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얼른 대답하라는 듯 에반의 발이 또 시우의 발을 건드리자, 시우는 얼른 답을 썼다.
[미안.]
슬쩍 시선을 올려 에반을 훔쳐보자 꽤 진지한 표정으로 그는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안하면 다야? 그래서 언제 키스해 줄 거야?]
꽤 심각할 수 있던 일이 작은 웃음거리처럼 흘러갔다.
[…….]
난감한 표정의 캐릭터 이모티콘과 함께 시우는 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흐음.”
앞에서 불만 어린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같이 잘까?]
순간 시우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껏 에반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던 것이 무색하게 시우의 두 눈은 여전히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에반을 향했다.
[우리 코코. 지금 무슨 생각 해?]
배를 잡고 웃는 모양의 이모티콘과 함께 다시 날아든 텍스트를 확인한 시우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랫입술만 잘근거린 시우의 손끝이 휴대전화 위를 빠르게 움직이다, 방금까지 적은 것들을 다 지웠다.
[김시우, 진짜 바보. 너 혼자 있기 싫잖아. 그리고 내일 첫 방이라 더 그럴 거고. 손만 잡고 잘게. 오빠 믿지?]
[ㅡㅡ;;;;;;;;;;;;;; 미안! 네가 아니라 나를 못 믿어.]
[야! 그럼 내가 너무 고맙잖아.]
[뭐래;;;;]
긴장이나 불안한 마음은 가시고 어느새 시우는 에반과의 메시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순간순간 심장이 떨리다가도 너무나도 편안한 에반의 능글거림에 계속해 헛웃음만 나왔다.
[촬영 끝나고 돈가스나 먹을까?]
영양가 없는 농담 따먹기 같은 말의 끝에 에반이 점심 메뉴를 먼저 물어 왔다.
[콜.]
분명 옆에서 찬과 예찬이 진지하게 점심 메뉴에 관해 토론을 벌이고 있었지만, 이미 시우와 에반은 점심 메뉴를 이렇게나 간단하게 결정해 버렸다.
분주하던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그들의 뒤에 있는 시계는 점차 정오를 향해 달렸다.
“떴다!”
영상실 벽에 걸려 있는 TV에서 ‘루시퍼’ 뮤직비디오가 나오기 시작했다. 찬과 노닥거리던 예찬의 말에 시우의 시선도 그리 향했다.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가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눈을 깜박일 때마다 수백 수천 개가 올라갔다. 옆에서 휘파람을 불고 만족스러운 목소리들이 오갔지만, 그런 건 시우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뮤직비디오 오픈만으로 이렇게 이슈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라이브를 시작했을 때도 시우는 얼떨떨한 기분을 쉬이 거둬 내지 못했다.
라이브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간단하게 촬영 장면의 비하인드를 멤버들이 풀어놓았고, 다들 이야기를 보태다 보니 금세 시간이 흘렀다.
“어쨌거나 이번 뮤직비디오는 우리 시우가 다 했네, 다 했어.”
“루시퍼잖아요.”
멤버들의 말에 시우는 그저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루시퍼를 마다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반응들 때문이었다.
모난 돌은 정 맞는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어떻게든 멤버들보다 튀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어 안달했겠지만, 지금은 솔직히 모르겠다.
“자, 이제 우리 뮤직비디오의 하이라이트죠. 마지막으로 에반을 만나는데, 에반을 어떻게 꼬시느냐. 바로…… 이거지 말입니다.”
찰박거리는 물이 가득한 공간을 시우가 걸어간다.
영상 속 시우는 정말 물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검은색 물결은 당장이라도 루시퍼를 깊은 심연으로 끌어들일 듯 불안하게 일렁였다.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 금빛 테두리가 돋보이는 의자에 앉은 에반이 더 커 보였다.
실물로 제작하기까지 했던 커다란 날개가 루시퍼의 등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악마에게 가까워질수록 날개의 크기는 조금씩 줄었고, 단을 올라 잠든 이의 앞에 섰을 때쯤 루시퍼의 날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루시퍼는 자만하고 있었다. 제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문제의 장면이 펼쳐졌다.
매섭게 루시퍼를 낚아채는 악마. 그의 품에 힘없이 안긴 루시퍼.
동시에 왕좌에 앉은 악마의 등 뒤로 칠흑같이 어두운 날개가 찬란하게 펼쳐졌다.
루시퍼의 뒷머리를 감싸고 있는 악마의 눈은 분명 감겨 있었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번쩍 뜨였고, 일렁이는 수많은 감정을 품은 녹안이 카메라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화면이 멈췄다.
“이 부분 때문에 지금 난리인데요. 자, 에반 씨랑 시우 씨.”
찬의 말에 시우는 혀를 살짝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원래 콘셉트가 이렇지 않았단 말이죠. 그 장면은 거의 열 번 정도 NG 났던 것 같은데 어땠어요?”
“그랬죠. 원래는 루시퍼가 다가가 가벼운 입맞춤으로 악마를 깨우는 거였죠.”
싱글거리며 대답하는 에반을 보며 시우는 손끝으로 제 볼을 긁었다.
“세트장을 걸을 때마다 바지가 점차 젖어서 마지막 촬영을 할 때는 거의 무릎까지 젖었잖아요. 지금 영상에서야 저 바지가 보송보송해 보이겠지만, 나중에 걸을 땐 철벅철벅 소리까지 났어요.”
시우는 가장 무난한 에피소드를 말했다.
