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에츄~
조금 떨어져 있는 예찬이 작게 재채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자신들을 찾으러 온 것 같은 예찬은 그들을 보고도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망을 보며 스태프들이 가까이 올 때마다 뭐라고 말하며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끌어안은 시우의 몸에서 느껴지는 찬기에 에반은 더 이상 밖에 있을 수가 없었다.
‘뮤직 어워드 끝나고 자유 시간 있는 거 알지? 그때 제대로 이야기하자. 네게 일어날 일도, 내게 일어날 일도.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까지.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우린 같이 있잖아.’
그래도 시우가 완전히 눈물을 그칠 때까지 그를 끌어안고 토닥이며 시간을 보내고 싶던 에반은 욕심을 접어야만 했다.
으에취!
낮은 밤. 조용한 공간에 우렁차게 퍼지는 예찬의 재채기가 또 이어진 것이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시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뭐 각자 돌아와서 씻고 이러고 있었다.
“싫어.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 내는 것도 포기한 것인지, 시우의 손끝이 제법 아프게 에반의 손등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예찬이나 상준에게 들릴까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무슨 소리를 듣겠어. 이미 다들 알고 있는데. 예찬이는 같이 자는 것도 봤고, 키스하는 것도 봤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저 좋자고 이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시우가 화내는 것이 두려운 에반은 슬쩍 몸의 힘을 뺐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품에서 시우가 빠져나가자 이제는 시우에게만 영향이 갈 정도로 연하게 페로몬을 풀었다.
“저 그만 숙소 가서 잘게요. 졸려서 안 되겠어요.”
시우와 에반만의 작은 소동이 끝나고 다들 영화에 집중하는 것 같더니만 이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예찬이 텐트를 떠났다.
“자냐?”
다시금 영화에 집중하는 것도 잠시 상준의 목소리가 영화음악 사이에 스며들었다.
“네.”
에반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진 시우를 편히 눕히고 그에게 담요를 덮어 주며 대답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상준의 시선은 스크린에 닿아 있었고, 그는 오징어 다리를 하나 씹으며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상준과 에반이 의도해서 만든 것이었다.
“형이 해 줄 게 있어서요.”
“너희 문제없잖아.”
에반은 새 맥주캔을 땄다. 상준과 에반의 시선은 둘 다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에반은 맥주를 마셨고, 상준은 여전히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고 있었다.
“몇 달 안에 시우 발현할지도 몰라요.”
한참 말을 고르던 에반은 어렵사리 서두를 꺼냈다. 페이든과의 대화에서, 한의사와의 대화에서도 낸 결론은 하나였다. 후발현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만약 언론도 무엇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시우가 히든이라는 것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시우가 히든이기에 언론이나 주위에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히든 오메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기에 모든 방면으로 생각하고 대안을 만들어야 했다.
바로 옆에 있는 예찬과 찬도 시우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확실하게 형질이 드러난다고 해도 에반 외에는 아무도 모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반대로 시우가 페로몬을 조금도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는 활동이고 뭐고 다 멈추고 칩거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언론도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될 테니까.
페이든은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공식 활동이 끝난 후 시우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그와 함께 영국으로 가서 검사를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조금 전 대화에서 시우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정밀 검사를 받는 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길게는 몇 달이라고 했지만, 언제 어떻게 시우에게 후발현 기미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직접 진맥한 한의사는 시우의 맥이 굉장히 불안정하다고 했다.
당장 끓어 넘칠 것 같으면서도 심각할 정도로 고요한 상태.
에반의 등장과 동시에 고요한 연못에 물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파동이 일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지금 시우가 먹는 한약은 오히려 그의 그런 기질을 누르는 것이었다. 허해진 몸을 보강하면서 후발현을 돕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는 것에 가까웠다.
‘양약에서는 억제제라고 한다지? 어쨌거나 서양이든 동양이든 과거부터 이런 자들이 있었으니 각자의 방법으로 다스린 게지.’
‘정확히 오메가가 아닐지도 모르신다면서요.’
‘어찌 사람의 인체를 다 똑같이 정의해. 기질이 다르고 먹는 것이 다르고, 숨 쉬는 공기며 자는 시간도 생활하는 것도 다 다른데. 저 아이가 남들과 좀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쓰나. 저 아이 혼자였다면 문제여도 자네가 옆에 있으니 잡아 줄 수 있지 않겠나? 그러니 걱정은 하지 말게. 그래도 자연을 거스르는 법은 좋지 않으니 약을 너무 오래 쓰지는 말고.’
한의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던 에반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혹시나 후발현이 일어난다면, 제가 도움을 청할 사람이 형이잖아요. 알파인 예찬이나 찬이 형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그렇긴 하네. 그런데 내가 뭘 도와줘. 너 없을 때 히트라도 오면 너한테 데려다주면 돼?”
참으로 단순하게 결정을 내리고 묻는 말에 계속 그에게 할 말을 고르느라 심각해졌던 에반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건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거고요. 일단 시우가 그럴 수 있다는 걸 미리 말하는 거예요.”
