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11화 (111/187)

111화

“영화, 먼저 보고 있었네요.”

상준은 텐트가 열리는 소리에 이어 찬 바람이 스며들자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에반과 시우를 찾아오랬더니 예찬이까지 함흥차사가 된 마당에 할 일도 없어 그냥 먼저 영화를 튼 것이다.

“찬이 형은 피곤하다며 먼저 자러 갔어. 다 안 오는데 나 혼자 뭐 하냐. 그냥 보고 있었지. 처음부터 볼래? 시작한 지 한 20분쯤 된 거 같은데.”

“괜찮아요. 영화 내용이 다 거기서 거기죠. 예찬이는요?”

에반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텐트 안을 둘러보았다.

“아까 얼굴 빼꼼 내밀더니 너네 찾았다는 말만 하고 가던데? 맥주 마실래?”

방송에 나가는 곳이기에 꽤 신경을 쓴 텐트 안은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득했다. 생각보다 훈훈했기에 이곳에서 자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맥주에 땅콩에 오징어까지 준비 장난 아니네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에반은 구석에 있는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많은 주전부리 중에서 맥주캔 하나를 집었다.

“오늘 주제가 대놓고 쉬라는 거니까. 거기다 우린 이렇게 휴식할 필요가 있어. 다들 방전되기 일보 직전이라고.”

“형이 만족하다니까 기분이 좋긴 하네요.”

“넌 아닌 것처럼 말한다?”

상준의 말에 에반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과연 지금 제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웃음이 나는 한편으로는 씁쓸한 감정도 있었기에 방금 집어 든 맥주캔을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2주 정도만 더 버티면 2집 활동 끝나니까 그 이후에나 아주 즐거울 것 같습니다.”

공식적으로 초청받은 뮤직 어워드가 마지막 스케줄이었다. 그 뒤로도 소소하게 연말 시상식이나 그런 것들에 참석하긴 해야 했지만, 지금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정신없이 살지는 않아도 됐다.

2주가 짧냐며, 2주 동안 또 하루 한두 시간밖에 못 자는데, 좋긴 뭐가 좋냐고 구시렁거리며 상준 역시 들고 있는 맥주를 마셨다.

“아~ 춥다. 무슨 영화예요?”

“머리카락 얼 거 같아요.”

“너넨 왜 또 같이 와. 같이 씻었냐?”

시우와 예찬이 같이 텐트로 들어오며 안에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핑크색 후드 티셔츠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시우의 발그레한 볼과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예찬의 모습을 보며 상준은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미쳤어요?”

그냥 씩 웃는 시우와 다르게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치는 예찬의 모습에 상준은 소리를 내 웃었지만, 에반은 그저 한쪽 눈썹을 들썩이는 것이 전부였다.

“시우는 맥주? 예찬이는 두 달만 참아라. 내년 되면 형이 술 많이 사 줄게.”

“와! 진짜 행복하다. 눈물 나게 고맙네요. 찬이 형은 12월 31일에서 1일 넘어가는 그 순간 술 사 준다던데.”

“우리 그때 새해 전야제 참석하고 있을걸?”

“시우 형, 진짜 잔인한 사람이야!! 아까도 내가 말이야…….”

시우와 상준의 대화에 끼어들며 주위를 둘러본 시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양쪽으로 놓여 있는 2인용 간이침대. 그 위에 올려진 2인용 침낭. 그리고 한쪽은 상준이, 다른 한쪽은 에반이 차지하고 있었다.

에반이 있는 곳으로 가자니 상준과 예찬의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상준의 옆으로 가자니 에반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으어어, 씻고 나왔더니 더 추운 거 같아. 상준 형, 이거 얼마나 봤어요? 재밌어요?”

시우의 뒤에 서 있던 예찬이 그를 슬쩍 밀고 앞으로 가더니 상준을 등 뒤에서 껴안고는 제대로 닦지 않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묻었다.

“야! 이 미친놈아. 머리는 제대로 닦고 와야 할 거 아니야?”

졸지에 예찬의 품에 갇혀서 축축한 머리카락에 상의가 젖은 상준이 그를 떨쳐 내려 파닥거렸지만, 팀 내에서 가장 힘이 센 예찬을 이길 수는 없었다.

텐트 입구에 서서 두리번거리던 시우의 몸이 슬쩍 에반 쪽으로 향했다.

“약을 먹여도 손이 왜 이렇게 차?”

아직도 눈치를 보며 뻘쭘하게 서 있는 시우의 손을 잡아끈 것은 에반이었다. 제법 큰 영화 소리와 놓아라, 싫다로 여전히 실랑이 중인 상준과 예찬의 목소리가 둘의 속삭임을 가려 주었다.

“나도 맥주.”

에반의 옆에 앉은 시우의 시선이 그가 들고 있는 캔맥주에 닿았다. 양치까지 다 하고 왔는데, 맥주의 맛이 떠오르는 순간 시우의 붉은 혀가 살짝 나와 제 아랫입술을 적시고 곧 사라졌다.

“안 돼.”

