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25화 (125/187)

125화

“코코.”

시우는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머릿속이 뿌옇고 머릿속 가득 하얀 연기가 들어찬 것 같았다. 눈을 뜨고 싶지도 않고,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시우야.”

자신을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 알기에 얼른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아득함이 밀려오며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저를 건드는 손길이 귀찮다. 그걸 거부하고 싶지만, 이번엔 몸을 제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쉬고 싶으니 조금만 더 자신을 내버려 두라는 뜻을 전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일정하게 몸이 흔들리자 시우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을 천천히 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흐릿했고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어 다시 눈을 감았다.

“네. 그런 건 아닙니다…….”

듣기 좋은 목소리.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향에 시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시우는 천천히 눈을 뜨고는 몇 번 깜박거렸다. 시야가 점차 맑아지면서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제게 등을 보인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조금 전부터 거슬리는 삐빅거리는 소리를 찾아 시선을 돌리던 시우의 눈에 링거병이 보였다. 에반의 페로몬이 가득한 공간에서 소독약 냄새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병원이구나.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에반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넓은 어깨나 곧은 등, 긴 다리가 보기 싫은 건 아니지만, 자신을 올곧게 봐 주는 그 초록 눈동자를 마주하고 싶었다. 그를 부르려 입술을 달싹인 시우는 따끔거리는 목의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 혀로 바싹 마른 입술을 적셔 봐도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잘 잤어?”

방금까지 저를 등지고 있던 에반이 어느새 저를 보고 있었다. 통화를 끝내고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그 얼굴이 참으로 잘났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다가온 에반의 손이 제 이마를 짚고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몇 번이고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시우의 눈썹뼈를 느릿하게 쓸었다.

미소 짓고 있는 얼굴 아래에 깔려 있는 걱정을 읽은 시우는 손을 들려고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괜찮다는 뜻으로 시우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물을 좀 마셨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에반의 품에 안겨 있던 제 모습이었다.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열이 잔뜩 오른 몸으로 멤버들과 함께 라이브를 시작한 시점이었다. 깨질 것 같은 두통과 쓰라리던 피부가 떠오르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낯선 고통들이었다.

그 뒤로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 제대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간 순서대로 떠올리고 싶은데, 뜨문뜨문 단편적인 것들만 눈앞에 그려졌다.

“미안.”

눈썹을, 코를, 그새 바싹 말라 버린 입술을 조심스럽게 만지던 에반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에반의 말을 이해하려던 시우의 눈꺼풀이 다시 곱게 내려앉았다.

이내 시우의 고른 숨소리와 함께 평온하게 가라앉은 페로몬이 병실을 채웠다.

* * *

시우는 손등이 아니라 손끝까지 내려오는 니트를 살짝 끌어 올리고는 테이블에 있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스한 머그잔의 온기가 차갑던 손바닥에 서서히 퍼져 나갔다.

팔을 들어 머그잔에 든 따스한 물을 조금 머금었다.

곧바로 물을 삼키지 않고 바싹 마른 입 안에서 물을 굴리는 시우의 시선이 제 손에 닿았다.

한쪽 손목에 감겨 있는 붕대, 다른 손 손등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창 너머로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정원 같은 곳이 보였다. 눈이 깔끔하게 치워진 인도를 바삐 지나다니는 사람들,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도로 위 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창밖을 보던 시우의 시선이 벽에 걸린 한 장의 종이로 향했다. 달력의 마지막 장 12월이라는 선명한 숫자 아래로 31개의 숫자 중 시우의 시선이 멈춘 곳은 8이라는 숫자였다.

뮤직 어워드가 2일이었는데, 왜 오늘이 8일까?

“하아…….”

긴 한숨을 내뱉었지만, 그건 매끄러운 소리로 변하지 못했다. 목이 완전히 쉬어 버려 말을 하려고 해도 헛바람이 도는 것 같은 소리가 났고, 따끔거리는 고통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렇게 따스한 것들을 먹으면 목이 풀렸는데, 지금 제 목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떠오르는 건 오직 진한 살색의 향연으로 얼룩진 몸의 대화밖에 없었다.

제대로 정신 차리고 보니 병원이었다. 병원 이름이 적혀 있는 환자복이 아닌 편안한 사복을 입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감기나 복통, 예방접종 같은 가벼운 증상으로 병원을 방문했기에 이렇게 병실에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안무 연습을 하다 발을 접질려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도, 반깁스만 하고 집으로 돌아갔던 그였다. TV에서 보던 병실은 이렇지 않았는데, 마치 누군가의 침실을 고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병실은 시우가 뜨거운 물을 후후 불면서 마시는 소리만 가득했다.

지쳐서 정신을 잃듯이 까무룩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것을 반복한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제 옆에는 에반이 있었던 것 같고. 잠시나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를 보거나 그의 체취를 느꼈으니까.

……나 짐승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맑아진 정신으로 지난 시간을 더듬던 시우의 입에선, 밀려오는 자괴감에 또 한숨이 흘러나왔다. 뭐 나중엔 흥분한 제가 에반의 품으로 파고들었으니 누구를 탓할 일만도 아니었다. 뮤직 어워드에서 제 몸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은 히트 사이클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반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데 고작 그런 거로 정신을 잃고 병실 신세까지 진 저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잔병치레도 없었고 나름 건강하다고 자부해 왔는데…….

