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시상식 무대에서 내려왔더니 그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히끅거리며 겨우 숨을 들이마시고, 긴 한숨을 내쉬며 멈추려 했지만, 눈을 깜박이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가수석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결국 무대 뒤쪽 대기실로 들어온 시우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손을 팔랑거려 열이 오른 볼을 식히려 애썼다.
“우리 시우, 이렇게 울어서 어떡해. 예쁘게 꾸며 줬더니 망치고 있어.”
격해진 시우의 감정을 달래려는 현숙의 가벼운 농담에 시우의 입꼬리가 조금 실룩거렸다.
“너희들은 먼저 가고, 시우는 조금 있다가 가자.”
얼떨결에 다 같이 대기실로 들어온 멤버들을 내보낸 명훈 때문에 대기실엔 상준과 시우만 남아 있었다.
“넌 왜 안가?”
“화장실 좀 갔다가 가려고요.”
“그럼 이따가 시우랑 같이 올라가.”
겨우 눈물을 멈추고 메이크업 팀의 손을 빌려 엉망이 된 화장을 고치는 시우를 내려다보는 상준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시우는 참으로 강한 아이였다. 싹싹하고 눈치 빠르고 제가 할 일을 찾아서 했다. 앞으로 나서 방송을 망치는 일도, 뒤로 처지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해 내는 아이였다.
1집 때는 거의 빛을 발하지 못하던 시우는 2집 공개 후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알파의 그늘에 가려진 베타. 그나마 곡 작업을 함으로써 프로듀싱 쪽으로 인정을 받은 자신과 다르게 시우는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존재였다.
‘루시퍼’ 공개 이후 가장 많은 악플에 시달린 것도 시우였고, 과도한 언론 플레이의 집중포화를 받은 것도 시우였다.
앞뒤 가릴 것 없이 표현하고 당당한 에반과 다르게 시우는 숨기기 급급했다. 결국 친한 사람들 눈에는 다 들켜 버렸지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제대로 표현도 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갇혀 있었다.
사랑을 받는 만큼 늘어나는 시기와 질투는 아이돌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만, 시우에겐 그것이 유독 과했다.
언젠가 혼자 구석에서 조용히 휴대전화만 보고 있던 시우의 옆에 앉았던 적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시우가 읽고 있는 것들은 무수한 악플이었다.
‘인마, 넌 이럴 시간에 잠이나 자. 뭐 말도 안 되는 걸 보고 있어.’
‘이것조차 없을 때도 있었는데, 악플보다 무관심이 더 무서운데……. 형, 이거 생각보다 아프네. 나한테만 이러는 건 괜찮은데, 멤버들한테 피해 줄까 봐. 그런데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소속사에서 한번 싹 정리한다더라. 다들 정도를 몰라. 야, 일어나. 이거 볼 시간에 맛난 거나 먹자. 대환 형한테 매운맛 3단계 떡볶이 사 달라고 할까? 에반이는 못 먹게.’
‘3단계라고 에바니가 안 먹겠어요? 분명 예찬이가 또 톡톡 건들면 둘이서 눈에 불을 켜고 꾸역꾸역 먹을걸요?’
‘그럼 4단계?’
‘와, 그건 내가 싫어요.’
실없던 둘의 대화를 떠올리던 상준은 제 손끝을 살짝 잡아 오는 손길에 시우의 어깨쯤을 보고 있던 시선을 옮겼다.
“우리 신인상도 받았는데 형 표정이 왜 그래요?”
“그냥. 우리 꽤 고생했다 싶어서.”
“상준이 넌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얘 겨우 눈물 그치고 수정 다 했는데, 또 울리면 너 내 손에 죽어.”
겨우 마른 시우의 눈시울이 또 붉게 달아오르자, 뒤에서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것을 지켜보던 현숙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저 진짜 안 울어요. 저 잘 안 우는 거 알잖아요.”
어린애같이 계속 울었던 것이 민망해 시우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빨리 화장실 갔다 올라가라는 명훈의 말에 둘은 대기실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상준과 함께 분주한 복도를 지나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를 하면서 겨우 화장실에 도착한 시우는 세면대 앞에 서서 손을 씻었다.
아직 눈꼬리와 코끝, 귀가 붉었지만 그래도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울을 보던 시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몰아치는 복합적인 감정에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기쁨이 뒤늦게 찾아든 것이다. 신인상이라니, 설마설마했던 일이 제게 일어났다. 물론 제가 아는 과거의 오션은 늘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정말 제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시우는 물에 젖은 제 손을 보았다. 묵직하던 트로피가 떠올랐다. 진짜 꿈이 아니구나. 현실이구나.
“와……! 진짜 요즘 것들은 아래위가 없네. 선배를 봤으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끄러미 손을 보던 시우는 뒤에서 들리는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엔 시우 자신 외에도 한 사람이 더 비쳤다.
현재 최정상의 위치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톱 아이돌 그룹의 리더 환희를 여기서 이렇게 볼 줄이야.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시우는 얼른 몸을 돌려 그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꼭 만나 보고 싶던 이였다. 비록 개인적인 사생활로 스캔들이 터지긴 했지만, 실력만큼은 굉장했다. 무대 장악력이나 보컬 실력에 퍼포먼스만큼은 원톱으로 불리던 자였다.
“신인상 받았다고 기고만장이냐? 기강이 물러 터졌네. 요즘 것들은.”
“죄송합니다.”
“그런데…… 너 좀 재밌다?”
