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여러분 덕분에 저희 신인상 받았어요!”
시우는 자신의 뒤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예찬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바로 옆에서 쩌렁쩌렁한 소리들이 번갈아 들리자 지끈거리는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라이브 통보에 정신이 없어 두통약을 달라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니모~ 사랑해요!!”
어떻게 참아 왔는데, 시우는 언제 눈살을 찌푸렸냐는 양 얼른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앞으로 내밀면서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같이 축하해 주셔서…….”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몸을 점령해 버린 열이 눈까지 번져 시우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쉬고 싶다. 흘러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눈을 뜨고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에 힘을 줬다.
“시우가 좀 많이 울긴 했죠? 시우 씨, 괜찮아요?”
라이브를 진행하던 찬의 말을 듣지 못한 시우는 장난스러운 표정과 함께 두 손을 화면을 향해 흔들고 있었다.
“코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향에 시우는 고개를 살짝 위로 들었다. 대기실 가운데 있는 3인용 소파의 끝자리에 앉았던 시우였다. 그의 옆에는 찬이 그리고 그 옆에 상준이 앉았다. 3인용 소파 옆에 있는 2인용 소파엔 예찬과 에반이 있었다.
일부러 에반과 가장 떨어진 자리에 앉았는데.
언제 소파 뒤로 온 것인지 에반은 상체를 숙여 뒤에서 자신을 살짝 끌어안은 상태였다.
“힘든 거 아는데, 내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게 여기까지라서…….”
시원한 박하 향이 머리에서부터 몸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지독하던 두통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가 전해 주는 시원함이 들끓는 열기를 몰아내는 것 같았다.
귓가에 나긋하게 흘러드는 목소리에 시우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시우 또 울려고 하잖아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시우 대신 에반이 웃으면서 말했고, 시우는 황급히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힘이 빠져 힘겹게 유지하고 있던 미소까지 잃어버릴 것 같았다.
“울리려고 말한 거 아니거든요. 시우가 진짜 눈물이 없는데, 오늘 울려고 지금껏 참았나 봅니다.”
시우가 어떤 말도 하기 전. 이미 그들은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늘함을 머금은 손이 열이 가득 오른 뒷머리를 쓸어 주었다. 힘없는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만지는 에반의 손을 슬쩍 치워 낸 시우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5분인지 10분인지, 어떤 대화가 오갔으며,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라이브가 끝남과 동시에 상체를 숙인 시우는 참고 있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대기실엔 항시 그들을 따라다니는 카메라가 있었지만, 어차피 그건 편집실의 손을 빌려 나갈 것이었다.
“시우, 괜찮아?”
“아…… 저 감기 같아요. 감기약 있으면 좀 주세요. 해열제도.”
몸을 웅크린 채 겨우 중얼거린 시우는 눈을 감았다. 호텔에서 열리는 뒤풀이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약을 먹고 호텔까지 가는 동안 쉰다면, 약의 힘을 빌려 어찌어찌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감기약 안 주셔도 돼요.”
시우는 에반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약도 마음대로 못 먹게 하나?
멀쩡한 척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더니 진짜 괜찮은 줄 아는 거야?
어서 달라는 뜻을 담아 한 손을 뻗어 허공에서 휘적거린 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먹어야 약 기운이 돌 게 아닌가.
“해열 진통제랑 종합 감기약 있는데, 이거 같이 먹어도 되는 건가?”
대환의 목소리에 시우는 숙이고 있던 몸을 천천히 바로 했다. 그리고 팔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생수병을 집었다.
“진짜 괜찮겠어?”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상태를 확인하며 시우를 살피던 대환이 내민 약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약을 따라 움직이던 시선엔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에반이 들어왔다. 이런 것 가지고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일어난 일로 조금 틀어져 있는 것도 알지만, 일단 사람이 살고 뭘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에반, 나 진짜 아파. 장난치지 말고 내놔.”
“차에 가서 줄 테니까 이동부터 하자. 상준 형, 시우 좀 데리고 나와 주세요.”
시우의 일이라면 먼저 나서서 하던 에반이었다. 제가 챙겨 데리고 나가야 할 상황에 오히려 대환이 들고 있던 약을 모두 받아서 먼저 대기실을 나가는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남아 있는 시우에게 닿았다.
조금 전 대기실에서 소리를 지르고 싸웠던 둘이었다. 그 미묘한 감정이 남은 것으로 보이겠지. 허탈한 미소와 함께 시우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살짝 휘청거린 그의 팔을 잡은 건 상준이었다.
“열이 꽤 심한데?”
상준은 시우의 등 뒤로 팔을 둘러 부축하자마자 훅 닿아 오는 열기에 당황했다. 방금까지 방싯방싯 웃으면서 라이브를 했던 시우였다. 이런 상태로 버텼다는 것인가? 가까이서 본 시우의 이마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형, 내가 업을게.”
에반이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들 감기 기운이 있어서 열이 올라 컨디션이 조금 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모습에 얼른 예찬이 시우의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평소라면 예찬에게 업히는 것을 도와줬겠지만, 상준은 오히려 시우를 제 품으로 더 끌어당겼다. 에반과 나눴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에반은 먼저 대기실을 나가면서 굳이 자신을 콕 집어서 데리고 와 달라는 말까지 남겼다.
“저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현기증이 조금 나서, 차에 가서 약 먹을게요. 지금 이동하면 되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심하게 생겼던 현기증이 사라지자 시우는 저를 부축하고 있는 상준을 힘없는 손으로 밀어냈다. 이미 사람들의 시선을 충분히 끌었다. 온갖 억측 가득한 악의를 잔뜩 품은 지라시 같은 기사들이 얼마나 쏟아져 나올지 모르겠다.
