파 같은 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정밀 검사라고는 했지만, 검사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검사가 끝났다는 말에 지금껏 굳어 있던 에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배고파.”
다시 병실로 돌아온 시우는 니트 안으로 손을 넣어 배를 문질렀다.
솔직히 6일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뭐가 그리 걱정인지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저를 과하게 보호하려는 에반의 행동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냥 지나치게 많이 자고 일어난 것뿐이다.
주말이면 20시간 넘게 몰아 자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몸이 조금 뻐근하긴 하지만 그건 페이든의 말대로 관계에서 오는 그런 것과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생긴 불편함이었다.
평소보다 머리도 맑고 기분도 좋고 어느 때보다 몸도 가벼웠다.
“뭐 먹고 싶어?”
“맛있는 거.”
쓸데없이 넓고 고급스러운 병실을 둘러본 시우는 손등에 붙어 있는 테이프를 떼어 냈다. 링거를 빼고 붙여 놓은 것이었다. 바늘이 꽂혔던 흔적과 함께 주변이 멍든 것을 보고는 다른 손으로 문지르며 창가로 갔다.
“우리 언제 가?”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말에 에반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시우는 다시 말했다. 여전히 말을 할 때마다 목이 불편하고 쇳소리가 섞이긴 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목이 처음 쉬어 본 것도 아니고,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었다.
“어딜 가?”
휴대전화를 만지던 에반의 반문에 오히려 시우의 고개가 갸웃했다. 검사도 끝났고 결과를 확인하려면 며칠 걸린다고 했다.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굳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국도 아닌 영국에서 의료보험도 안 되는 제가 이곳에서 받은 각종 검사비를 떠올리자 아찔했다.
이래서 사람이 돈이 있어야지.
“어디든. 병원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 * *
“진짜 괜찮겠어?”
몇 번이나 같은 것을 묻는 에반을 향해 한숨을 쉰 시우는 오히려 제가 그의 손을 잡고 끌었다. 병원 문을 나서자 제 몸을 스치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시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병원의 조경 사이사이에 남아 있는 눈을 보자 아쉬움이 밀려왔다.
어쨌거나 올해 첫눈인데 내리는 것은 못 보고 쌓인 것만 보는 것이었다.
“너, 나 때문에 걱정도 많이 하고 신경도 많이 썼으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호기롭게 말했지만, 당장 택시를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시우는 잡고 있는 에반의 손을 살짝 흔들었다. 무엇이 저를 이렇게 대범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자신들을 보고 웅성거리거나 휴대전화를 꺼내 드는 사람이 없기에 이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 데뷔해서 이제 겨우 한국에서 얼굴을 알리고, 아시아 시장에서나 조금씩 인지도를 쌓고 있는 시우나 에반을 대번에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의 외모 때문에 다시 보기는 하지만, 다들 그게 전부였다.
“그래.”
병원을 나섰는데도 선뜻 움직이지 않고 망설이던 에반의 손끝이 시우의 코를 톡 건드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을 피하지 못한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 뒤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저와 다르게 먼저 발걸음을 뗀 에반은 바로 앞에 있는 고급 세단으로 다가갔다.
훈기가 가득한 세단의 뒷좌석에 얼떨결에 같이 탄 시우는 제 옆에 있는 에반을 보았다. 잠시만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는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연락을 하고 있었다.
“어디 가는데?”
“맛있는 거 먹고 푹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 가는 동안 할 이야기도 있고.”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에 시우의 시선이 절로 앞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이에게 닿았다.
“괜찮아. 한국말 모르시는 분이니까. 아까 말했는데, 오늘 며칠인지 알지?”
급하게 연락할 일은 다 처리했는지, 에반이 시선을 맞추며 말하자 시우는 저도 모르게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8일.”
에반의 질문에 답을 함과 동시에 에반이 주는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 며칠 동안 구경도 못 해 본 제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시우의 표정엔 어떤 변화도 없었다.
12월 8일. 공식적으로 휴식기, 그러니 중요한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어떤 의미를 가진 날짜도 아니었다.
“내가 확인했어. 미안해.”
에반이 본다고 해도 뭐 특별할 것도 없는지라 별말 없이 메신저 앱을 켠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완전히 잊고 있던 날이 떠오른 것이다.
12월 2일. 뮤직 어워드가 열렸던 그날은 시우의 생일이었다.
“수습해 보려고 했는데,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뒤풀이에서 멤버들과 깜짝 생일 파티를 할 계획이었다고 했다. 뒤풀이 역시 카메라가 있었을 것이고, 그건 나중에 편집해서 비하인드로 실릴 부분이기도 했다. 뮤직 어워드와 공식 활동 완료에 관한 단체 라이브 외에 시우는 그날 밤 따로 개인 라이브도 했어야 했다. 그 모든 게 뒤틀려 버렸다.
급히 메신저를 확인해 보니 신인상 받은 것과 생일을 축하한다는 내용이 가득했다. 또한 나타나지 않는 자신을 찾고 있었다.
“하아-.”
시우는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정신 줄을 너무 놓고 살았나 보다.
“이거 어떻게 수습해?”
“소속사 측은 지금이라도 개인 라이브 하자는 거지. 소속사에는 네가 좀 많이 아팠다고 둘러댔어. 대기실에서 네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니 믿는 눈치고. 우리가 갑자기 사라진 데다 찬 형이랑 예찬이는 일본에서 목격담 뜨고 그러니까 조금 뒷말이 나오고 있어. 소속사에선 휴식기 시작해서 각기 개인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고 밝힌 상태야.”
“그럼 지금이라도 라이브를 해야 하잖아. 그게 먼저지,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얼른 한국과 영국의 시차를 확인한 시우는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일단 서울 시간을 기준으로 밤 10시쯤에 하려면, 영국 시간으로 오후 1시.
지금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결국 오늘은 라이브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럼 내일 낮에 라이브를 해야겠다.
그런데 라이브를 켜고 뭐라고 말하지? 난감함에 이마를 문지르며 시우는 도와 달라는 눈빛을 담아 에반을 바라보았다.
“뭐든 먹어야지. 유동식을 먹어야 하니까 수프? 죽?”
시우는 라이브를 할 시간과 내용을 고민하는 자신과 달리 태평하게 먹고 싶은 것을 물어 오는 에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그래. 배가 고픈 것도 잠시 잊었구나.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 버린 시우는 긴 한숨을 쉬었다. 다 제 탓이다. 하필 어떻게 그 타이밍에. 몇 시간만 더 있다가 발현이든 뭐든 나타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이브는 내일 낮에 하는 것으로 하고, 이제 소속사부터 연락해야 하나?
아니다. 그러고 보니 뮤직 어워드 끝나고 집에도 연락을 못 했다.
한 번도 상 받는 모습을 보여 드린 적이 없는데, 네가 즐거우면 된다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해 주시던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집에는 내가 연락드렸어.”
휴대전화를 들고 어디부터 연락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던 시우는 에반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가 우리 집에 연락했다고? 그와 동시에 시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같은 멤버니까 연락을 할 수도 있는데…….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들고, 다른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시선을 맞추는 시우가 귀여워 에반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건 정말 시우가 싫어할 행동인 걸 알지만, 에반은 고개를 숙여 살짝 벌어져 있는 다디단 입술을 얼른 훔쳤다.
“네가 걱정할 만한 그런 말은 안 했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인 에반이 손끝을 움직여 시우 휴대전화에 뜬 번호를 확인 후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에 이어 상대의 음성이 들리자, 에반의 입술이 호를 그리며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 그래. 에반이니?”
너무 살갑게 말을 거는 에반과 밝은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시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