인사보다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뱉은 시우는 자신의 턱 끝을 건드는 손길에 몸을 살짝 굳혔다. 굳이 인사를 하고 있는 제 턱을 건들 이유가 있나? 머뭇거리는 사이 시우는 그에게 턱이 잡힌 채로 천천히 몸을 바로 해야 했다.
저보다 키가 컸기에 시우는 절로 고개를 젖혀 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시우는 황급히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눈을 빠르게 깜박인 시우는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세면대에 막혀 그럴 수도 없었다.
“분명히 베타인데 말이야. 왜 알파 냄새를 이렇게 묻히고 다녀. 사람 오해하게…….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가까스로 그의 얼굴을 피했지만, 환희는 시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이렇게 기분 나쁜 행동이었나? 수시로 저를 앞에서든 뒤에서든 끌어안고 제 목선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장난을 치던 에반이 떠올랐다.
“생긴 건 딱 오메간데, 아! 오션에 알파가 셋이었지.”
환희가 멀어지면서 꿍얼거리는 말이 어떤 뜻을 담았는지 이해한 시우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예쁜아, 조만간 형이랑 술 한잔하자. 인맥이 좋을수록 이 판에서 지내기 쉬운 건 잘 알지? 신인상 정도 받았으면 내가 놀아 줄 만도 하고. 뭐…… 대충 알 것도 다 아는 것 같으니까.”
끝까지 일방적이었다. 시우가 반박할 시간도 대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제 할 말만 내뱉은 환희가 화장실을 빠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너 왜 그러고 서 있어?”
방금 기분 나쁜 것이 닿은 턱과 목선을 쓸던 시우는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제 옆에서 손을 씻는 상준을 본 시우는 입 안으로 한숨을 삼켰다. 방금의 그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어깨가 뻐근해서요.”
괜한 분란을 만들 이유가 없다. 목선을 만지던 손으로 어깨를 잡고 가볍게 돌리며 시우는 태연하게 말했다.
쓰레기 같은 말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뜨지 못하는 아이돌에겐 이런 더러운 손길이 참으로 쉽게 다가왔다. 제대로 키워서 스타로 만들어 준다는 명목하에 이뤄지는 더러운 거래 같은 것 말이다.
“빨리 가자. 늦게 가면 나중에 명훈 형한테 또 한 소리 듣는다.”
상준의 재촉에 시우는 그의 발걸음에 맞춰 빠르게 걸었다. 역시나 지나치는 사람들에겐 인사를 해야 했고, 무대를 보는 다른 가수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게 몸을 숙이며 시우는 빠르게 오션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상준이 먼저 가고 그를 뒤따라간 시우는 에반의 옆자리가 빈 것을 보고 그곳에 앉으려 했다.
“…….”
막 도착해서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에반에게 손목이 잡힌 시우는 그대로 끌려서 다시 가수석을 벗어나야 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놀란 시우가 에반의 손목을 잡으며 발걸음을 멈추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시우가 그의 힘에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친 이는 루이였다. 무언가에 굉장히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는 그의 뒤로 팬텀의 모든 멤버가 황급히 손으로 코와 입을 막는 장면을 보아야만 했다.
“씨발, 개새끼 죽여 버리…….”
빠르게 앞서 걷는 에반 때문에 그 뒤를 뛰듯이 걸어가던 시우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질 낮은 비속어를 내뱉는 에반의 손을 뿌리치려 그의 손등이나 팔을 때려도 걷는 것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쾅-.
문을 연 것도 아니었다. 발로 걷어차 대기실로 들어간 에반은 그제야 시우의 손목을 놓았고, 안에서 대기 중인 스태프들이 놀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야, 너 미쳤어?”
얼마나 세게 움켜쥔 것인지 방금까지 그가 잡고 있던 손목이 시큰거렸다. 이곳에 스태프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우는 큰 소리로 말했다.
“씨발. 내가 이래서…… 이딴 짓 안 하고 싶었지.”
“무슨 짓.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인데? 다짜고짜 사람을 끌고 내려와서 욕을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갑자기 사람을 끌고 들어와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에반의 모습에 시우 역시 지지 않고 받아쳤다.
당황한 스태프들이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 에반은 한쪽에 있던 탈취제부터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기실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시우에게 거침없이 뿌리기 시작했다.
“야! 에반! 에반 루이스. 진짜 미쳤어? 왜 이러는 건데?”
그냥 뿌리는 것도 아니고 거의 들이붓다시피 탈취제를 뿌려 대는 에반 때문에 시우는 황급히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황급히 소리치느라 탈취제를 들이마신 시우는 기침까지 토해 냈다.
“……젠장.”
거의 빈 통이 된 탈취제를 에반이 바닥에 던져 버리자, 대기실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메이크업을 수정했는데……. 곱게 웨이브를 넣은 시우의 머리카락은 흠뻑 젖어 웨이브가 사라졌다. 깔끔했던 재킷의 어깨가 축축해졌다.
“……에반, 넌 다시 돌아가고. 시우는…… 그래, 옷 갈아입고, 모자가 있었나?”
이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보던 현숙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엔 모두 놀라고 당황했지만, 바닥에 나뒹구는 페로몬 탈취제를 보고선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저 몇 번 뿌리면 될 것을 다 들이부은 것이 문제겠지.
“안 가요.”
불퉁한 에반의 대꾸에 입술을 달싹이던 대환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는 이들이 둘의 사이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으니까. 아니 적어도 에반이 시우에게 가진 감정이 어떤 것인지 모두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그것도 성적인 의미를 가득 담은 페로몬 샤워까지 당하고 온 것을 알아차린 알파가 가만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