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방금까지 여유롭게 멤버들과 농담을 주고받던 에반의 얼굴에서는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기실을 벗어난 에반은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을 것이다. 그저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는 것일 뿐이다. 주위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에반은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며 복도를 지나쳤다.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들어온 답에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고, 본능적으로 그들보다 빠르게 몸을 피하던 에반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앞 좀 보고 다니자.”
멈칫 발걸음을 멈춘 에반은 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건 의도적으로 그가 어깨를 부딪친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이나 앞서 데뷔한 인기 아이돌의 얼굴을 확인한 에반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과가 아니었다. 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말을 하며 조금 전보다 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니까.
“그래, 인기 좀 얻었다고 벌써부터 목에 힘주고 다니면 쓰겠니? 선배 보면 허리도 잘 숙이고. 열심히 해라.”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 어깨를 툭툭 치다가 미간이 찌푸려지도록 세게 잡았다가 놓는 행동으로도 모자라 겁대가리 상실한 충고까지 던지자 에반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선배님, 적당히 즐기세요. 잘못하면 연예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이름 올라갑니다.”
방금까지 숙이고 있던 몸을 바로 하고, 저보다 조금 키가 작은 알파를 내려다보는 에반의 얼굴엔 자비 따위는 없었다. 이런 피라미 같은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판에서 구른 것이 몇십 년이다. 제가 보낸 시간대에서 어느 그룹이 데뷔하고 그들이 어떤 길을 밟았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굳이 손을 댈 필요도 없었다. 온갖 염문을 뿌려 대다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켰던 이가 제 앞에 있는 놈이었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 오자 에반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를 떴다. 제 뒤로 비속어들이 쏟아졌지만, 그런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긴 통화를 끝내고 돌아오기 무섭게 에반은 멤버들과 홀로 나가야 했다. 선배 가수들에게 모두 인사를 하고 배정받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에반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
등 뒤에는 방청객들이 가득하고, 눈앞에서는 화려한 무대가 펼쳐졌다. 상준의 옆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에반은 그의 말에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하기 위해 상준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팬들은 그들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쪽을 찍고 있는 직캠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닐 것이다. 그걸 알기에 시우가 상준의 옆에 앉을 때도 굳이 팔을 뻗어 제 옆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시우 좀 잘 지켜봐 줘요.”
기껏 물었더니 또 시우 챙기는 것이냐. 상준은 잔뜩 신이 난 채로 다른 아이돌의 무대를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시우를 흘깃 보았다.
“신나게 잘 놀고 있고만.”
“그냥 좀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바로 한 에반은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가수들의 무대와 시상식으로 이루어지는 뮤직 어워드는 최소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차라리 녹화 방송이면 좋을 텐데, 아니라면 생방송 시간이라도 짧든가.
“그런데 너 좀 웃어라. 표정 진짜 굳은 거 알지?”
작게 들리는 상준의 충고에 굳어 있던 에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담지 않은 채, 그들이 원하는 표정을 짓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자본주의 미소라고 하던가? 에반은 슬쩍 고개를 틀고는 팬들을 향해 치아를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건 일도 아니니까.
설렘. 진심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참여하고 싶던 무대였다. 방청객으로라도 꼭 와 보고 싶던 뮤직 어워드에 제가 있었다.
2집의 콘셉트상 시우의 옷은 장신구가 많고 화려했다. 흰색 셔츠에는 프릴이 잔뜩 달렸고, 비슷한 재킷이라고 해도 시우의 재킷엔 수가 놓이거나 화려한 요소가 꼭 하나씩은 들어갔다.
손목에도 시계 대신 레이어드한 여러 개의 팔찌가 있었고, 귀에는 늘 치렁거리는 귀걸이가 자리 잡았다. 손가락에도 기본적으로 두세 개 이상의 반지들이 빼곡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어떤 장신구도 없었다. 멤버 모두 검은 슬랙스를 입었고, 흰 셔츠에 검은 구두를 신었다. 보타이나 넥타이로 나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깔끔한 정장을 베이스로 하고 있었다. 재킷의 색이나 디자인이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시우는 몸에 핏되는 정장 차림에 보타이가 아닌 폭이 좁은 검은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늘 여러 개의 팔찌를 레이어드하던 손목에는 고가의 시계를 차고, 치렁치렁한 귀걸이 대신 깔끔한 귀걸이를 착용했다. 손에 있던 수많은 반지들도 사라졌다. 결국 남은 것은 에반과 나눠 낀 왼손 검지의 플래티늄 반지가 전부였다.
뮤직 어워드에 참석하기 위해 시우의 머리는 다시금 탈색과 염색을 반복해 금발에 가까운 연노란색으로 변했고, 지금 그 머리카락은 굵은 웨이브를 만들고 있었다.
