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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104화 (104/187)

104화

“아…… 나 잠들었나 봐.”

시우는 무거운 눈을 뜨면서 중얼거렸다. 에반과 있을 때는 필름이 끊기듯 잠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쉽사리 물러가지 않는 잠을 떨쳐 내려 머리를 잘게 흔들고 얼굴을 쓸어내리려던 시우는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에반의 손을 보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숙소 다 왔어. 업어 줄까?”

다정한 에반의 목소리에 시우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한 손으로만 얼굴을 쓸며 작게 웃었다. 온몸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지만 깊게 잠을 잔 덕분에 조금 전보다는 컨디션이 괜찮았다.

“응.”

처음엔 그가 업어 준다는 것을 거절하려 했다. 방금까지도 닿아 있던 에반의 손이 제 손을 놓는 순간 느낀 것은 강한 아쉬움이었다. 그랬기에 내키는 대로 말했다. 깊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건 그와의 관계에 방해만 될 뿐이다.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진짜 업어 줘?”

에반의 목소리에 놀람이 스며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시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계속 웃음이 난다. 잠이 부족하다 보니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한 것 같다. 어쩌면 이건 꿈일지도 모르고.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겠지만, 살짝 둘러본 결과 이곳은 숙소의 지하 주차장이다.

여기 있는 사람은 멤버들과 매니저뿐일 것이다. 모든 이의 눈이 향하는 방송국이 아니었다. 카메라도 없고 팬들도 없고 스태프들도 없다.

다른 멤버들도 차에서 내리는 중인지 소음들이 멀리서 들렸다.

이어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시우는 안전벨트만 풀고 그냥 눈을 감은 채, 얌전히 있었다.

“업혀.”

다시 평온함을 찾은 에반의 목소리에 잠깐 눈을 뜬 시우는 망설임 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온몸이 일정하게 흔들거린다. 멤버들 목소리와 매니저 목소리, 그리고 에반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등에 귀를 대고 있었기에 에반의 목소리는 웅웅거리는 것처럼 들렸고, 그 울림이 좋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듣고 싶었지만, 차에서 내리느라 잠시 깼던 시우는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시우. 어디 아파?”

“아뇨. 안 깨어나서요. 지칠 만도 하잖아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상준이 저희를 보자마자 하는 말에 에반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피곤해 죽겠다. 진짜.”

제 목을 주무르며 상준이 긴 한숨을 내뱉자, 그 뒤에 서 있던 예찬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예찬이 커다란 손에 힘을 실어 상준의 어깨와 목을 주무르자, 그 손에 몸을 맡긴 상준의 얼굴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다 뭉쳤네, 우리 형.”

“어. 거기 왼쪽 어깨 좀 더 세게 해 봐.”

“내일은 저녁 스케줄이니까 다들 편하게 좀 쉬고. 스케줄 시작 전에 단체로 병원이라도 갈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언제 따라온 것인지 명훈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병원요?”

“너네 알파 셋은 검진받을 때 됐고, 상준이랑 시우는 영양제 잔뜩 넣어서 링거라도 좀 맞든지. 너희들도 알겠지만, 1월까지는 강행군이잖냐.”

찬의 말에 명훈이 간략하게 설명하자,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 약 영국에서 오기로 했어요. 내일 상준 형, 시우랑 한의원이나 갈게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에반이 곧장 올라타면서 꺼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의 등에 업혀 있는 시우는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엥? 한의원? 네가 그런 데도 알아? 진짜 영국에서 산 거 맞아?”

“한국에서는 몸 허해지면 한약 먹는다면서요. 한번 맞고 끝나는 링거보다 한약은 두고두고 먹으니 더 나을 거라던데.”

찬의 말에 에반은 페이든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어머니와 했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연락을 드리지 않은 것 같아 예의상 전화를 걸었다. 이제 곧 추워지는 겨울이니 뱅쇼부터 해서 시우가 잘 먹을 만한 것들도 좀 보내 달라고 할 참이었다.

어머니와 대화 중 힘들지 않냐는 말에 무심코 자신보다 시우가 더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그럼 보약이라도 지어 먹여. 그러잖아도 실제로 보니까 약해 보이더라. 상준이랑 시우는 베타라며, 더 잘 챙겨 줘야지.’

‘보약이 뭔데요?’

어쨌거나 그냥 파는 것보다 한의사를 만나 맥을 짚고 어쩌고저쩌고하며 에반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설명하던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그냥 한의원에 가라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에 복용하는 약재가 다를 것이라고.

“…… 공…… 공진, 공진단? 뭐라더라? 하여튼 그것도 좋은데 직접 맥 짚어 몸에 맞는 걸로……”

에반은 어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공진단…… 좋지. 그래서 나도 보약 먹으라고?”

상준의 말에 에반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에? 우리는? 나도 나도 먹을래요. 나도 요즘 몸이 허하고 막 힘들어.”

갑자기 힘든 척하는 예찬의 행동에 옆에 서 있던 찬이 그의 등을 제법 세게 쳤다.

아, 이 눈새. 알파가 무슨 보약이야, 보약이.

거기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솔직히 에반이 지금 너 챙기게 생겼냐? 시우가 힘드니까 걔 먹이려는 거고. 거기다 상준 형도 베타니까 같이 챙기는 거지. 아, 진짜. 이놈 어쩌면 좋냐.

“왜! 왜 때려요.”

“인마. 넌 내가 홍삼 사 줄게, 홍삼. 요즘 키즈 홍삼도 잘 나온다더라. 달달한 것이 어른 것보다 먹기 좋대.”

제법 큰 소리가 계속 이어졌지만 잠든 시우는 깨지 않았다.

* * *

아침저녁으로 싸늘한 기운이 가득한 가을.

