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으, 오늘 생각보다 더 춥네.”
그건 시우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하는 말. 우리는 친하고 단지 추워서 어깨동무를 한다는 뜻을 담은 말이었다.
시우는 사선으로 고개를 들어 에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음껏 사랑해야지. 후회는 조금도 남기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한없이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김시우, 엉뚱한 생각 하지 마. 네가 시작한 거 아니고 내가 시작한 거야. 도망가기만 해 봐.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야.”
“내가 무슨 생각 하는데?”
시끌벅적한 소음이 둘의 속삭이는 소리를 완전히 덮었다.
“에반 루이스. 진짜 너무 멋있고 잘생겼네. 이런 생각 했잖아.”
진지한 대화로 이어질 것 같은 분위기는 한순간에 가볍게 변했다. 바로 분위기를 바꿔버리는 에반의 행동이 어이가 없어 시우는 피식 웃었다.
“왜 틀려?”
“어. 틀렸어.”
“뭐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야?”
에반이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었기에 시우는 그의 앞에 섰다.
“사랑해. 그게 내가 한 생각이야.”
에반의 후드 티셔츠를 당긴 시우는 가까워진 에반의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제대로 알아들은 듯 행동을 멈춘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툭툭 쳤다.
“모르면서 함부로 넘겨짚지 마시죠, 에반 루이스.”
여전히 멈춰 있는 그를 향해 빙긋 웃은 시우는 얼른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
“와, 김시우. 진짜 너 촬영 아니었으면 오늘…….”
동상처럼 얼어붙었던 에반이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투덜거리면서 운전석으로 향했다.
너만 아쉬운 거 아니야. 나도 아쉬워.
시우의 숨겨진 마음은 에반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 * *
캠핑장은 방금 그들이 들렀던 카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시우가 지도를 보는 것도 잠시, 에반은 딱히 그에게 묻지도 않고 능숙하게 캠핑장을 찾아 들어갔다.
“뭐야. 너 여기 길 알았어?”
“나 머리 좋아.”
지도 외우는 건 일도 아니라는 듯한 그 말투에 시우는 대답 대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 제가 자도록 내버려 뒀겠지. 처음 캠핑장으로 출발하기 전 에반이 꼼꼼히 지도를 보던 것이 떠올랐다.
“저쪽 팀 왔어요?”
차에서 내린 시우는 스태프를 향해 질문을 하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김시우!!!!!!!! 에반!!!!!!!!!!”
헤매고 또 헤매다 이제 막 도착해 캠핑장을 둘러보던 찬 역시 에반과 시우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얼른 그들을 불렀다.
“네! 커피 왔습니다. 뚱카롱도 왔어요.”
카페를 나서기 전 멤버과 스태프들을 위해 사 온 것들을 챙기며 시우는 그들에게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반적인 ‘Ocean Story’ 촬영이라면 팀을 나누거나 개인전을 바탕으로 각종 게임을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주제는 휴식이었다.
바쁜 스케줄 중 쉬어 가는 시간이라는 콘셉트였기에 그 어떤 경쟁도 게임도 해야 할 것도 없었다.
평소라면 장을 보는 것도 텐트를 치는 것도 멤버들의 몫이었겠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이 모델로 활동하는 스포츠 웨어와 같은 계열사의 캠핑용품으로 세팅되어 있는 공간에 나란히 선 오션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들떠 있었다.
지금부터 그들이 할 일이라고는 맛있는 것을 해 먹고, 각자 알아서 쉬고, 내일 정오쯤 이곳에서 떠난다는 기본적인 설명을 들은 탓이었다.
“안녕하세요, 오션입니다.”
촬영 준비를 끝마친 카메라에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중앙에 앉아 있는 피디의 손짓에 따라 다들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오늘은 저희가 캠핑장을 찾았는데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가운데서 진행을 맡은 찬은 피디를 향해 말을 했고, 그가 봉투를 건네자 앞으로 걸어가 봉투를 받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금 전 캠핑장 찾아오기 레이스에서는 저랑 예찬, 상준이가 있는 팀이 이겼는데요. 이긴 팀에겐 특별 보상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것부터 말해 주세요.”
손으로 봉투를 열면서 찬은 자연스럽게 진행해 나갔다.
“아무리 휴식이 주제라고 하지만 ‘Ocean Story’ 기본 룰이 있잖아요. 이번 화에도 벌칙이 빠질 수가 없겠죠. 특별 보상. 아주 큰 보상으로 먼저 도착하신 세 분은 벌칙 면제입니다.”
싱글거리는 피디의 말에 에반과 시우의 발걸음이 절로 앞으로 향했다.
에반조차도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알았다면 카페고 뭐고 그냥 바로 와서 어떻게든 벌칙을 면제받았을 것이다.
“와!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러니까 꼭 먼저 도착하는 것이 좋으실 거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그럼 아까 라이브 안 했죠!”
시우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 에반이 나서서 불만을 토로했다.
“덕분에 니모님들 즐거우셨잖아요. 일단 에반과 시우는 제자리로 오시고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간단하네요. 준비된 재료들을 사용해서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면 된답니다.”
봉투를 열고 안에 든 종이에 적힌 것을 확인한 찬은 그 종이를 다른 멤버들에게 넘겼다.
“어서 밥 먹고 쉽시다. 예찬이는 나랑 불 피울래?”
