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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103화 (103/187)

103화

시우와 에반은 우여곡절 끝에 ‘친구’라는 단어까지 성공해 시간 내에 세 개를 맞혔고, 추가 녹화 없이 촬영을 마무리했다.

새벽 3시.

촬영진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끝낸 시우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면서 춤을 추고 방방 뛰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으아~ 이제 집에 간다. 오늘은 침대에서 잘 수 있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웅얼거리는 예찬의 말에 시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래, 드디어 소파나 의자에 구겨져서 자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잘 수 있겠네. 뜨거운 물에 샤워 후, 보송보송한 잠옷을 입고 푹신한 침대에 파고드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당장이라도 베개에 머리를 댄다면 깊은 잠에 빠질 것 같다. 악몽도 꾸지 않고, 잠이 들지 않아서 힘겹게 뒤척이는 시간도 없이 평온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터벅거리며 앞만 보고 걷던 시우는 문이 열린 밴을 보자마자 곧장 그리 들어갔다.

편안한 의자에 앉는 것과 동시에 시트를 조절해 등받이를 젖히고는 눈을 감았다.

온몸이 나른하게 가라앉고 온갖 잡생각들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은 점차 텅 비어 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잠이 들 것이다.

시우의 숨결이 고르게 변하고 의식이 흐려지며 그대로 잠들 것 같던 그의 눈이 뜨였다.

“왜? 잠이 안 와?”

결국 잠들지 못한 시우는 한숨을 쉬며 뒤척이다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1집 때까지만 해도 멤버들은 한 대의 차로 이동했다. 하지만 2집 활동을 시작하며 지원 차량이 늘어났다. 빡빡한 스케줄에 이동 시간이라도 조금이나마 편안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새 에반과 시우는 늘 같은 차로 이동했다. 처음엔 이리저리 섞여서 탑승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 대는 찬과 예찬, 상준이. 다른 한 대는 에반과 시우가 고정적으로 타고 있었다.

뒤척이다 다시 눈을 감은 시우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살짝 미소만 지었다. 그의 손을 잡아 준다든가 자신을 보고 있을 에반을 마주 보며 시선을 맞추기엔 너무 지쳤다.

어설프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활동에 들어가는 바람에 둘이서 조용히 보낼 시간이 없었다. 언제든 다른 사람들이 있었기에 대화를 깊게 나누는 일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이동할 때 가끔 손을 잡는 것이 고작이다.

“약 필요해?”

제게 안정감을 주는 에반의 향을 맡으며 숨을 고르게 쉬고 있던 시우는 잠시 숨을 멈췄다. 약이 필요할까? 잠시 고민을 하던 시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먹지 않더라도 상비약으로 구비해 두면 괜찮을 것 같다.

숙소로 돌아가 제 침대에서도 쉽게 잠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시우는 약에는 손을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휴식으로 주어진 시간은 고작 일고여덟 시간 내외. 만약 약을 먹는다면 제시간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 뻔했다.

또 잠이 살포시 다가왔다. 이렇게 다가왔다가 달아날지도 모르지만, 시우는 온몸의 힘을 뺐다. 에반의 큰 손이 제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냥 나른하게 점차 무거워지는 눈을 깜박였다. 머리를 만지던 그의 손이 제 볼에 닿았다.

가물가물 떠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던 시우의 두 눈이 곱게 감겼다.

시우가 잠이 들고도 에반은 쉽사리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자신에게도 벅찬 스케줄의 연속이다. 베타들보다 체력적으로 뛰어나다는 알파들도 지치는 일정을 시우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따라왔다. 이제 상준과 시우는 시간만 나면 드러눕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체력을 비축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번 ‘루시퍼’의 반응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이 바닥에서 닳고 닳았고, 유행 키워드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에반도 매번 오션을 정상의 자리에 끌어올리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편차가 있긴 했지만 보통 3~4년 차가 되어야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추세라면, 그 시간을 더 앞당길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국내 활동이지만 11월 말부터는 해외를 수시로 들락거려야 한다. 시우가 원한다는 뮤직 어워드부터 각종 연말 시상식까지.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오션에 대한 투자자이자 기획자이며 멤버이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엄연히 대표가 있었고, 어쨌거나 지금 자신은 타인의 눈에 조금도 미덥지 않은 겨우 스무 살의 소년과 성년 사이 어디쯤 있는 사람이었다.

시우에게 불면증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심각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모두들 틈이 나면 짬짬이 잤다. 반면 시우는 잠들지 못했다. 대기실이든 어디든 분명 누워 있고 쉬고 있기에 그가 잠든 것으로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라도 깊은 수면을 하는 것과 가수면 상태로 쉬는 것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나마 제가 옆에 있을 때면 조금 더 깊이 잠드는 것 같아서 늘 그 근처를 맴돌았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어떻게든 에반과 단둘이 있으려 하지 않는 시우였으니까.

그나마 이렇게 이동 시간에 자는 것이 시우로서는 가장 편안한 쉬는 시간인 것 같았다. 이렇게 머리를 만지거나 손을 잡으며 페로몬을 풀 때면 시우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것도 형질과 관련이 있을까?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에반의 머리를 스치는 것은 단 하나였다. 편안하게 제 페로몬을 풀고 있던 에반은 서서히 흩어 놓은 것들을 거둬들였다.

