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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110화 (110/187)

110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옷을 입고 나오면 뭘 해. 제대로 입지를 않는데……. 이러면 바람 다 들어가지.”

방금까지 예찬과 이야기를 나누던 에반은 어느새 시우의 앞에 있었다. 패딩을 대충 걸치고 나온 시우에게 잔소리하며 직접 지퍼를 올려 주었다.

“어묵탕…….”

시우의 머릿속엔 몇 개의 단어가 맴돌았다. 양파, 청양고추, 어묵탕. 모두 먹는 것으로 이어진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다.

“뭐? 어묵탕? 어묵탕 먹고 싶어? 그럼 내가 다음에 끓여 줄게.”

지퍼를 올리고 패딩에 붙어 있는 후드까지 씌운 에반이 장난스럽게 폭신한 모자 위를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빨리 와. 역시 믿고 먹는 찬이 김치찌개. 늦으면 다 먹고 없다.”

상준의 재촉에 시우는 어느새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 앞에 자리를 잡았다.

괜찮다가도 이렇게 한 번씩 감정이 밀려드는 것이 버거운 시우는 얼른 숟가락을 들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김치찌개부터 먹었다. 촬영 중이다. 넋을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음……. 진짜 맛있네. 찬이 형 사랑해요!”

일부러 머리 위로 하트까지 그리며 시우는 호들갑을 떨었다.

“고기, 고기도 맛있어요.”

뜨거운지 허공을 향해 입김을 내보내며 예찬이 시우의 말을 이었다.

“자, 취침 멤버 정해졌습니다.”

한창 식사를 시작하려는 타이밍에 들리는 피디의 말에 다들 그를 쳐다보았다. 뭘 한 게 없는데, 그냥 준비된 밥을 먹었을 뿐이었다.

“김치찌개를 먼저 드신 상준, 시우, 예찬은 숙소. 고기를 먼저 먹은 에반, 찬은 텐트에서 자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결정한다고? 뭐 어디서 자든 딱히 상관없는 멤버들은 피디에게 집중한 것도 잠시 다시 식사하기 시작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단 한 명 에반을 제외하고…….

식사 후 뒷정리까지 끝나고 개인 시간이 주어지자, 시우는 말없이 숙소와 텐트에서 떨어진 벤치로 향했다. 별을 보라는 의도인지 벤치에서 고개를 들었을 땐 맑은 밤하늘이 눈에 담겼다. 구름이 간간이 떠 있긴 했지만, 별과 달을 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초승달에 가까운 달 덕분에 별들이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처음엔 편하게 앉았지만, 밤이 깊어 갈수록 기온이 떨어져 시우는 두 다리를 벤치로 끌어 올려 두 팔로 감쌌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인가? 시우는 지금도 과거의 어느 지점을 맴돌고 있었다.

시우의 입에서 자장가 허밍이 흘러나올 때면, 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새어 나왔다.

뭘 하는지 왁자지껄 떠들고 웃는 멤버들의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한없이 우울했던 그때와 다르게 자장가를 부르는 시우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깔려 있었다.

“혼자 있는 걸 왜 이렇게 좋아해. 한참 찾았네.”

익숙한 목소리에 시우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굳이 돌아보거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어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이 내밀어졌다.

“조용하니 좋잖아.”

마침 손 시렸는데 잘됐다는 말까지 이으며 시우는 소매 안에 넣고 있던 손을 쏙 내밀어 머그잔을 감싸 쥐었다.

“오. 한국에서 별 이렇게 많은 거 처음 보네.”

“그치? 나도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별 많이 볼 수 있는지 몰랐어. 음, 이거 맛있다. 뭐야?”

달큼한 향이 나는 따스한 음료를 마신 시우는 그제야 밤하늘이 아닌 옆에 앉은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닌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뱅쇼. 겨울에 먹으면 좋아. 감기 예방 차원에서도 많이 마시고.”

“또 영국에서 온 거야? 제발 보내 달라는 말 좀 그만해. 너무 감사해서 다음엔 내가 뭐라도 보내 드려야 할 것 같잖아.”

“약 보내면서 같이 보내 주셨더라고.”

나른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끊겼다. 시우가 뜨거운 뱅쇼를 후후 불다가 호로록 마시는 소리와 에반의 허밍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식사까지가 오늘 공식 촬영이었다. 그랬기에 둘 다 마이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스태프들과 다른 멤버들도 둘을 찾지 않았다.

“이따가 상준 형이 텐트에서 영화 보자던데.”

긴 침묵을 깬 건 시우였다.

“그래, 같이 보자.”

나란히 앉아 있던 에반의 팔이 시우의 어깨를 감쌌다. 몸이 조금 에반에게로 기울었지만 시우는 가만히 있었다. 솔직히 그에게서 전해지는 온기와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그의 향이 좋았다. 춥잖아. 추워서 그런 거야. 하지만 시우는 가장 평범한 상황을 끌어들였다.

“에바나.”

이렇게 조용히 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언제일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평소보다 더 느릿하게 시우의 입에서 에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혹시…… 내가 오메가이면 말이야.”

수없이 생각했던 것 중의 하나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검색했던 것 중 하나.

페어.

정확한 설명은 골든 알파와 히든 오메가의 각인을 부르는 호칭이라고 했다.

