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02화 (102/187)

102화

왁자지껄한 분위기.

늦은 시각이었지만 멤버들도 다른 출연진들도 활기찬 모습으로 프로그램 녹화를 시작했다.

이제 막 2집을 낸, 신인에 가까운 보이 그룹이었기에 손가락이 오그라들 것 같아도 구호를 외치고 애교를 떨고 과장된 행동을 이어 갔다.

촬영 중간 지치면 시우는 슬쩍 예찬의 뒤로 숨어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느라 제 코끝을 살짝씩 쥐었다.

“자, 이번 게임은 ‘고요 속의 외침’으로 상준&찬, 에반&시우, 찬&예찬 이렇게 세 팀이 총 여섯 문제를 맞히면 신곡 ‘루시퍼’ 무대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하는 게임 소개 후, 멤버가 다섯 명인 관계로 리더인 찬이 두 번 게임에 참여하는 룰까지 설명했다.

게임의 시작은 상준&찬이었다.

정말 맞히려는 의지가 있긴 한 건지 진지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게임에 임하는 상준과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설명하려는 찬의 행동에 세트장은 웃음으로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뭐? 안 들려. 다시 말해 봐.”만 반복한 상준 때문에 그들이 맞힌 문제는 고작 두 개뿐이었다.

에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의자에 앉아 헤드셋을 쓴 시우는 쩌렁쩌렁 울리는 큰 음악 소리에 깜짝 놀라 제작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안 들릴 줄이야.

“우와. 진짜 음악 소리 너무 커요.”

주위 상황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야 했다. 옆에서 멤버들이 떠들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안 들리네요.”

건너편에 앉은 에반 역시 뭐라고 말하는지 벙긋거리는 것만 보였다. 시우가 문제를 설명하고 에반이 답을 맞히기로 했기에 에반의 뒤엔 상준이 스케치북을 들고 서 있었다.

“시작!”

상준이 들고 있는 스케치북에 쓰인 단어는 ‘망고’였다.

“네.가. 좋.아.하.는. 거.”

시우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음악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지금 제가 얼마나 크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응?”

건너편 에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 시우는 다시 말했다.

“네.가. 좋.아…….”

“네가 좋아하는 거? 내가 좋아하는 거! 너.”

천천히 다시 말을 잇는 시우의 말을 끊은 에반은 재빨리 대답했다.

갑자기 에반이 빠르게 말을 하고 무언가를 외쳤지만, 시우는 직감적으로 그가 틀렸다는 걸 알았다.

“아니야. 아니, 네가 좋아하는 거.”

“그래, 내가 좋아하는 거. 너! 시우! 김시우!”

너무나도 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오직 한 사람을 칭하는 단어를 모조리 뱉는 에반 때문에 지켜보던 모든 사람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아니야. 네가 좋아하는 거. 나 말고!”

에반이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는 거 같기에 시우는 급한 마음에 빠르게 말했다.

“나? 너? 나 너 좋아하는데. 너 말고? 코코. 쿼카? 동물! 쿼카!”

신나서 시우와 관련된 모든 단어를 말하던 에반은 앞에서 계속 시우가 아니라는 듯 머리를 흔들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에게로 가까이 가려 상체를 시우 쪽으로 숙였다.

“다시. 다시. 네.가. 좋.아.하.는. 과.일. 과일! 과일. 먹는 거. 과일.”

시우는 에반이 제게 집중하는 것 같자 다시 문제를 설명했다.

“자두! 자두!”

에반이 또 알아들었는지 같은 단어를 반복했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망고와는 다른 입 모양이었다.

“노란색. 노.란.색.”

이쯤 되니 시우는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 크게 소리쳤다. 손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게임 규칙이 있었기에 커다란 헤드셋 위로 손을 올린 시우는 촬영 카메라와 에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한 손으로 스케치북을 들고 다른 손으로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듯 손을 흔드는 상준을 바라보았다.

“과.일? 과일! 노란색. 참외, 바나나. 또…… 또…….”

시우의 말을 조금은 알아들은 에반은 이제 제가 아는 과일들을 다 나열했다.

“네가 좋아하는 과일. 노란색. 동그랗고. 달달하고. 동남아.”

커다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시우가 설명을 이어나가고 나서야 에반의 입에서 ‘망고’라는 대답이 나왔다.

찬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고, 게임 시작 때는 옆에 서 있었던 예찬은 조금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배를 감싸고 있었다.

에반이 답을 맞히는 것과 동시에 스케치북이 넘어가고 그곳에는 이번엔 ‘악마’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우리 곡! 우리 신곡!”

신곡을 소개하기 위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니 당연히 곡과 관련된 문제들이 나왔다. 말이 좋아 게임이지, 실제로 여섯 개를 맞히지 못한다면 어떻게든 문제를 더 풀고 맞혀서 편집하더라도 그들은 신곡 무대를 할 것이 분명했다.

“루시퍼!”

이번엔 바로 알아들었는지 원하는 쪽으로 대답이 나왔다.

“루시퍼. 맞아, 맞아. 우리 뮤.직.비.디.오.”

시우는 뮤직비디오에서 네 역할이라는 설명을 통해 악마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려 했다.

“루시퍼. 어? 루시퍼. 답 아니야? 뭐? 뭐?”

루시퍼가 답인 줄 알았던 에반은 시우가 계속 말을 하자,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붉은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뮤.직…… 뮤직. 뮤지컬? 아! 뮤직비디오.”

