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괜찮겠어?”
차에서 내린 시우는 휘몰아치는 12월 초의 찬 바람에 몸을 움츠린 채, 옆에 있는 캐리어 손잡이를 조절했다.
괜찮고 안 괜찮고를 따지기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처음부터 그녀들의 설득에 넘어가서는 안 됐다.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그녀들의 확답과 지금 이 나이, 이때 아니면 두 번 다시 못 한다는 말과 어쨌거나 온갖 감언이설과 함께 에반을 놀려 주고 싶다는 제 욕심이 빚어낸 참사였다.
“바람만 덜 불면요.”
8cm 높이의 가죽 니하이 부츠를 신는 것도 아니고 탑승하다시피 한 시우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퍼 재킷을 손끝으로 잡았다.
이 안건을 거절했다면 시우가 입어야 했던 의상은 동물 잠옷이었다. 한 벌로 된 동물 잠옷. 그것을 입고 출국 포토 라인에 설 것이냐. 아니면 여장을 할 것이냐.
동물 잠옷보다는 여장이 나을 것 같아서 그냥 여장을 하겠다고 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여자 캐릭터로 꾸미고 예능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지…… 진짜 여자 연예인 겨울 공항 패션을 그대로 구현할 줄 누가 알았을까.
막내 코디가 들고 있던, 갈색의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긴 가발을 보고 좀 불안해서 고민했다. 하지만 니하이 부츠를 신어야 한다고 말 안 했잖아요. 인조 퍼 재킷을 입어야 한다고도 말 안 했잖아요.
어쨌거나 지금 시우는 검은색 가죽 짧은 반바지에 니하이 부츠를 신고 검은색 오프숄더 니트를 입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화룡점정이라며 절대 팔을 꿰지 말고 어깨에 걸치고만 다니라는 흰색 인조 퍼 재킷을 걸친 시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이고, 우리 시우 정말 이쁘네. 이름도 시우라서 그냥 불러도 되겠다.”
박수가 나오세요? 바람에 날리는 시우의 머리카락을 끝까지 정리해 주는 현숙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지만, 시우의 시선은 공항 입구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공식 일정이었기에 오션이 포토 라인을 가질 입국장 게이트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쫙 깔려 있는 기자부터 해서 팬들,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대기하고 있는 경호원들까지.
이윽고 익숙한 번호판을 단 밴 두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누나, 나 진짜 못 하겠으엉……. 저길 어떻게 뚫고 들어가. 미친 짓이야. 경호원들이 막을 거라고.”
“스태프인 우리랑 같이 가는데 막긴 왜 막아. 자, 이거 쓰고.”
시우는 그녀가 내미는 선글라스를 착용하면서도 시선은 계속 밴에 닿아 있었다.
“마스크는 안 줘요?”
함성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멤버들이 차에서 내리는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이곳에서도 번쩍거리는 플래시 세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그냥 선글라스까지만 하자. 적어도 네가 누군지는 알려 줘야 하잖아.”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코디 팀과 함께 걸으며 시우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스스로 이슈를 만드는구나, 만들어. 차라리 동물 잠옷을 입고 저 앞에서 귀여운 척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박제당해 여기저기 떠돌 것이 분명했다. 예찬의 이름을 부르짖는 소리에 이어 에반의 이름까지 들리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혹시나 멤버들이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그럼 직접 선글라스를 벗고 제가 누구인지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반은 알아보지 않을까?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경호원들에게 저지당할 것이라는 시우의 예상과 다르게 코디 팀과 함께 움직이자 쉽게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시우야?”
멤버들과 가까이 있던 명훈은 자신의 옆에 선 여자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 옆에 코디들이 없었다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네 명의 멤버들이 다 내리고도 아직 시우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다들 밴을 흘깃거렸다.
멀리서 시우는요! 시우야! 시우를 부르는 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포토 라인에 서 있던 에반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무표정에 가깝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자 시우는 그가 저를 알아봤음을 알 수 있었다. 곧 에반은 포토 라인을 벗어나 이곳으로 다가왔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까지 하나 했는데, 오늘 연예면 장식은 우리 코코겠다.”
“쪽팔려 죽겠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오션의 메인 매니저인 명훈의 옆에 서 있는 한 여자. 그리고 포토 라인을 벗어나 그 여자에게로 다가가 상체를 살짝 숙이고는 둘이 귓속말을 나누는 모습에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졌다. 엄청난 소음에 에반이 하는 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은 시우는 에반이 제 팔짱을 끼라는 듯 팔을 보여 주는 행동에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과 함께 이쪽을 주시하던 예찬이 박수를 치며 크게 웃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멤버들은 제가 누구인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귓속말을 나눈 에반과 다르게 성큼성큼 다가온 예찬은 걷느라 느슨하게 뒤로 젖혀진 시우의 재킷 끝을 잡아 여며 주며 평소처럼 말했다.
“시우 누나, 너무 예뻐요.”
예찬의 말을 들은 상준이 피식거리며 웃다가 이번엔 그가 시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항상 그들보다 작았던 시우지만, 높은 굽 덕분에 지금은 그들과 눈높이가 엇비슷했다.
결국 멤버들과 가벼운 포옹이나 인사를 나눈 시우는 포토 라인 가운데 서서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사진 촬영에 임해야 했다.