“……그래서 너만 마시겠다고?”

“그럼 나도 안 마실게.”

간이침대인지라 에반의 무게 때문에 절로 시우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됐어. 실컷 드세요. 내 것까지 다 마셔 주세요.”

시우는 두 다리를 세워 모으고는 두 팔로 감쌌다. 그 상태로 몸을 둥글게 말아 무릎에 턱을 괴고 스크린을 응시했다. 처음 나왔을 때 정말 좋아했던 액션 영화였다. 계속 보다 보니까 이젠 지겨워진 그런 영화가 한두 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랬다. 처음엔 신선했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든 환경이 똑같이 돌아갔기에 영화도, 패션도, 반복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예찬과 상준의 투덕거림도 끝났는지 텐트 안은 영화에서 나오는 소리와 상준과 에반이 맥주를 마시고 예찬이 주전부리를 먹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뭐 먹을래?”

에반의 말에 시우는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텐트 안은 제법 훈훈했고,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기에 등을 제외하고는 추운 곳이 없었다. 단지 휑하니 노출된 등이 좀 시렸다.

자신과 상준이 오늘 자기로 한 곳은 숙소 2층에 있는 침실이었다. 싱글베드가 두 개 있었기에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이곳에서 영화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던지라 씻고 편안한 트레이닝복 바지에 톡톡한 소재의 후드 티만 입고 있었다.

눈은 영화를 보고 있었고, 귀는 영화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감각은 바로 옆에 있는 에반에게로 쏠렸다. 역시나 다른 멤버들과 같이 있을 때는 그의 페로몬을 맡는 것이 어려웠다.

자세가 불편한 것인지 옆에 있던 에반이 움직이자 둥글게 말고 있던 시우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에반의 품에 쏙 들어갔다. 방금까지 제 옆에 나란히 있던 그가 몸을 조금 뒤로 물리더니 긴 다리를 쭉 펴고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받치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덕분에 그의 몸이 뒤에서 오는 찬기를 조금 막아 주었다.

어색함에 괜히 그에게로 기운 몸을 바로 하려고 시우는 다리를 감싼 팔을 풀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이번엔 시우의 허벅지가 에반의 허벅지 위에 겹쳐졌다.

“신경 쓰여?”

귓가에서 느껴지는 숨결과 함께 울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 시우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지금 제 귓불에 닿은 에반의 입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갑자기 자신의 허리를 감싸 당겨 안을 줄이야. 얼른 두 팔로 에반의 상체를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시우는 급히 옆을 바라보았다.

상준과 예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스크린에서는 심각한 차량 추격전이 요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공개 연애 하는 게 어때?”

귀를 간지럽히는 그 목소리에 절로 시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에반의 몸을 두 손으로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자 시우의 손이 이번엔 에반의 손을 노렸다. 길고 곧은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는 것에 집중했다.

에반은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시우를 보고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조금 전 밖에서 시우가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막연하게 제 몸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늦가을과 초겨울 그 어디쯤의 늦은 밤 야외는 그리 오래 있을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촬영 중 쉬는 시간에 가까웠다. 깊은 이야기와 함께 깊은 감정을 공유하기엔 최악의 상황이었다. 시우가 숨을 헐떡이고 버거워하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그 짜릿하고 달콤하며 피를 솟구치게 만드는 키스를 쉽게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혹시나 내가 발현하고…… 내가 싫어지면 그땐 말해 줘.’

숨을 고르던 시우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아직도 그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단 말인가? 그 순간 익숙한 페로몬을 맡은 에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검은 인영이 누군지 알아채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아주 옅게 묻어 있는 건 예찬의 페로몬이었다.

‘절대 그런 일 없어. 네가 날 좋아하지 않을 순 있겠지만. 난 그리 못 해.’

‘넌 오메가를 싫어하잖아.’

겨우 달래 놓은 것 같은데, 말간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우의 눈가엔 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말을 해 놓고 뭐가 그렇게 슬픈지 아랫입술을 꼭 말아 물고 있었다.

지금 시우는 후발현이라거나 제게 일어나는 일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페로몬이 에반에게 모든 지름길을 알려 주고 있었다.

‘누가 그래. 내가 오메가를 싫어한다고?’

한 번도 에반은 오메가를 싫어한다거나 그런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형질과 관련된 질문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이슈를 만들려고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많았기에 항상 미소로 얼버무렸다.

‘오메가가 근처에 있기만 해도 자리를 옮기잖아. 다들 쉬쉬하지만 그리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후발현해서 나 싫어지면…….’

그 말을 하는 순간 기어이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시우의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생명체가 이렇게 사랑스러워? 이제 확실해졌다. 또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미친 듯이 돌아가도 절대 놓을 수 없다.

그냥 미친놈 취급 받고 이대로 시우를 데리고 촬영장을 이탈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그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 때문에 지금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온몸으로 설명해 주고 싶었다.

‘절대 내가 죽어도 그럴 일은 없어. 말했잖아. 네가 내 페어라고.’

그 순간 에반이 할 수 있는 건 시우를 꽉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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