“전 계속 눈을 감고 있으니까, 시우가 언제쯤 도착하나 계속 생각했죠. 몇 번 듣다 보니 저기 세트장 물 위에서 걷는 거랑 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달라서, 나중에는 대충 지금이겠구나 했죠.”
시우가 걱정한 것과 달리 에반 역시 평범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이런 게 궁금하죠! 그래서 닿았습니까? 안 닿았습니까?”
키득키득 웃으면서 던진 찬의 질문에 시우의 동공이 불안하게 떨렸다. 방송 시작 후 지금껏 에반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저도 모르게 에반을 찾았다.
이 상황 익숙하다. 그리고 그때 대답은.
“닿았죠.”
“안 닿았어요.”
둘의 대답이 겹쳤다. 예전 비슷한 상황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시우가 닿았다고 시인했고, 에반이 닿지 않았다고 말했다.
예찬이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웃었고, 상준은 뭐라고? 닿았다는 거야? 안 닿았다는 거야?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했다.
“안 닿았죠.”
“닿았어요.”
서로 아차 한 표정을 지은 에반과 시우가 급히 정정해서 말했지만, 또 둘의 목소리가 겹쳤다. 물론 이번엔 시우가 닿지 않았다고 말했고, 에반은 닿았다는 대답을 했다.
멤버들은 박장대소했다. 제작진 측에서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깨만 으쓱해 보이며 웃는 에반과 다르게 시우의 얼굴과 귀가 붉어졌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어떻게든 무마시키기 위해 시우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흔들면서 말을 하려 했지만, 한번 터진 웃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팬들까지 합세해 채팅창은 터져 나갈 것처럼 수많은 글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닿았네, 닿았어. 둘이서 말을 맞추든가. 이게 진짜 촬영 카메라 각도가 이래서 우리도 제작진도 몰랐던 사실이거든요.”
“맞아요. 제가 그때 촬영 끝낸 시우 형한테 닿았냐고 물었다가, 찬이 형한테 끌려갔잖아요!”
“넌 눈치도 없이. 촬영 바쁜데 그런 거 묻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아! 진짜…….”
이 주제로 상황을 설명하며 다들 목소리를 키우자, 결국 시우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을 선택했다. 이건 뭐 제가 생각해도 입술이 닿았다는 걸 스스로 밝힌 셈이다.
“잠깐, 잠깐만요. 이게 중요한 장면이었잖아요. 앞서 촬영한 장면도 그리 나쁘진 않았는데 딱! 뭐랄까. 괜찮긴 한데 확 와닿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감독님께 다시 촬영하자고 했죠.”
모든 걸 포기해 버린 시우와 다르게 에반이 상황을 정리하며 말을 꺼냈다.
“전 진짜 이럴 줄 몰랐다고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시우는 나름 변명을 웅얼거렸다.
“단 위로 올라오면 제가 이런 식으로 끌어안을 거라고 설명하면 시우가 긴장할 것 같아서 오히려 촬영이 더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죠.”
“원래는 악마가 저 왕좌에 반쯤 드러눕듯 앉아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다가가서 살짝 고개를 꺾어서 깨우는 것 같은 상황으로 촬영을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에바니가 알아서 한다고 해 가지고. 나도 당했어! 당한 거야. 저렇게 잡고 있는데 어떻게 피해요!”
에반의 말에 시우는 가리고 있던 두 손을 내리고는 얼른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사실을 말해야지.
하지만 흥분한 시우의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평소 조금 느리게 생각을 하면서 말하던 시우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내가 했네, 내가 했어. 내 잘못이네, 내 잘못이야.”
다들 시우의 빠른 말에 놀라는 것도 잠시, 결국 웃으면서 제가 했다고 시인해 버리는 에반의 실토에 또 한 번 영상실엔 멤버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자자, 촬영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뭐 에반이랑 시우가 입술 닿은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아시죠? 막대 과자…….”
“형! 형이 그렇게 말하면 더 이상하죠. 여러분, 절대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윽고 찬이 상황을 정리하는 듯하면서 다른 에피소드까지 들먹였다. 시우는 황급히 그의 팔뚝을 잡으면서 찬의 말을 끊었다.
“아, 됐어. 치사하게 둘이서만 우정 링 한 사람 말은 안 믿어. 다음으로 넘어가죠.”
몰아가기로 작정했는지, 찬을 말렸더니 반대편에 앉은 상준이 한술 더 떠서 말을 보탰다. 그러자 예찬은 아예 테이블 위에 엎드려서 눈가에 고인 눈물까지 훔쳐 냈다.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에반은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자신의 하관을 가리고 있었다. 필시 웃는 걸 가리려 하는 행동이리라.
지금 당황하고 놀라서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시우의 모습이 더 상황을 부추긴다는 것을 당사자인 시우만 모르고 있었다.
18분 분량의 라이브가 끝났을 때 시우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남은 라이브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것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이야, 오늘 라이브는 시우가 하드 캐리 했네. 네가 다 살렸다.”
카메라가 꺼진 것을 확인하고 테이블에 엎드린 시우의 등을 상준이 토닥거렸지만, 시우는 쉬이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아마도 한동안 인터넷을 끊어야 할 것 같았다.
무플보다 악플이 좋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어쨌거나 악플도 좋은 쪽으로든 좋지 않은 쪽으로든 관심이 있으니 보여 주는 반응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접하면 상당히 아팠다.
안 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앞으로 조금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시우의 오른손은 어느새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