하지만 골든 알파는 세계에 몇 없는 데다 그보다 히든 오메가가 더 희귀했기에 페어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각인을 이룬 관계에서 쓰는 단어로 변질되어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 그들이 각인 상대를 부르는 명칭 중 하나.

대부분 조금 더 극적으로 자신들을 엮을 수 있는 단어로 쓰였다.

편안하게 이완하고 있던 에반의 몸이 흠칫 굳는 것이 느껴졌지만, 시우는 짧게 숨을 끊어 쉬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괜찮을까?”

모든 생각의 끝은 그랬다. 제가 오메가여도 될까? 과거에도 지금도 에반은 오메가를 좋아하지 않는 알파로 불렸다. 방송 출연 중 오메가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자리를 옮기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잡혔다.

오메가를 싫어하는 알파. 그리고 시우 자신은 베타였다. 하지만 자신은 에반의 페로몬을 느꼈다. 가끔 그의 감정도 읽을 수 있다.

페어에 이어 많이 검색했던 것 중 하나가 후발현이었다.

일반적으로 태어났을 때 형질이 결정되지만, 간혹 사춘기 전후에 후발현이 나타나기도 했다. 후발현자들은 심심치 않게 나타났기에 그렇게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스무 살. 후발현을 하기엔 늦된 나이었다. 이런 늦은 나이에 발현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희귀한 케이스였다.

후발현까지도 어떻게 이해해 보려 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생체반응이니까, 원한다고 후발현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원치 않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제게 후발현이 일어난다면, 그로 인한 문제들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뭘 걱정하는 거야?”

에반의 질문에 시우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제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무엇일까?

후발현 오메가로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제가 후발현을 하게 된다면 오션이라는 팀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알파와 오메가 혼성 그룹이라. 지금껏 그 어디에도 없던 조합이었다. 에반, 찬, 예찬과 지금처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아침 그들이 약을 먹는 것처럼 자신도 약을 복용한다고 해도 서로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언론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아니,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지금 시우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에반과의 관계였다. 오메가를 싫어하는 에반이 지금처럼 자신을 봐 줄까?

“언론, 그룹의 존폐, 이슈, 사람들 시선.”

시우는 가장 근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숨긴 채, 띄엄띄엄 단어들을 내뱉었다.

“상관없어. 그런 것들은 조금도 상관없어.”

에반의 손이 움직이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웅얼거리듯 말을 하는 시우의 시선이 점차 위로 향했다. 그의 손끝에 의지해 그가 원하는 대로 고개를 움직인 시우의 눈엔 에반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당황하거나 놀라움보다는 오히려 편안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미 넌 내 페어이고 내 사람이니까. 네가 오메가든 알파든 베타든 그런 형질은 전혀 중요치 않아. 네가 내 옆에 있고, 내가 네 옆에 있는 것이 중요한 거지. 그래, 멀지 않은 미래에 네게 후발현이 일어날지도 몰라.”

에반의 말투는 마치 겁먹은 시우를 달래는 것 같았다.

“아무런 걱정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다……. 그러니까 울지 마.”

에반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자 시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목소리가, 그의 말이 지금껏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고민을 불태워 버리는 것 같았다. 괜찮다. 그의 말대로 뭐든 괜찮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향긋한 박하 향이 시우에게 몰려들었다. 말랑한 입술이 맞닿는 것도, 서로의 숨결이 섞이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웠다.

“하아…….”

턱을 받치고 있던 에반의 손이 시우의 볼을 어루만졌다. 떨림이 스며든 시우의 긴 한숨의 끝을 에반이 삼켜 버렸다. 뱅쇼의 향이 가득한 시우의 입 안을 에반의 혀가 파고들었다. 치열을 건드리며 파고든 에반의 혀끝에 따스하고 말랑한 시우의 혀가 닿았다.

감당하기 버거운, 홀로 고이고이 간직한 묵직한 고민을 털어놓은 시우의 고백 끝에 흐른 눈물을 달래려던 부드러운 키스가 조금씩 변해 갔다.

아직 갈피를 찾지 못해 수줍은 시우를 능숙하게 리드하는 에반의 숨결이 깊어졌다.

포실포실 따스하던 페로몬이 점차 짙어졌다.

방금까지 추웠던 시우의 몸 안에서 따스한 불길이 일었다. 몸속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작은 열기는 너무나도 쉽게 시우의 몸을 점령했다. 시우가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뱅쇼가 담긴 머그잔이 툭 하고 아래로 떨어졌지만, 둘 중 누구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 맨날 나한테 시켜. 저번에도 나보고 시우 형 깨우라고 해서 깨웠다가 에반 형한테 맞은 거 생각하면…….”

다 같이 영화를 보자며 사라진 에반과 시우를 찾아오라는 명을 받은 예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래, 커플이 시간 나면 그렇고 그런 거지. 이 넓은 캠핑장에서 어떻게 찾냐, 이게 문제가 아니라…….

예찬의 시선이 조금 먼 곳에 닿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봐요, 형들아. 난 미자거든? 어디 미자 앞에서 말이야…….”

예찬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나무에 기대서서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방해했다가 또 얼마나 혼나려고. 그냥 여기서 좀 기다려야겠다. 누가 가까이 올 거 같으면 다른 곳으로 가시라고 하고.

“아, 씨. 또 죽었어.”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던 예찬의 입에서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아. 손 시려 죽겠어. 형들아, 알아서 끊고 와 주면 안 될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예찬의 절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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