“난 뭐 있는지 좀 보고. 고기는 구우면 되니까 뜨끈한 탕거리 있나 볼까?”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 에반과 시우가 항의하는 사이 벌칙 면제를 받은 셋은 식사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런데 벌칙 뭔지 말 안 해 주셨잖아요. 그리고 오늘 게임 같은 것도 없다면서 저랑 에반이 중 한 명은 어떻게 뽑아요?”
“일단 식사부터 하세요. 하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뽑힐 겁니다.”
스리슬쩍 에둘러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피디의 말에 시우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몸을 돌렸다. 쉬려고 하는 촬영이니 그의 말이 맞았다. 얼른 밥 먹고 쉬어야지.
“시우야, 이따가 영화 볼래?”
불을 피워서 고기를 굽는 것이면 고구마랑 감자를 함께 구워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식재료 상자를 뒤적거리던 시우는 상준을 바라보았다.
“영화요? 별을 보는 게 아니고요?”
산 중턱에 있는 캠핑장이라서 도시에서보다 훨씬 많은 별을 볼 수 있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별 보는 거야 잠시지. 날도 추운데 밖에 어떻게 오래 있어? 여기 텐트 안에서 영화 볼 수 있대. 빔도 있고. 너 텐트 들어가 봤어?”
“아뇨.”
식재료 상자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찾은 시우는 쿠킹 포일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안에 진짜 넓고 좋아. 2인용 캠핑 침대 두 개에 영화에서나 봄 직하게 예쁘게 꾸며져 있더라. 진짜 어릴 때 내가 했던 캠핑이랑 차원이 달라.”
“우리 잠은 어떻게 잔대요?”
시우는 자신을 지나치며 찬이 건넨 쿠킹 포일을 받아 감자와 고구마를 꼼꼼히 쌌다.
“텐트에서 몇 명 자고, 저기 옆의 숙소에서 몇 명 잔다던데. 그것도 이따가 게임이든 뭐든 그런 걸로 정하겠지.”
식사 준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입은 짧지만, 요리를 잘하는 찬이 있었기에 시우가 바쁠 일도 없었다.
“해 떨어져서 추워. 옷 더 입고 나와.”
찬이 시킨 대로 숙소로 들어와 야채를 씻고,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넣은 시우는 에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많이 추워?”
“제법 쌀쌀해. 조끼 말고 패딩으로 입어.”
“알겠어. 그런데 찾는 거 있어?”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도 덩달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아니.”
찾는 것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쌈 채소의 물기를 탈탈 턴 시우는 접시에 옮겨 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혼자 작게 웃었다. 양파를 썰다가 눈물을 흘린 자신의 볼을 에반이 감쌌던 것도, 스파게티 면을 집어 먹는 그의 손등을 때린 것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었다.
“양파, 찬이 형이 썰었어? 내가 갖고 와서 썰 걸 그랬나?”
“찬이 형이 양파 썰다가 눈물 나서 예찬이가 우는 줄 알고 난리 쳤잖아. 분량은 확실하게 나왔을 거야.”
때마침 즉석밥이 다 데워졌는지 맑은 소리를 내며 전자레인지가 멈추자 에반이 그 앞으로 가 조심스럽게 뜨거운 즉석밥을 꺼냈다.
“아……! 양파 진짜 눈 매워.”
그때 그 양파,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 것보다 매웠어. 지금껏 양파 많이 썰어 봤지만, 그것보다 매운 건 없었던 것 같아. 시우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청양고추가 더 매울걸?”
쌈 채소가 담긴 접시를 들고 에반의 옆을 지나치던 시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에반은 트레이에 즉석밥을 차곡차곡 옮기고 있었다. 양파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은 시우지만, 청양고추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은 에반이었다.
“왜? 그것도 내가 들고 나가?”
시우는 자신이 들고 있던 접시를 에반이 들고 가는 순간에도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양파보다 청양고추가 맵다. 그건 기본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자신의 추억이자 지나간 과거였다.
“어서 가서 옷 입고 와. 고기도 다 구워 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시우 대신 에반이 말을 이었고, 그는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미치겠다.”
혼자 남겨진 시우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제 가방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착각이다. 그냥 우연일 것이고.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괜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무한 회귀.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처음엔 자신과 같은 시간의 틈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기억이 모두 완벽한 줄 알았고, 다시 만난 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기도 했다. 그리고 배운 것은 단 하나였다.
혼자라는 것. 추억도 기억도 모두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지금 에반과의 관계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지나간 시간까지 덧씌워 일을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방 한쪽에 있는, 제 이름이 적혀 있는 패딩을 챙겨 입는 시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밖에서 어서 나와서 밥을 먹으라는 상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묵 없는 게 아쉽네. 김치찌개도 좋지만 이런 날씨에는 뜨끈한 어묵탕 진짜 좋은데.”
“엥? 에반 형, 요리 못하잖아요. 무슨 어묵탕이야. 또 찬이 형한테 끓여 달라고 하게?”
“아니야. 나 어묵탕은 끓일 줄 알아. 배웠어.”
“이 형은 진짜 영국에서 살다 온 거 맞아? 뭘 배워도 어묵탕을 배웠대.”
“그러게나 말이다. 그래도 뭐가 들어가는지는 정확히 알아. 육수 비법은 모르지만.”
나란히 불판 앞에 서서 구워진 고기를 접시에 담으며 나누는 에반과 예찬의 평범한 대화 앞에서 시우의 발걸음이 또 한 번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