시우는 본능적으로 따스함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푹신하고 말랑말랑한 제 당근이 언제 이렇게 바뀌었을까? 좀 딱딱하고 단단하긴 하지만 전해지는 온기는 좋았다. 크기가 더 커진 것 같기도 하네.

눈을 감은 채, 서서히 사라지는 잠기운을 느끼며 미소를 짓던 시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가셨다. 편안하게 푹 잔 다음 날 아침의 상쾌한 느낌과 별개로 눈을 뜨지 않아도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일.

천천히 눈을 뜬 시우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그래, 내 당근이 이럴 리가 없지. 단단한 어깨, 가슴 그 어디쯤을 베고 있는 시우의 몸은 일정한 속도로 미세하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리고 쿵덕거리고 뛰는 누군가의 심장 소리도 고스란히 들렸다.

그때와 조금 다른 것이라면 에반의 방이 아니라 제 방이라는 것과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 어스름한 빛이 방을 흐릿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고른 숨소리와 안정된 에반의 향을 통해 그가 잠들어 있음을 확인한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편안한 표정, 꼭 감긴 눈. 시우는 에반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랑비 같다. 격정적이고 뜨거운 감정의 소용돌이라기보다 소리 없이 다가와 조금씩 자신에게 녹아들었다. 피하기 급급하고 숨기려 노력하고, 어떻게든 외면했던 지난 시간과 달리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지금은 편안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사람들 모르게 마주치는 눈빛.

지나치면서 스치는 손. 촬영을 가장한 어깨동무 같은 것들.

‘루시퍼’ 안무에 녹아 있는 동작 때문에 자연스럽게 에반에게 안겼다.

그 모든 순간과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또 회귀하더라도 이런 것들이 있다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에반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이상하게 그의 옆에 있으면 편히 쉴 수 있었다.

에반에게 업힌 이후의 기억이 없는 시우는 문득 고개를 숙여 자신을 보았다. 제가 즐겨 입는 이 잠옷은 누가 입힌 거지? 얼굴을 더듬었지만 짙은 화장은 묻어나지 않았다.

“감상 다 했으면 키스를 해 줘야지. 잠든 사람 깨울 때는 키스라는 거, 안 배웠어?”

제 옷을 보며 생각에 빠졌던 시우는 나른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에반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일정하던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진 것이 느껴졌다.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 편했기에 시우는 여전히 그의 몸 위에 반쯤 엎드린 상태였다.

에반이 깰 것을 모른 것이 아니다. 눈뜨자마자 그의 품에서 벗어났어야 했는데, 과할 정도로 친밀하게 몸이 닿아 있는 상황이라 시우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어디 가. 키스해 주고 가.”

에반의 팔이 허리를 감싸는 바람에 도망갈 길이 막힌 시우는 차마 말도 못 하고 에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 아직 눈 안 떴어. 어서.”

장난 어린 그의 목소리에 시우의 얼굴과 귀가 붉어졌다.

누가 사람을 깨울 때 키스로 깨워. 발로 걷어차거나, 이불을 뺏거나, 큰 소리로 깨우지.

에반이 재촉하듯 시우를 두 팔로 끌어안은 채 몸을 흔들자, 시우는 더더욱 그의 어깨에 얼굴을 숨겼다. 그러다 에반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시우도 그를 따라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에반의 입술이 시우의 이마에 닿았다.

“하지 마.”

“뭘.”

“나…… 안 씻었어. 이 옷도 내가 입은 기억이 없어.”

“내가 갈아입혔어. 메이크업은 지워 줬는데, 머리까지는 손댈 방법이 없어서. 그런데 이봐요, 김시우 씨. 옆에 내가 있는데 잠이 오지? 어? 김시우, 진지하게 물어보자. 내가 옆에 있는데 잠이 와? 오냐고. 옷 갈아입히고 얼굴 닦아 줘도 일어나지도 않고 말이야.”

“하하. 잠깐. 하지 마……. 아하하하, 간지러……. 어제는…… 하하…… 너무 피곤했어.”

시우를 꽉 끌어안고 있던 에반의 손이 장난스럽게 시우의 몸을 쓸었고, 그 손길이 간지러워 시우는 웃으면서 그의 손을 피하려 버둥거렸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미안하면 뽀뽀. 와, 나 너무 착하다. 키스를 뽀뽀로 내려 주고 말이야.”

에반의 손을 피한 시우는 몸을 둥글게 말면서 침대를 굴렀다.

“잠깐…… 잠깐만…….”

키스를 하든 뽀뽀를 하든 그 손 좀 멈춰 보라고. 도망가 봐야 침대 위.

어느새 시우는 제 위에 있는 에반을 마주해야 했다.

역시 그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늘 깔끔하게 정돈한 머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삐친 머리라든가 편안한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시우는 슬쩍 에반의 시선을 피하며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니가 할래? 내가 할까?”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에반의 투정에 시우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여전히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지만, 시우는 자연스럽게 에반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그를 제 쪽으로 살짝 당겼다.

“형! 일어나래요.”

갑자기 벌컥 열린 문과 함께 들린 예찬의 목소리에 공기마저 완벽히 얼어붙었다.

“좋은 시간 되십쇼.”

말도 안 되는 말과 함께 다시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미치겠다, 진짜.”

에반의 입술이 시우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훌쩍 일어난 에반이 문을 열고 나갔다.

“강예찬, 이 새끼. 당장 이리 안 와?”

“형! 일부러 절대, 일부러 그런 거……. 으악……. 찬이 형.”

밖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시우는 천천히 일어나 욕실로 향하며 이마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조금 있다가 예찬이에게 잘 해명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뭐라고 해명해야 할까.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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