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오션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 팬들이 불러 주는 이름. 수많은 스태프의 손길을 빌려 탄생한 스타일. 화려한 무대 위에서 숨이 막힐 때까지 격동적으로 움직이는 몸.
음악 방송에서 받는 1위 트로피.
수없이 이어지는 스케줄.
촌스러운 핑크색의 어설픈 가발을 쓰고 방송국 소품실에 쌓여 있던, 쿰쿰한 냄새가 가득하던 다 낡은 공주 드레스를 입었던 시절이 떠오르자 감겨 있던 시우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방금 제가 샤워 부스 밖에 벗어 놓은 명품 옷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여장이지만 과거의 것과 지금의 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한동안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다. 꿈에 그리던 순간이 코앞에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자. 늘 그랬잖아.”
샤워를 끝내고 챙겨 온 옷으로 갈아입은 시우는 목폴라를 반으로 접지 않고 길게 늘여 자연스러운 주름을 만들었다. 목폴라 니트였으니 망정이지. 멍이 들거나 흔적이 심하게 남지는 않을 것 같지만, 샤워로 체온이 올라간 탓에 목 주변이 유독 붉어져 있었다.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은 시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바니 얼굴 어떻게 봐.
끌어안고 잠을 자고, 장난처럼 포옹도 하고, 입도 자주 맞췄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의 페로몬이 짙게 느껴지고 몸 안 깊은 곳이 평소보다 뜨거운 것 같았다. 샤워까지 했건만 에반이 만들어 놓은 복합적인 감정과 감각들이 계속 남아 있었다.
“보약이 문제네, 보약이. 도대체 안에 뭘 넣으셨나요?”
시우는 문에 이마를 꽁, 하고 대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보약을 먹은 이후로 확실히 손발이 따뜻해졌다. 더위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제가 지금껏 딱히 춥다고 생각한 적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나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미적거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시우는 손을 니트 안으로 넣어 아랫배를 살살 문질렀다. 딱히 살결에선 열기를 느낄 수 없었다. 평소 체온과 비슷한데 유독 몸 안이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제 착각일까?
멍하니 배를 문지르고 있노라니 배가 고파 왔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코디 팀에 끌려다니느라 뭘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다. 면세점에서 먹은 커피가 전부였구나.
“시우야! 시우 어디 갔어?”
밖에서 저를 찾는 소리에 시우는 어깨를 으쓱하고 몸을 바로 했다.
“네! 저 여깄어요.”
문을 열고 나간 시우는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슬리퍼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누군지 뻔하니까.
“우리 예쁜 시우 누나 어디 갔었어? 시우 누나, 보고 싶었어요.”
“찬이 형이 보고 싶어 하는 시우 누나가 앞으로 볼 생각 하지 말래요.”
슬리퍼에 발을 꿰고 멤버들이 모인 곳으로 간 시우는 자신을 보고 누나라고 부르며 놀리는 찬의 말에 웃으며 가볍게 받아쳤다.
“왜? 누나한테 아직 사인도 못 받았어!”
“아……. 우리 누나 돌려줘요.”
어느새 다가온 예찬은 긴 비행에 적합한 트레이닝복 바지에 헐렁한 니트를 입은 시우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흔들며 우울한 듯 중얼거렸다.
“아서라. 그 누나 두 번 왔다가는 혼성 그룹으로 오해받겠다. 시우, 넌 뭐 먹을래? 우리 다 배고파서…….”
“뭐 있어요?”
어색할 때는 단둘이 있는 것보다 멤버들과 어울리는 것이 나았다. 잠시 평소보다 전체적으로 몸에 열감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이내 먹는 것 앞에서 시우는 제가 가진 의문을 모두 잊어버렸다.
* * *
“와, 장난 아니다.”
시우는 예찬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도 처음 온 뮤직 어워드이지만, 오션 멤버들도 처음이었다. 회귀 시점이 변한 것 때문인지 오션의 데뷔도 바뀌어 있었으니까.
에반을 기준으로 그가 열여덟 살에 데뷔해 지금쯤이면 데뷔 3년 차여야 했지만, 그들은 올 1월에 첫 앨범을 낸 신인이었다.
1집에 이어 2집까지 무사히 성공 가도를 달린 덕분에 초대받아 온 것이긴 하지만, 솔직히 신인상 정도만 받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어딜 가나 지나치는 스태프와 가수들을 보고 90도로 인사하기 바빴고, 리허설부터 모든 것이 제일 마지막 순서였다.
“인마, 넌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냐?”
뮤직 어워드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불안함을 드러내는 멤버들과 다르게 대기실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에반을 본 상준이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부터 놀라는 일도 없고, 긴장하는 일도 없고. 어떤 일이든 막힘없이 척척 해 내는 에반이 참으로 신기했다.
“그냥 하는 거지. 떨릴 게 뭐 있어요.”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던 에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고, 에반은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휴대전화에 글을 입력했다.
“왜 안 떨려? 무대가 다르잖아, 무대가.”
“상준아, 너 아직 몰라? 쟤 인생 3회 차잖아. 최소 3회 차.”
