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3분 48초.
절정으로 치닫던 곡이 끝나고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지자 시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면서 이런 열광적인 반응은 처음이었다. 사전 녹화를 함께하는 팬들의 함성이 아직도 울리고 있었다.
“잘했어.”
온몸에 힘을 빼고 에반의 팔에 의지하고 있던 시우는 자신을 끌어안으며 속삭이는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한 곡을 끝내고 이렇게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다.
급히 옷을 갈아입고 ‘루시퍼’에 이어 준비한 두 곡 역시 무탈하게 녹화를 마칠 수 있었다.
땀에 젖은 옷을 펄럭거리며 대기실로 향하던 시우의 몸이 휘청거리는 순간 그를 뒤따르던 예찬이 얼른 그의 팔을 잡았다.
“시우 형. 데뷔 첫 무대인 줄 알겠어요. 데뷔 때도 이렇게 안 떨더니 오늘 왜 이렇게 긴장했어요.”
“원래 뭘 모를 때는 겁이 없어서 그래. 어설프게 알 때가 제일 무섭고 두려운 거지.”
무대에 서기 전 떨림은 진정한 떨림이 아니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이후 남아있는 희열감에 몸이 휘청거린 시우는 결국 발걸음을 멈췄다.
그 많은 시간을 돌고 돌면서 연예계를 떠나지 못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한 번도 정상에 서보지도 못했고, 팬들과 많은 것을 공유하지도 못했다.
길고 긴 연습의 시간은 때로는 고통으로 남았지만 3~4분 남짓한 무대 뒤에 느끼는 그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무대를 하는 중간중간 들리는 환호성과 자신의 이름, 격한 안무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느낄 땐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 같았다. 작은 공간에 갇혀 같은 동작은 수천 번 반복했다. 마음에 드는 소리를 내기 위해 수없이 발성을 연습하고, 트레이닝을 받았다.
“아이고. 우리 시우 형. 힘들었네. 업혀요. 내가 대기실까지 업어준다.”
자리에 멈춰있던 시우는 갑자기 제 앞을 가린 넓은 등에 조금 뒤로 물러났지만, 몸을 낮추는 그 행동에 피식 웃었다. 살짝 몸을 굽힌 예찬이 제게 뭘 바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주위에는 비하인드 촬영을 위한 카메라가 있었다.
예찬의 넓은 등에 업힌 시우는 카메라를 향해 V를 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예찬이 몸을 흔들었고, 그가 떨어뜨리지 않을 것을 알지만 본능적으로 시우는 예찬의 어깨를 잡았다.
“시우 형이 요즘 스트레스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사녹 진짜 잘하지 않았어요?”
카메라 감독님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예찬은 환하게 웃으면서 시우를 업은 채 대기실로 향했다.
“야. 나 내려줘.”
“싫어요. 대기실 가서 내려줄게요. 형 진짜 긴장하긴 했나 봐. 다 끝났는데 아직도 떨어요?”
예찬의 고집도 보통이 아님을 알기에 시우는 버둥거리기보다 편하게 그의 등에 기대는 걸 선택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업혀본 게 언제일까?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히 어린 시절 부모님이 업어주셨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업힌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았고, 편안했다. 뭐 예찬이 워낙 체격이 좋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업힌 채 숨을 고르던 시우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틀어 예찬의 등에 코를 대고는 킁킁거렸다. 숙소에 있는 보디 제품 향과 방금 흘린 땀 냄새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페로몬이라고 생각될 만한 어떤 향도 맡아지지 않았다.
에반의 경우 근처에 가기만 해도 그의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알파나 오메가는 모두 페로몬 조절을 하기에 쉽게 그의 향을 맡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숨결에 묻어나는 옅은 향을 맡을 수 있다고 했는데.
왜 멀리 있는 에반의 페로몬은 맡을 수 있지만, 바로 앞에 있는 예찬의 페로몬은 맡을 수 없을까? 에반이 페로몬 조절을 못 할 리가 없다. 만약 조절하지 못했다면, 찬이나 예찬이 그에게 말했을 것이다.
예전에 제게서 나던 에반의 향을 짚어준 이도 예찬이었다.
“예찬아.”
“네.”
“나한테서 냄새 안 나?”
“무슨 냄새?”
“음…… 에바니 냄새?”
제가 한 질문을 오히려 되묻는 예찬의 말에 시우는 조금 뜸을 들이며 말했다. 코 밑을 쓱 문지르고 다시 예찬의 등에 코를 묻었다. 하지만 역시나 제가 맡은 향은 섬유유연제, 보디 제품 향이 전부다.
“참나. 그거 묻는 거였어요? 당연히 나지. 에반 형 페로몬 냄새도 나고 내 것도 나고 찬이 형 것도 나고. 다 같이 숙소 생활하는데 그게 안 날까 봐? 우리가 나름 다 조심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다 같이 생활하면 조금씩 묻을 수밖에 없어요. 왜요. 신경 쓰여요?”
시우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예찬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영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시우와 에반의 관계가 급속도로 좋아졌다. 으르렁거리는 게 뭐야, 오히려 너무 찰떡같이 붙어있어서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시우 형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에반 형이 시우 형을 싸고도는 건 너무나도 눈에 띄게 심해졌다. 그리고 시우 형에게서 에반의 페로몬이 묻어나기 시작한 것도 영국에서부터인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것 역시 그러려니 하고 지내다 조금 전 시우 형에게서 느껴진 페로몬을 맡는 순간 예찬은 진짜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대놓고 ‘내 것. 건들면 죽여버림.’ 이런 느낌의 페로몬으로 도배된 시우가 해맑은 얼굴로 인이어 아직 착용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나타난 것이다.