“그 한약도 그런 이유에서 먹이는 거고?”
아침마다 시우와 에반 사이에 일어나는 실랑이를 다들 모르지 않았다. 한두 번 정도 깜박 잊을 수도 있고,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되는 것 아닌가? 한데 에반은 시우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집요하게 약을 챙겨 먹였다.
시우는 태어나서 이렇게 맛없는 건 처음이라며 이렇게 괴상한 맛일 줄 알았으면 한약 따위 먹는다는 말은 안 했을 거라고 난리 쳤다. 하지만 결국은 두 눈 질끈 감고 한약을 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럼 시우는 알아? 자기 그런 거? 그리고…… 시우 너 있어야만 자는 것도 그런 거랑 관련 있어? 아닌데. 그런 건 나도 들어 본 적 없는데.”
지금껏 스크린을 잘 보고 있던 상준의 말이 빨라지고 어느새 그는 에반을 보고 있었다. 사귀는 걸 눈치챘을 때도 뭐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했다. 방금 후발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역시나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베타라고 하기엔 시우는 너무 예뻤다. 선도 곱고 뭐랄까 분위기도. 그래서 그를 오메가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니 후발현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역시…… 그럼 그렇지, 라는 것이었다.
“시우도 후발현 부분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요. 잠은…… 아마도 각인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 중이에요.”
“……그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냐. 아직 발현 안 했다며, 그런데 뭔 각인 타령이야. 내가 아무리 그쪽은 잘 모른다고 하지만, 각인은 알파랑 오메가랑만 되는 거 아녀? 뜬금없이 베타가 뭔 각인이야?”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상준의 말에 에반은 그저 씩 웃었다. 솔직히 자신도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후발현자가 주위에 없어서 어디 정보를 구할 곳이 없어 저도 잘 몰라요. 뮤직 어워드 끝나고 형은 바로 한국 들어갈 거예요? 아직 이야기가 확실하게 끝난 건 아닌데, 저 시우 데리고 영국 갈까 하거든요. 검사도 받긴 해야 할 것 같고.”
“영국에 뭐시기 너네 집안에서 하는 그 병원 가려고?”
“한국에서 검사받았다가 언론부터 해서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요. 기든 아니든 조심하는 게 좋잖아요.”
“그렇긴 하지. 난 아직 생각 중인데 다른 멤버들은 어쩐대?”
상준과의 대화는 이래서 좋았다. 심각한 내용도 그와 이야기를 할 때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상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 그대로 받아들었고, 억측이나 제 생각을 굳이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가도 굳이 다시 이야기를 되돌리며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예찬이랑 찬이 형은 일본 여행 하고 싶대서 그쪽으로 준비 끝나 가는 것 같던데요.”
“그럼 홍콩에서 다 흩어지는 거야?”
“아마도요? 공식 활동은 거기서 끝나는 거고. 다음 연말 시상식이 일주일 뒤니까 연말 시상식 전에만 한국에 모여 있으면 되죠.”
에반은 다 마신 맥주캔을 툭 던졌고, 한쪽에 있는 쓰레기통 안으로 깔끔하게 들어갔다.
“아! 뭘 봤는지 모르겠네. 진짜 영화는 혼자 조용히 봐야 해.”
도중에 멤버들이 들락거리고 중간중간 대화를 나누고 이러고저러고 하다 보니 벌써 스크린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상준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찬이 형이나 예찬이한테는 말 안 해?”
제가 먹은 것들을 주섬주섬 치우며 상준은 잠든 시우의 얼굴을 보고 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좋을 때다, 연애하면 다 그렇지. 어차피 둘이 선택한 길이었다.
가시밭길이 제 눈에도 보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지켜보고 힘들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발현 이후에 말하려고요.”
열심히 숨기려고 노력하는 시우와 다르게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는 에반은 제가 있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시우의 얼굴을 어루만지다 말랑한 볼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와나…… 넌 진짜. 나 있다고! 하고 싶으면 나 나가고 하라고.”
“다 아는데 내가 왜 신경 써요? 부러우면 형도 연애하든가.”
“아, 김시우. 진짜 쟨 너 그런 거 모르지? 배 속에 천 년 묵은 능구렁이가 들어앉아 있어도 너보다 심하진 않을 거다.”
“알 것 같아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윙크하는 에반을 본 상준은 진저리 치며 텐트를 빠져나갔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알파의 소유욕이 어마어마하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베타인 자신이 알 리가 없다.
거기다 주위에 알파나 오메가가 있긴 해도 연애 중인 사람도 없고, 연애를 한다 치더라도 이렇게 가까이서 볼 만한 커플도 지금껏 없었다.
독하다, 독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숙소로 들어가는 상준의 머릿속에서는 꽤 많은 영감이 떠올랐다. 분명 들어가서 자려고 했는데, 지금 떠오른 것들을 메모라도 해 둬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