얌전히 코디의 손길을 받으며 서 있던 찬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럴 것도 같네.”
“3회 차 아닌데……. 예찬이 너 언제 이 사진 올렸어? 난리 났네.”
휴대전화 만지는 것에 집중하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 꼬박꼬박 대답하던 에반은 미간을 찌푸린 채, 예찬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런 사진은 또 찍은 거지? 예찬의 SNS에는 시우와 예찬이 공항 VIP 대기실 창가에서 꼭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더군다나 그 아래 있는 멘트는 단 한 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운 시우 누나♡]였다.
연예 뉴스나 팬들의 SNS는 시우의 공항 패션으로 떠들썩했다. 지금도 수시로 그때 공항에서 그들을 찍은 팬들의 사진이 꾸준히 올라왔다.
“시우 형이 올려도 된다고 했어요.”
예찬은 의자에 앉은 채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시우를 흘깃 보았다. 시우만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건 분명히 시우에게 살려 달라고 구원의 요청을 보내는 것이었다.
“잘 나왔지?”
에반의 말에 휴대전화를 들어 예찬의 SNS를 확인한 시우의 입꼬리가 곱게 올라갔다. 이렇게 보니 정말 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시우와 예찬을 보던 에반의 눈썹이 실룩거렸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에반은 휴대전화 갤러리를 클릭했다. 예찬이도 올리는데 제가 못 올릴 이유가 뭐가 있는가?
“그런데 에반 형, 인생 3회 차가 아니라고? 그럼 5회 차?”
“아니.”
“그럼 몇 회차예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예찬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 긴장으로 바싹 마른 입 안을 축이며 물었다.
“궁금해?”
“네.”
말도 안 되는 대화가 대기실에서 오갔다. 시우 역시 그들의 실없는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제가 생각해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에반은 신인치고 방송에 관련된 것을 많이 알고 있었다. 오션의 앨범과 스케줄에도 어느 정도 개입을 하는 그였다. 방송에 대해 알아 가기 위해선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기획부터 참여하는 것이라면 이쪽 바닥에 대한 정보가 많아야 했다.
그런데 에반은 무난히 그 일들을 다 해 냈다.
지금의 삶에서 에반은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 후 한국으로 와 연습생을 거쳐 아이돌로 데뷔했다. 그가 연습생 생활을 한 기간과 시우가 오션이라는 그룹의 연습생이 된 시기도 비슷했다.
회귀라. 제가 지금 그 일을 무수히 겪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대화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세?”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한 표정으로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툭 내뱉은 에반의 말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시우야, 앞에 봐야지 하는 말에도 쉽사리 고개를 바로 할 수 없었다.
“뭘 세요?”
“회귀했냐며. 그걸 어떻게 세. 한두 번이야 센다지만.”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에반의 대답에 찬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은 스태프들도 연이어 웃기 시작했다.
“아니 뭘 그런 걸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 몇 번 회귀했냐고 묻는 애나 그걸 또 못 센다고 답하는 애나 똑같다, 똑같아. 허이고, 에반 너도 사진 올렸냐?”
‘그걸 어떻게 세?’
방금 에반이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에반이 회귀자라고? 에반을 보던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드는 에반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시선이 얽히자마자 씩 웃으면서 제게 윙크를 하는 그 모습에 얼른 눈을 감았다.
“이쪽 보고. 눈 좀 감고 있어.”
시우는 고개를 앞으로 하고 눈을 감고 있으라는 스태프의 말을 착실히 따랐다. 방금까지 평온했던 기분이 이상하게 꼬였다. 무언가 끝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잡히지 않았다.
“시우야, 더워?”
얼굴에 부드러운 브러시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문장을 되뇌던 시우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조금 시원한 느낌이 나는 스태프의 손이 시우의 이마에 닿았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감기 기운이나 불편한 곳 있니?”
그녀의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에반이 일어나 다가오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아뇨, 컨디션 괜찮은데요.”
잠시 고개를 갸웃한 시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평소와 다름없었다. 비행 후 충분히 쉬었고, 어제 스케줄도 뮤직 어워드 리허설이 전부였다. 잠도 편히 잤고, 딱히 불편한 곳도 없었다.
스태프가 그리 말한 건 하얗다 못해 투명한 것에 가까운 시우의 볼이 조금 불그스름해 보인 탓이었다. 메이크업으로 쉽게 가려지긴 하지만 매일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스태프는 그런 미묘한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뒤로 다가온 에반의 큰 손이 시우의 어깨에 올라왔다.
“……에반. 네가 봐도 좀 그렇지?”
볼만 붉은 것이 아니라 목덜미나 귀, 시우의 손끝도 평소보다 붉었다.
“네. 조금 그렇네요.”
거울에 비친 시우의 얼굴을 본 에반이 조금 뜸을 들인 후, 천천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제 손 아래 있는 시우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오늘 아침 같이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정말 친하거나 늘 그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놓칠 만큼의 작은 변화였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긴장해서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몰리자 시우가 조금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30분 뒤에 홀에 나가야 하니까 늦지 않게 와.”
명훈의 말에 에반은 알겠다는 말을 남긴 채, 급히 대기실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