옆에 있는 테이블에 머그잔을 내려놓은 시우는 다리를 덮고 있는 이불을 치우고 두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짧은 시간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제가 꿈꾸던 것들이 요정의 선물처럼 모두 이루어졌다.

화려한 빛이 가득했던 뮤직 어워드. 사람들의 환호성, 신인상. 그리고 열기, 정욕, 욕망, 욕심, 환희로 가득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제가 병원에 있는 이유까지 빈틈없이 맞춰진 타임라인에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나의 페어’

귓가에 부서지던 뜨거운 숨결과 제 몸을 짙게 감싸던 박하 향, 에반의 목소리까지 환청처럼 들리자 시우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그때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시우는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두어 번의 노크에 이어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을 마주한 시우의 눈빛이 일렁였다.

오늘도 제가 깨어났을 땐 옆에 에반이 있었다.

지난번 눈을 떴을 때보다 몸도 가벼웠고 정신도 맑았다. 목이 마른다는 제게 따스한 물을 주고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비웠던 그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을 보았을 땐, 얼굴에 이채롭게 떠오르던 표정이 싹 사라졌다. 대신 떠오른 건 민망함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이었으니까.

“반가워요, 시우 씨. 페이든입니다.”

정중한 목소리로 제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의사 가운을 입은 중년 남자를 향해 시우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몸은 좀 어때요? 아직도 많이 졸려요?”

“……아니……요.”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거리자 긁는 것 같은 거친 목소리가 나왔다.

“아시겠지만, 그날 체취했던 혈액에서 오메가 페로몬 성분이 검출됐어요. 그런데 그게 미약하다 보니 수치로 환산해서 표현하자면 열성 오메가 정도였거든요. 한데 병원에 오신 이후 했던 검사에서는 우성 오메가에 가까운 수치가 나와서 정밀 검사가 필요해요.”

“……발현…….”

그럼 정말 오메가라는 말인가요? 에반은 제가 히트 사이클을 겪은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후발현으로 인한 히트 사이클인 건가요?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결국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한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종이 같은 게 있으면 적어서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제 머리를 쓰다듬는 에반의 손길에 시우는 에반을 올려다보았다.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손까지 만지려는 그의 행동에 시우는 슬쩍 그를 밀어내 거리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사각형을 그리며 종이를 달라는 뜻을 전했다.

“흠, 목이나 몸이 불편한 건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것들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컨디션이 괜찮아지시면 그때 검진 들어가도록 할게요.”

자신을 배려해 조금 느리게 그리고 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설명을 하는 페이든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시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두루뭉술하게 말했지만, 지금 그가 괜찮다고 하는 부분이 무엇 때문에 생긴 것들인지 확실하게 와닿은 것이다.

“지금 할게요.”

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벌써 8일이다. 그리고 14일까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더 쉬어야 한다는 에반의 말에도 시우는 지금 당장 검사를 받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 검사를 진행하자며 곧 담당의가 와서 안내를 해 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페이든이 나가자, 시우는 의자를 끌어 제 앞에 앉는 에반을 물끄러미 보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굳이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더니 그것을 읽은 에반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두 나 때문이잖아.”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면서 하는 말에 이번엔 시우가 피식 웃었다. 이게 왜 에반 때문인가. 후발현이든 히트 사이클이든 제게 일어난 일이다. 어쩌면 그 일에 휘말린 건 에반이었다.

약을 먹자고 권했던 것도 그였고, 그런 그를 붙잡은 건 자신이었다.

끝까지 망설이는 것 같던 에반을 떠올린 시우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여기 어디야?”

“영국.”

영국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알아들었지만,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린 홍콩에 있었잖아. 자신은 비행기를 탄 기억조차 없었다.

시우의 기억에 없는 시간을 되짚어 주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차마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입술을 잘근거려야 했다.

결국 그거잖아. 후발현이든 히트 사이클이었든, 시우의 페로몬의 급격한 변화가 에반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에반이 완화제를 먹어 조절하려 했지만, 어쨌거나 시우가 약을 먹는 것을 막았고 덩달아 그의 러트까지 겹쳐 버렸단다.

들끓던 열기가 겨우 사그라들었지만, 기절하듯 잠든 시우가 깨어나지 않은 것이다.

격한 관계로 인한 체력 저하 및 2집 활동으로 받았던 스트레스와 부족한 잠이 한꺼번에 밀려들었고, 피곤에 지친 시우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잠이 든 시우가 쉽사리 깨어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늦은 밤 전용기를 타고 영국으로 왔단다. 그길로 비밀리에 병원에 입원까지.

그냥 졸렸을 뿐인데.

꿈같이 느껴지는 에반의 목소리와 손길, 무언가 먹었던 것 같은 기억이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

“미안……. 진짜 미안.”

제가 잠든 시간 동안 에반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생각하니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괜찮으면 된 거야. 내가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그땐 나도 제정신이…….”

대화가 끝난 공간의 어색함은 때마침 나타난 담당의가 와해시켰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