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시우, 커피?”
망설이는 시간도 잠시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가자마자 마주친 상준의 말에 시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으로 향했다.
어차피 숍에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따로 할 예정이라 대충 수건으로 물기만 털어 낸 시우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쳤다.
“그런데 웬 자두래요? 우리 자두 안 먹는데.”
머릿결이 꽤 좋다고 생각했는데 계속된 탈색과 염색으로 뻣뻣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만지던 시우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어제 에반이 하도 사야 한다고 해서.”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자두 상자를 본 예찬은 벌써 그 안에서 자두를 꺼내고 있었다. 곁에서 멤버들의 준비를 돕던 대환의 말에 시우는 커다란 눈만 도록도록 굴렸다.
“음, 이거 맛 특이한데. 맛있다. 어디서 이런 걸 샀대요?”
“어젯밤에 자는 농장주까지 깨워서 받아 왔지. 하여튼 쟤도 진짜 특이해. 맛있으면 나도 하나 줘 봐.”
맛있어. 맛있어. 진짜 맛있다. 계속 맛있다고 말하는 예찬의 손에 들린 자두 한 알이 대환의 손으로 넘어갔다.
“여기 커피.”
부엌 앞에 서 있던 시우는 제 팔을 툭 치는 손길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상준이 내미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지금껏 내가 먹은 자두가 농장주에게 직접 받아 온 자두라고?
근처 마켓에서 구할 수 있는 자두가 아니었어?
흔하지 않은 맛.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시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에반은 늘 자두를 제게 주었지만, 판매처는 말해 주지 않았다. 대신 언제든 먹고 싶을 때 말을 하라고 했지. 그리고 한 번에 많이 주지도 않았다.
하루 이틀 안에 다 먹을 정도로만 주었다. 어쩔 땐 정말 한 알만 주었고. 그래야 신선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자두가 떨어질 때마다 주는 것도 아니었다. 문득 자두 먹고 싶다, 이렇게 생각할 때쯤 몇 개씩 주었다.
에반이 회귀자라면? 우리가 공유한 시간을 다 안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었다. 우연일 것이다. 예전부터 에반이 알고 있던 곳이라든가.
‘나의 페어.’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시우의 시선이 에반의 방으로 향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들은 말. 그가 제게 주는 희열감에 들떠서 잘못 들은 환청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계속해서 눈앞이 흐려지던 순간 에반은 그리 말했고, 다시 되묻고 싶었지만 결국 묻지 못했다.
비슷한 일이 겹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연이 겹친다는 것은 필연이고.
에반이 회귀자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이제 회귀를 막을 수 있나? 어떻게 하면? 그 전에 내가 느낄 수 있는 에반의 페로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난 삶의 마지막에 그는 분명히 페어라는 말 외에 다른 말도 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 역시 꽤 중요한 말이었을 것이다.
“상준 형, 자두 먹을래요?”
“달콤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자두였어? 웬 자두래. 이야……. 나 연습생 되고 자두는 처음 먹어 보는 거 같은데? 하나 줘 봐.”
“나도 연습생 이후 처음인 것 같아요. 에반 형은 사 올 거면 많이 사 오지. 겨우 이거 갖고 왔대요?”
또 복잡하게 생각이 엉키자 시우는 얼른 머리를 살짝 털었다. 상준과 대환, 예찬은 자두 상자를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용할 때, 혼자 생각할 시간이 주어질 때 그때 찬찬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쉽게 결정 내릴 만한 일이 아니다.
지난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 했다. 에반이 입을 맞추는 바람에 끝내 전하지 못했지만.
그나저나 자두. 그 자두 맛있는데, 상자 크기로 봤을 때 몇 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시우는 손을 들어 종이컵 끝을 깨물었다. 자두 향 대신 은은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입술에 가져다 댄 종이컵을 기울이자 새콤달콤한 자두 맛 대신 씁쓸하면서도 익숙한 커피 맛이 입 안을 맴돌았다.
“뭐야? 그 자두 시우 건데.”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부엌 입구에 서 있던 시우는 에반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스치듯 시우의 옆을 지나친 에반은 자두 상자에서 망설임 없이 자두를 집어 들었다.
“시우 거?”
“시우가 좋아하는 거라서요. 어제 제대로 먹이지도 못했는데, 다 먹어 버렸네.”
상준의 질문에 무심한 말투로 대답한 에반은 한 손에 자두 두 개를 들고는 시우에게로 다가왔다. 본인이 먹으려고 산 것도 아니고, 시우를 먹이려고 어젯밤에 먼 곳까지 다녀왔다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에반과 시우에게 닿았다. 물론 오늘 아침 그들을 깨우는 것부터 준비 과정을 세세히 담고 있던 촬영용 카메라까지.
“시우 형, 수박 좋아하잖아요.”
한 입 베어 물었던 자두를 홀랑 입 안으로 넣기 전 예찬은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말했다. 시우는 각종 설문지 같은 것을 할 때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수박이라고 답했고, 같이 지낸 몇 년의 시간을 돌아봐도 자두와는 접점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자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는데.
“수박 좋아한다고 자두 좋아하면 안 돼? 커피 말고 자두부터 먹어. 나중에 또 가져다줄게.”