그와 동시에 깊게 잠들어 미동조차 없던 시우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조금씩 몸을 뒤척이는 모습에 에반은 다시 페로몬을 풀었다. 그리고 깨어날 것 같던 시우는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시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머리와 볼을 쓰다듬던 에반의 손이 이제는 편안하게 펼쳐져 있는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넌 안 자?”

“잠이 안 와서요.”

대환의 물음에 에반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피곤해 죽으려 하는고만. 알파는 다르긴 다른가 보네. 어떻게 시우는 잠들었고?”

운전 중인지라 백미러로 시선을 잠시 마주치며 건네는 말에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들기 힘들어해서 어떡하냐. 그래도 차로 이동할 때는 좀 자니까 망정이지. 명훈 형이 내일 시간 좀 있으니 단체로 병원 좀 다녀오자던데.”

“병원요?”

“너랑 예찬이랑 찬이. 약 받을 때 되지 않았어? 휴식기보다 활동할 때 주기가 더 짧아지잖아. 간 김에 상준이랑 시우는 영양제라도 좀 맞고. 말은 하긴 했는데 너희 다들 지쳐서 그냥 쉬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저 잠시 전화 좀 할게요.”

잊고 있었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잊는 게 많은 것인지.

1년에 몇 번씩 반복되는 히트 사이클과 러트 사이클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들이 오메가와 알파였다. 일반적으로 약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기에 아주 큰 불편함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약을 먹어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일반 알파가 아닌 골든 알파.

그리고 굳이 한국에 제 정보를 남기고 싶지 않은 에반은 곧바로 주치의에게 연락을 넣었다. 올여름 영국에 있을 때, 검진을 하고 약을 받아 들어왔다. 아직 여유분이 있긴 하지만 지금 제 옆에는 어떤 변수를 불러올지 모르는 히든 오메가 시우가 있다.

통화 대기음을 들으며 에반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풀어야 할 일이 많다.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우가 오메가인 것은 확실하게 짚어 주어야 했다.

시우의 페로몬은 나날이 짙어지고 있었다. 예찬과 찬이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봐서는 시우는 히든 오메가가 맞다. 하지만 알파가 많은 방송국. 불안한 마음에 에반은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시우에게 제 페로몬을 덧씌웠다.

그리고 그때마다 눈으로 욕을 하는 찬과 그만 좀 하라는 예찬의 말을 들어야 했다. 지금도 베타인 대환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진득한 제 욕심을 시우에게 잔뜩 퍼부었다.

“페이든, 에반이에요.”

상대가 전화를 받자 에반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제 약 좀 보내 주세요. 그리고 몇 가지 궁금한 것도 있어서요.”

촬영장과 숙소가 꽤 멀었기에 에반은 편하게 시트에 몸을 기댄 채, 페이든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환은 누구와 대화를 하는지 확인하는 듯했지만, 이내 영어가 흘러나오자 틀어 놓은 음악 소리를 조금 줄인 채, 운전에 집중했다.

간단한 안부의 말이 오갔다. 이곳은 새벽이지만 영국은 저녁 시간이었기에 둘의 대화가 길어졌다.

기본적인 안부에 이어 오션 활동을 축하하는 말이 이어졌고, 다음으로 약을 보내기 전 간단하게 확인한다며 에반의 건강과 관련된 대화가 오갔다.

“히든 오메가요.”

자신의 상태에 대해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의 건강을 봐 주는 주치의였기에 숨길 것도 없었다. 그래서 알고 싶은 내용을 정확히 전달했다.

“히든 오메가? 어디서 만나기라도 했어?”

작은 웃음소리가 들어가 있는 페이든의 말에 에반은 작게 혀를 찼다. 역시나 이런 반응이다. 학술지에서나 가끔 희귀하게 볼 수 있는 존재가 히든 오메가였으니까.

“네.”

“뭐?”

이번엔 웃음소리가 싹 가신 목소리로 빠르게 정말 히든 오메가냐, 어떻게 알았냐, 그 사람도 그걸 알고 있냐는 둥 온갖 질문을 페이든이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번엔 페이든의 질문을 듣는 에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요. 각인, 그러니까 정확히 페어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요.”

직접 알아보고 싶지만, 지금 제겐 시간이 없다. 그 많은 학술지를 다 뒤질 여력도 없고 차라리 이런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페이든은 알파, 오메가와 관련된 논문을 수없이 많이 발행한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었다.

“……신체적 각인은 알잖아.”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감정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으로 확인해 주시죠. 감정 동화도 있었고요.”

통화를 하면서도 시우의 손을 잡고 있던 에반은 엄지로 부드러운 시우의 손등을 살살 쓸었다. 깊게 잠든 시우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아기처럼 색색거리며 자는 것을 보니 또 심장이 요동친다.

“감정 동화가 진짜 가능했어? 언제? 얼마나?”

“지금도 느껴지죠. 적어도 악몽을 꾸지 않고 어떤 꿈도 꾸지 않고 정말 편안하게 잘 자고 있거든요.”

“……누군지 말해 줄 순 없나?”

“네. 아직 당사자는 모르고 있거든요.”

아……. 방금 한 말을 수정해야겠다. 지금 시우는 꿈을 꾸고 있었다. 어떤 꿈을 꾸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우의 얼굴에 살짝 드러났다 사라지는 미소를 본 에반의 상체가 시우에게로 굽혀졌다.

운전 중인 대환도 통화 중인 페이든도 모르는, 그리고 잠든 시우조차 모르는 도둑 키스는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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