“우와, 진짜 소문이 사실이네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시우는 옆에서 들린 말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자리에 앉으면서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멤버들끼리의 자리 이동이 있었는지 시우의 옆엔 루이가 있었다.
우리 꽤 잘 지냈는데, 갑작스러운 회귀 이후 활동 시기가 겹치지 않아 얼굴을 보지 못했던 그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안을 보자 제가 있는 곳이 더 믿기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김시우입니다.”
당장이라도 가벼운 포옹을 나누고 잘 지냈냐며 근황을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시우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팬텀의 루이, 이쪽은 안이에요.”
루이가 자신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앉은 안까지 불러 인사를 시키는 바람에 졸지에 셋이 같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나누었다.
“진짜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루이가 먼저 손을 내밀자, 시우는 마다하지 않고 그의 손을 맞잡았다. 루이와 안은 여전히 예쁘구나. 팬텀의 다른 멤버까지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그들의 화려한 외모는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다.
“저두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진짜일지는 몰랐거든요.”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양 루이가 몸을 기울이며 속닥이는 통에 시우의 몸도 절로 그에게로 기울었다.
“무슨 이야기가 있어요?”
“형이 진짜 예쁘다는 말이요.”
맑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시우도 덩달아 웃고 말았다. 그래, 루이 성격이 이랬지. 꾸밈없고 밝은 아이. 돌려 말하는 것보다 솔직하게 말했다. 제게서 에반의 페로몬이 난다는 껄끄러운 사실도 먼저 알려 준 이가 루이였다.
“팬텀의 루이 씨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형 공항에서 봤거든요!”
처음 본 사이지만 살갑게 형이라고 부르며 공항에서 봤다는 말을 잇는 순간 시우의 볼이 붉어졌다.
“아, 그건 이벤트성으로 벌칙 받은 거라. 잊어 주세요.”
“저희 이제 활동 시작하는데, 오션은 활동 끝났다면서요? 같이 활동하면 자주 보고 좋을 텐데.”
“그러게요. 혹시 알아요? 다음엔 겹칠지. 꼭 겹치지 않아도 연락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앞으로 휴대전화가 불쑥 나타났다. 행동력까지 빠른 루이를 향해 미소 지은 시우는 그의 휴대전화에 자신의 번호를 남겼다.
“앞으로 잘 지내요.”
끝까지 속닥거리면서 말하는 루이가 귀여워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환호성이 무대를 향한 것인지, 자신과 루이를 향한 것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았다.
루이와 이야기를 끝내고 몸을 바로 한 시우는 옆에 있는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은 잊었지만, 여전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을 열고 물을 한 모금 머금어 입과 목을 축인 시우는 이내 허리에 힘을 주며 몸을 곧게 세웠다. 편히 다리를 꼬는 것보다 발끝을 까딱이며 리듬을 타는 것을 선택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니까.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무대를 보고 환호성을 내뱉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팬들의 직캠에 언제 어떻게 찍힐지 알 수 없었다.
“편하게 있어. 허리의 힘 풀고.”
갑자기 들리는 에반의 목소리에 시우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방금까지 상준 형이 앉아 있었는데, 언제 제 옆으로 왔을까? 시우는 대답 대신 마시고 있던 생수병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긴장돼?”
시우의 손에 있던 생수병이 에반의 손으로 넘어갔다. 긴장되냐고? 당연한 말이 아닐까? 그에게 생수병을 건넨 시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에반은 방금 시우가 마셨던 생수병을 열고는 곧바로 물을 들이켰다. 분명 괜찮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확실히 시우는 조금 긴장했을 뿐, 불편해 보이는 곳이 없었다. 음악에 맞춰 발끝을 까딱이고 머리를 작게 옆으로 갸웃거리기도 했다.
문제는 페로몬이었다. 시우의 페로몬이 짙어졌다.
스태프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에반조차 시우의 볼에 어린 홍조를 지나칠 뻔했다. 짙어진 페로몬 역시 긴장감 때문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아픈 곳은 없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었는데 뭐가 피곤해.”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이상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해.”
에반이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고 속삭였기에 시우 역시 그에게로 몸을 기울여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대화를 마치고 몸을 바로 하던 에반은 자신과 시우를 보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 복도에서부터 시비를 걸더니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것인가? 그러잖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쓸데없는 쓰레기까지 붙은 것 같았다. 원래 일이란 것은 순조로울 때 발생하지 않았다. 꼬이고 꼬였을 때, 감당하기 벅찰 때 터졌다.
팔짱을 끼고 턱을 만지던 에반은 슬쩍 뒤로 몸을 기대앉았다. 그리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시우의 뒤로 한 팔을 짚었다. 별일 없을 거라고 계속해서 되뇌면서도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불안감은 쉬이 떨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