허겁지겁 찬을 찾았고, 저와 찬의 페로몬을 그 위에 덮어씌워 누군가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진짜 무슨 생각으로 에반 형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잠시 후 나타난 찬 형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비밀 연애하신단다. 그러니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된대. 그러니까 우리보고 시우를 잘 속이라네.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들이 연애하는 걸 모른다고. 둘이 우리 앞에서 끌어안고 키스해도 그냥 아주 미친 듯이 친해서 그런 거야. 알겠지?’
‘그게 뭔 말이에요?’
‘시우만 연애가 공개된 걸 모르는 비밀연애 같은 공개 연애를 한다는 말인 거 같은데.’
‘……그 말이 더 어려운데요.’
‘살고 싶으면 알아도 모른 척하라는 말이다.’
“원래 그런 거야?”
어쨌거나 자신의 연기가 먹힌 것인지 시우 형의 평온한 말투에 예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렇죠. 형이 신경 쓰이면 내가 형들한테 말해서 좀 더 조심해볼게요.”
시우는 이번엔 제가 입고 있는 셔츠 소매를 코에 가져다 댔다. 예찬과 같은 향이 났다.
이상하다. 분명히 에반에게서 느껴지는 박하 향은 그의 페로몬 같다. 그리고 방금 예찬은 제게서 모두의 페로몬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서 박하 향이 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안 나지? 예찬이와 찬의 페로몬 향은 정확히 몰라서 알아채지 못한다고 해도. 에반의 향까지 맡지 못하는 건 무슨 상황일까.
페어라는 단어와 제가 느끼는 에반의 박하 향.
그리고 스무 살이라는 현재의 나이. 아주 아주 예외적으로 가끔 20대 초반에 뒤늦은 나이에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을 선택적으로 맡는 경우가 있나? 아. 진짜 모르겠다.
순간 느껴지는 익숙한 향에 시우는 편히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하고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에반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친 안무에 땀에 젖은 머리를 털며 오는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그 모습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빠르게 예찬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야. 야. 빨리. 빨리.”
“뭐? 뭐요?”
“나 빨리 내려줘.”
“에헤이. 조기 앞이 대기실인데. 다 왔어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에반이 화난 거 같단 말이야. 너랑 나랑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
“아니. 지금…….”
에반이 바로 뒤에 있다는 말을 전하는 것보다 에반이 다가오는 속도가 빨랐고, 피할 새도 없이 시우는 에반의 두 손에 달랑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60kg 정도는 나가는 남자인데 예찬이나 에반은 자신을 어린애 다루듯 했다. 방금까지 예찬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지금은 에반이 제 겨드랑이를 잡고 들고 있으니 말이다.
“걷기 힘들면 나한테 말하지.”
“나 좀 내려주고 말해.”
“힘이 남아도냐? 그럼. 나를 업어.”
옆을 지나치던 상준이 놀라서 서 있는 예찬의 등에 매달렸고, 그제야 시우는 두 발이 땅에 닿았다.
정말 무언가 제대로 생각하려 해도, 이 멤버들과 함께 있을 때는 진지해질 수가 없었다.
* * *
“괜찮아?”
소파에 누워있던 시우는 찬의 말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괜찮냐고? 이건 괜찮다, 안 괜찮다고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숙소에서 언제 편하게 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촬영을 기다리는 대기실에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는 그 시간에 졸면서 체력을 충전했다.
편안하게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식사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매니저가 주는 대로 대기실에 준비되어있는 음식들을 가릴 것 없이 먹으면서 배를 채웠다. 배를 채운다는 것도 사치. 그냥 생존을 위해 꾸역꾸역 먹는다는 것이 더 맞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바빴던 적이 있던가? 단언컨대 수없이 회귀한 삶까지 다 더한다고 해도 이랬던 적은 없었다.
‘루시퍼’는 첫 주 음악차트 진입과 동시에 1위를 차지했고, 벌써 3주째 각종 음악차트에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가보고 싶던 예능 프로그램들은 앞다투어 그들을 섭외하고 싶어 했다.
숙소에 들어가는 이유가 쉬는 것이 아니라 씻기 위한 것이라는 상준의 말에 시우는 격하게 공감했다. 처음엔 열정적으로 촬영에 임하던 멤버들도 슬슬 체력에 한계가 온 듯했다.
“아직 살아는 있어요.”
시우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녁 9시 40분. 지금 찬이 제게 건넨 것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이 말인즉슨 오늘도 못 잔다는 것이지. 진짜 온몸에 돌고 있는 것이 피가 아니라 카페인인 것 같았다.
“오늘만 버티자. 내일은 그래도 숙소에서 한 8시간은 쉴 수 있을 거야.”
“아 웃프다. 형. 하나도 위로 안 되는 거 알죠?”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뜬 시우는 빨대를 물고 차가운 커피를 마셨다. 차가운 걸 먹어도 잠이 안 깨냐.
“최대한 텐션 올려서 빨리 녹화 끝내는 게 목표인 거 알지?”
시우는 자신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찬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형 마음이 제 마음입니다. 진심으로 숙소에 있는 제 침대에 들어가 눕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