겨우 감기 같은 것으로 스태프며 멤버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대기실 밖은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뮤직 어워드를 취재하는 기자들, 다른 가수들과 그 스태프들. 사람의 입이라는 건 참으로 무서웠다.
이 바닥에선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을 떠나 그것으로 한 사람을 매장시켜 버리는 일까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도 지지 않는, 생존이 아니면 죽음만이 있는 곳이었다.
“너…….”
시우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눈가가 붉은 것쯤이야, 신인상 받아서 울었던 것으로 얼마든지 치부할 수 있었다.
“상준이가 시우 좀 체크하고. 이동부터 하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대환이 돌아와서 하는 말에 다들 분주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조금만 더 가면 뒷문이었고, 그 앞에 밴이 있을 것이다. 잠시 사그라드는 것 같던 열과 두통은 처음보다 더 세게 다가왔다. 제 허리 뒤를 살짝 받쳐 주는 상준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마냥 상준이 이끄는 대로만 걷던 시우는 옆에서 자신을 낚아채는 손길에 휘청이며 그곳으로 빨려들었다.
“…….”
“괜찮아, 나야.”
목소리보다 먼저 다가온 것은 그의 체향이었다. 퍼뜩 고개를 들었을 때, 시우는 낯선 차를 타고 있었다. 좌석에 앉은 것도 아니고, 에반의 허벅지 위에 마주 앉은 시우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 같았다.
한번 감긴 눈을 쉽사리 뜰 수 없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느껴지는 에반의 향에 시우는 본능적으로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후발현은 아닌 것 같은데.”
몸을 감싸고 있던 코트가 사라지고 제 한쪽 소매를 위로 끌어 올리며 중얼거리는 낯선 이의 목소리에 시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차 뒷좌석엔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뭐 하는…….”
착용하고 있는 마스크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묻혔다.
“진짜 아무것도 안 느껴지세요?”
한국말이 아닌 영어가 허공을 떠돌았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남자.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주사기까지 확인한 시우는 그의 손에 잡힌 제 손목을 빼내려 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차 안엔 네 페로몬밖에 없어.”
“코코, 잠깐만. 피부터 빼고 약 줄게.”
마스크를 벗겨 주고 등을 쓸어 주는 에반의 손길에 몸에서 힘을 뺀 시우는 낮은 한숨을 뱉어 냈다. 타오를 듯 뜨거운 몸에서 그와 닿아 있는 부분만 시원한 것 같았다. 후발현과 페로몬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들었다.
제게 후발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에반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나 갑자기? 지금? 왜?
하지만 지금 차 안에는 에반의 페로몬만 있다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그렇다면 후발현은 아니라는 소리잖아. 이어지는 두통과 열기는 열감기를 앓을 때와 비슷했다.
“무슨 약.”
바늘이 살갗을 찌르는 따끔한 느낌에 몸을 흠칫하던 시우는 약이라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대기실에서 대환이 들고 있던 약을 가져간 것이 떠올랐다. 검사하려고 일부러 약을 못 먹게 한 것인가?
“에반, 무슨 생각인지나 알자. 나 정말 아프고 힘들어. 지금껏 네 장단에 맞춰 줬으니까 대환 형한테 받은 약 내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기에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신 시우는 화낼 힘조차 없었다. 이상하게 에반의 페로몬이 한없이 가까이 느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품을 벗어나려던 시우는 한 팔로 자신을 더 감싸며 품으로 당기는 그의 행동에 흠칫 몸을 굳혔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인 것이니?
“제발 가만히 있어 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자신에 이어 이번엔 에반의 팔에서 피를 뽑아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무거운 머리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에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시우는 순간 깨닫고 말았다. 지금 제 몸에 휘몰아치는 열기의 끝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지독한 열감기라 생각했던 건 종이의 양면 같은 것이었다.
“페이든, 내 약은요.”
거기까지 대화를 들었지만, 더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방금까지 영어로 대화를 하던 그들은 이젠 불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제가 알아듣는 걸 아는 듯이 일부러 불어로 바꾼 것 같았다. 둘 사이에 빠른 말이 오가고 에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이윽고 달리고 있던 차가 멈추고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내렸다.
그리고 다시 출발한 차 안을 채운 건 침묵이었다. 에반의 큰 손이 시우의 뒷머리부터 목덜미로, 등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시우는 그 손길에서 전해지는 감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무거운 고통 뒤를 따르는 건 낯선 쾌락이었다. 하지만 그 손이 사라지자 다시 찾아든 건 묵직한 고통이었다.
“넌 알고 있는 거지?”
열이 나서 그런 것일까, 말을 꺼낸 시우는 낯선 단내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제 주위를 맴도는 것은 익숙한 박하 향인데, 그 안에 달콤한 향이 스며 있었다. 에반의 대답을 기다리며 시우는 열이 오른 이마를 그에게 비볐다.
“……뭘?”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
닿고 싶다, 더 가까이. 늘어져 있던 시우의 손이 에반의 가슴에 닿았다. 뜨겁게 뛰는 그의 심장이 손바닥 안에서 울렸다.
“네 약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한약을 먹는 중이라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몰라서 줄 수가 없대.”
“이거…… 후발현인 거야?”
분명 의사인 것 같은 자는 후발현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지만,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인 것 같았다.
“아니, 히트 사이클.”
에반이 정확히 내뱉은 명칭에 시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