앞에는 찬을 두고 뒤에는 에반을 매단 채, 공항 안으로 들어간 시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출국하는 연예인이 많은 오늘. 공항 안은 출입국을 하는 사람들보다 연예인들을 촬영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은 상황이었다.
경호원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았다. 거기다 팔을 꿰어 입지 않고 걸쳐 놓은 재킷도 문제였다. 한 손에는 현숙이 챙겨 준 클러치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연신 흘러내리려는 재킷을 추슬러야만 했다.
밖에서 포토 타임을 가졌지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시우가 누구인지 몰라 당황해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듯 시우에게로 다가오는 손길에 결국 그의 뒤를 따르던 에반이 시우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제 품에 끌어안듯 에스코트했다.
출국 게이트를 지나 VIP 라운지에 들어서서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시우는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키 차이 때문에 신발 안에 깔창을 넣는 일이 흔해서 괜찮을 줄 알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운동화나 남성용 신발에 깔창을 넣는 것과 아예 밑창 라인 자체가 다른 여성용 구두는 차원이 달랐다.
“으, 발 아파.”
“와, 진짜 대박이다. 시우 형, 어떻게 이러고 공항에 올 생각을 해요?”
옆에 앉은 예찬이 저를 훑어보며 하는 말에 시우는 손을 들어 장난스럽게 그의 머리를 톡 쳤다.
“현숙 누님의 큰 뜻을 넌들 거역할 수 있어? 여장 아니면 동물 잠옷인데, 내가 생각한 여장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정신 차리고 보니 이러고 있는데 어떡할 거야.”
“그런데 옷은 어떻게 갈아입냐?”
명훈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시우에게 쏠렸다. 그 순간 검은색 모직 코트가 시우의 다리 위로 휙 올라왔다.
“비행기 타고 갈아입어야죠. 갈아입을 만한 공간도 없고.”
시우는 제 다리를 가린 것이 에반이 입고 있던 코트인 것을 알고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명훈의 말에 현숙이 대답했다.
“거기다 지금 시우 저 상태로 여자 화장실을 가? 아니면 남자 화장실을 가겠어요.”
그녀가 덧붙인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정신없는 틈에 찬은 셀카를 찍자며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
작은 소동과 함께 멤버들과 셀카까지 다 찍은 시우는 한숨을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운지 한쪽에 있는 셀프 바에서 커피라도 한잔 마실 생각이었다.
“우리 여기서 얼마나 대기해요?”
“30분 정도.”
대환에게 여유 시간을 확인하고 셀프 바로 가려고 발을 옮기던 시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상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타이밍도 이런 타이밍이. 상준이 놓친 무선 이어폰이 바닥을 굴렀고, 시우가 그것을 밟아 버린 것이었다. 그냥 운동화였다면 무사했을지도 모르지만, 정확히 그가 신고 있는 구두의 좁은 뒷굽에 밟히면서 부서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가자.”
시우가 발을 치우고 처참하게 부서진 상준의 이어폰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들린 목소리에 시우는 고개를 돌렸다.
“상준 형, 금방 이어폰 사 올게요.”
어느새 시우는 에반과 함께 라운지를 나서고 있었다. 시우는 자신을 보고 키득거리며 웃는 에반의 모습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만 웃지.”
“예뻐서.”
출국 대기장은 공항 로비보다는 한가했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에반과 시우가 나간다는 말에 그들의 뒤로 경호원 몇 명도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두 번 이뻤다간 박장대소하겠다?”
“그건 아닐걸.”
마주 오던 사람들의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는 것을 본 에반은 팔을 뻗어 시우의 허리 쪽을 감싸고는 제 쪽으로 당겼다.
“응?”
“앞에 사람. 그런데 발은 괜찮아? 아니면 여기서 신발이라도 사서 신을까?”
라운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무선 이어폰 매장에 들어선 둘은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아니. 최악이긴 하지만 참아야지. 무슨 신발을 또 사. 진짜 하이힐 신는 모든 여성분들이 존경스러워. 깔창이랑은 차원이 다르네. 토슈즈랑도 다르고.”
상준이 사용하는 무선 이어폰을 고른 둘은 천천히 매장을 돌아다녔다. 공항에 들어오고 난 이후 사람들을 의식해 에반의 근처엔 가지도 않던 시우는 또 잊고 말았다. 그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 생각하고 되뇌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때면 어느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매장을 구경하던 그들의 손엔 어느새 커피도 한 잔씩 들려 있었다.
“헐. 대박. 에반…….”
옆을 지나치던 이의 입에서 나온 감탄사에 시우가 작게 웃었다. 검은 마스크를 써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초록 눈동자만큼은 가릴 순 없었다.
“내 선글라스라도 빌려줄까?”
“옆에 누구야?”
지나쳤지만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하는 말이 정확히 들렸다.
“제 친구요.”
갑자기 시우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뒤돌아보면서 그들의 말에 대답하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
당황한 듯 그들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요. 저 시운데요.”
에반 목격담에 이상한 오해가 잔뜩 들어가 말도 안 되는 열애설이 날까 두려워진 시우는 홱 돌아서서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해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라운지로 돌아올 때까지 몇 번이나 이어졌다. 사람들과 멀어질 때마다 제 허리에 붙은 에반의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짓궂은 표정으로 장난을 치는 에반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