계속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시우의 입 모양을 따라 말하던 에반은 이번에는 시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뮤직비디오. 맞아, 맞아.”

에반이 제 말을 잘 따라 하자, 신난 시우의 엉덩이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들썩였다.

“나는 루시퍼. 나. 루시퍼. 너……”

“키스!”

자신은 루시퍼 역할, 너는 무슨 역할이냐는 말을 하려던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는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뭐라고 말하는 거지?

살짝 벌어진 시우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악마라는 단어를 웅얼거려 보니 지금 에반이 뱉은 단어와 겹치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키스. 루시퍼. 뮤직비디오.”

에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히려 에반의 입술을 빤히 보는 시우와, 역으로 답일 거라 예상하는 것들을 마구 내뱉는 에반의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아니. 거기서 키스가 왜 나오냐고!”

너무 웃어서 배가 당긴 예찬은 결국 바닥에 주저앉은 채, 답답함에 소리를 질렀다.

“왜 에반이 설명해? 듣고 답해야지.”

생각에 잠긴 시우와 계속 말을 하는 에반을 본 찬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놈, 분명히 다 알아들었다. 방송이 장난이냐?

처음부터 아예 숨길 생각이 없는 놈이 지금 방송을 핑계로 연애질을 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대놓고 우리 연애해요, 나 시우 사랑해요, 를 외치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 순진무구한 시우는 그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지금 촬영하는 피디는 신이 나 입이 귀에 걸렸다.

이렇게 이슈 되기 좋은 내용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오션이 컴백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각종 연예 뉴스난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런 민감할 수도 있는 단어를 마음껏 외치는 아이돌이라니. 이 상황은 절대 편집할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박제하여 두고두고 회자하면 모를까.

“쟤 뭐라는 거예요?”

계속 엉뚱한 말을 하는 에반을 보다 정말 못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우는 카메라가 아닌 옆에 서 있는 찬을 바라보았다.

“패스해, 패스.”

이거 더 뒀다가는 문제가 될 것 같아, 찬은 패스하라고 말하며 얼른 손으로 넘기는 제스처를 취했다.

“루시퍼. 루시퍼에서 네 역할!”

다 맞힌 것 같은데 문제를 넘기라는 찬의 행동을 무시한 시우는 다시 에반을 바라보았다.

“키스 아니야?”

시우가 헤매고 있을 때, 에반은 꿋꿋이 키스를 밀고 있었다.

“응? 키.스. 키스? 왜? 키스? 야, 이……. 아니야! 아니야! 그거 말고! 너 그때 뭐 했냐고. 왜 말을 안 들어. 좀 들어! 그만 말하고 내 말 좀 들어!”

그제야 에반이 반복하는 입 모양을 알아챈 시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고, 이제는 스태프들까지 웃기 시작했다.

“아……! 뭐 했냐고?”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작은 두 주먹 불끈 쥐고 외치는 시우와 다르게 이제야 이해해서 기분 좋다는 듯 빙긋 웃으며 여유 넘치는 에반의 상반된 모습이 방송 분량을 확실하게 채우고 있었다.

“너. 뮤직비디오에서 무슨 역할 했어!”

에반이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도 눈치 못 챈 시우는 지금껏 방송에서 조금도 보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대중적으로 친근하고 귀여운 대형견같이 보이는 예찬과는 달리 살짝 올라간 눈초리와 조금 느린 말투를 가진 시우는 예민한 고양잇과 동물처럼 여겨졌다.

그런 그가 이렇게 조급하고 높은 목소리로 에반에게 말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루시퍼.”

“아악! 두 글자. 두 글자야!”

분명히 답은 두 글자인 악마지만, 세 글자를 말하는 에반의 입술을 집중해서 본 시우는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뱅그르 돌고 말았다.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악마.”

한 바퀴 돌고 바로 선 시우는 상준이 들고 있는 스케치북이 넘어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게임 언제 끝나지? 이번에 적힌 단어는 ‘친구’였다.

하아……. 이건 또 어떻게 설명하지.

자리에 앉아 크게 숨을 고른 시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우.리. 사.이.”

제대로 못 들은 것인지 제게 집중하고 있는 에반의 표정을 확인한 시우는 다시 목소리를 키웠다.

“너랑 나. 우리 사이.”

“사랑해?”

……못 알아봤으면 좋겠는데, 너무나도 정확히 읽은 단어에 시우는 멍하니 에반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얼빠진 시우의 모습에 이번엔 에반이 되물었다.

“동갑! 나이가 같아.”

얼른 정신을 차린 시우는 머리를 작게 흔들고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사이. 친해. 좋아.”

이쯤 되니 에반의 대답이 동문서답인 건지 의도한 것인지 정말 못 알아듣는 것인지 모르겠다. 결국 손을 들어 미간을 누르며 눈을 가린 찬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이거 괜찮아요?”

웃고 떠들고 박장대소하는 상황에서 찬은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예찬의 목소리에 그냥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지금 제가 봐도 재밌다. 그런데 이걸 방송국 놈들이 놓치겠니?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무려 우정 링도 끼고 계신 분들인데.”

확실하게 분량을 뽑았으니, 오늘 녹화는 평소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았다. 그거면 됐다. 해명하고 오버하는 것이 더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그냥 포기하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찬은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활짝 웃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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