시우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컵이 사라지고 그의 손엔 자두가 자리 잡았다. 오른손에 한 개, 왼손에 한 개. 그리고 시우가 마시던 커피를 들이켜며 에반이 윙크를 하는 순간, 시우의 오른손에 쥐어진 자두가 살짝 뭉개졌다.
“…….”
“먹기 싫으면 말로 하지.”
시우의 오른손을 본 에반이 시우의 손을 겹쳐 잡았다. 그러고는 그 손을 끌어 자두를 입가로 가져가는 행동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불과 몇 시간 전 일이 떠올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여기였고, 그때도 자두가…….
이내 오른손에 쥐고 있던 자두가 사라졌다. 곧이어 따스하고 커다란 손에 감싸였던 손등이 서늘해졌다.
“그래도 그거 하나는 먹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손에서 자두가 사라지고 한마디 툭 던진 에반은 무심히 멀어지고 있었다. 덩그러니 남아 있는 자두를 보던 시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제 모두의 시선은 오로지 시우에게 닿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이 사태를 일으킨 에반이 사라졌으니 볼 사람이 시우 말고는 누가 있을까.
“……여기 자두가 맛있더라고.”
이 분위기 어떡할 거야.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린 시우는 자두 끝을 조금 깨물었다.
“다 준비됐지? 찬이랑 에반이는 어디 갔어?”
자두에 얽힌 이상한 상황을 정리한 것은 막 숙소로 들어온 명훈이었다.
* * *
뮤직비디오 오픈 시간 전.
촬영 준비를 끝낸 오션 멤버들은 소속사 영상실에 모여 있었다.
은근슬쩍 상준과 찬의 사이에 앉은 시우는 허벅지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는 초조함에 덜덜 떨리는 다리를 꾹 눌렀다.
이제는 희미해진 첫 삶에서의 첫 데뷔가 떠올랐다. 멤버 모두 긴장을 떨치지 못하고 단체로 청심환을 나눠 먹었던 기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청심환을 먹고도 그리 떨었었는데, 이곳에서 긴장을 한 사람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정오가 오픈 시각이었기에 뮤직비디오 리액션은 30분 정도가 지난 12시 30분에 시작해 약 10분에서 15분 정도의 분량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실시간 라이브로 이루어지는 터라 미리 준비한 대본도 없었다.
편안하게 뮤직비디오를 같이 보고 그때 상황이나 에피소드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불안감을 감추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런 걱정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건너편에 앉은 예찬은 배가 고프다며 찬에게 칭얼거렸다.
“형, 점심 뭐 먹을까요? 나 배고파, 배고파. 아까 아침에 자두 두 알 먹은 게 전부예요.”
“빵이랑 먹을 거 많았는데 더 먹지 그랬어? 뭐 먹고 싶은데?”
“소불고기전골 어때요?”
“또 고기 먹게?”
찬은 예찬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둘은 점심 메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상준은 의자에 푹 기대앉아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고, 에반은 영상실 코너 쪽에 기대선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당장 무대에 올라도 될 정도의 완벽한 모습이 아닌 편안한 모습으로 촬영을 하기로 했기에 메이크업은 그리 짙지 않았다. 단지 푸석푸석한 헤어를 곱게 정리하고 ‘루시퍼’ 이미지상 껴야 하는 파란색 렌즈를 착용했다.
시력이 좋은 시우가 렌즈를 끼는 경우는 촬영 외에는 없었다. 뻑뻑하고 건조하고, 이래서 컬러 렌즈 싫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인공 눈물이라도 주머니에 넣고 올걸.
촬영 전이니 나가서 가지고 올까 하다 시우는 그냥 눈을 감는 걸 선택했다.
뮤직비디오 완성본을 처음 보는 건 아니다. 제가 봐도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멋있었다. 하지만 시장의 눈은 냉혹하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들어간, 자신과 에반의 장면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툭-.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리를 꼰 채, 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고 있던 시우는 슬며시 눈을 떴다.
방금 누군가가 자신의 발을 건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달라진 것은 하나였다.
통화를 끝낸 에반이 제 앞에 앉아 있다. 하지만 그는 시우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역시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었다.
잘못 느낀 것인가?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본 시우는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그 순간 시우의 휴대전화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곧 방송 시작인데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으면 소리를 끄지 않았을까. 시우는 급히 휴대전화를 조작해 무음, 무진동으로 바꿨다.
그리고 방금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바보]
너무 뜬금없는 한 단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시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코. 바보]
미간까지 찌푸린 채, 보고 있는 화면 아래 같은 단어가 또 올라왔다.
메시지를 바라보던 시우는 손가락을 천천히 화면으로 가져갔다.
[바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시우가 쓴 단어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 순간 또 에반이 시우의 발을 툭 건드렸다.
[키스하다가 잠드는 바보.]
방금까지 초조하고 불안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껏 불안정한 제 기분을 주체할 수 없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깨물었다면, 이번에는 웃음을 참느라 깨물어야 했다.
실룩실룩 올라가는 광대 때문에 결국 시우는 한 손으로 제 하관을 가려야 했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솔직히 어젯밤 일을 에반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애태우던 시우의 고민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