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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97화 (97/187)

97화

결국 밤을 지새웠다.

어둠이 물러가고 하늘이 밝아지는 걸 지켜보던 에반의 시선이 자신의 품에서 곱게 잠든 이에게로 옮겨 갔다. 적막이 가득한 방 안엔 시우의 고른 숨소리와 평온함을 가득 품은 자두 향만이 존재했다.

조금씩 편안한 자세를 찾으며 움직이던 시우의 몸은 이제 반 이상이 에반의 위에 걸쳐져 있었다. 팔이 아닌 가슴과 어깨 부위를 베개 삼고는 팔과 다리로 에반을 꼭 끌어안았다. 곧 일어나야 할 시간임을 알고 있지만, 에반은 이 순간을 깨고 싶지 않았다.

에반은 손을 들어 시우의 작은 머리를 쓸어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빠져나갔다. 이번엔 오른팔을 접어 시우의 상체를 감싸고는 고개를 숙여 시우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부드럽고 따스한 시우의 숨결이 가슴께에서 흩어졌다. 그가 전해 주는 온기가 밤을 지새운 그의 피로를 날려 주었다.

잠시 후, 시우가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새벽에 있었던 일은 물론이고 제 방에서 이러고 있는 것까지 설명하려니 모든 것이 막막하게 다가왔다.

갑자기 그가 잠든 것부터 설명해야 할까? 한편으로 시우가 복용한 수면 유도제가 마음에 걸렸다. 언제부터 불면증에 시달렸을까? 제법 큰 약통이 거의 빈 것으로 보아 장기적으로 복용한 것 같았다.

에반은 빛이 서서히 어둠을 밀어내면서 점차 선명해지는 시우의 얼굴을 눈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자신과 함께 식사할 때는 제법 잘 먹어서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볼살이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하다. 나름대로 신경 쓴다고 썼는데, 조금 더 그가 먹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시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예전의 시우가 절로 떠올랐다. 제가 알던 얼굴보다 지금이 조금 더 앳되다. 눈꼬리가 새초롬히 올라가 저를 흘길 때면 여우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자는 걸 보니 그저 순둥순둥하다. 볼이 한쪽으로 밀려 살짝 나온 입술을 보자 괜스레 웃음이 났다.

만지고 싶다. 하지만 섣불리 시우를 건드리지 못한 에반의 손은 허공을 맴돌았다. 이내 에반의 시선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있는 반지에 멈췄다.

자신이 회귀자임을 밝히는 것이 먼저일까? 시우, 그가 히든 오메가인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먼저일까? 의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히든 오메가인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먼저일 것 같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모든 것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까?

일분일초가 아까운 만큼 일분일초가 소중했다. 지난번과 이번이 운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만났으니까. 그리고 가까워질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다.

아예 다른 곳에서 다른 나이대로 만난다면 어찌 다가갈까?

다시 이렇게 친밀해지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실질적으로 저번보다 이번이 더 짧은 시간 내에 더 많이 친근해졌다. 이미 그룹 멤버로서 쌓은 신뢰 관계가 시간을 단축시킨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반지도 나눠 끼었고, 같이 잠도 자고. 굳이 약속을 잡지 않아도 매일 얼굴을 보고 같이 밥을 먹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렇게 안을 수도 있고, 입을 맞출 수도 있고. 수시로 시선도 교환했다.

카메라가 있거나 사람들이 많을 때면 유독 시우가 날을 세우고 멀리했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행복하면서도 슬프다는 것은 이럴 때 하는 말일까? 모래 위에 성을 지었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 작은 파도에도 쉽게 사라져 버릴 모래성. 외줄 타기 같은 이 아슬아슬함.

성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만 계속 앞서 나간다. 온갖 생각들이 밤새 에반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생각엔 두서가 없었고,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답이 나지 않았다.

난 이렇게 속 시끄러운데, 넌 잠만 자냐.

난 이렇게 심장이 뛰고 열이 들끓어서 미칠 것 같은데, 넌 속 편히 잠이 오지?

불순한 마음이 든 에반의 손이 결국 시우에게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어차피 깨워야 하잖아. 유치한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깨워 보겠……. 여긴 다시 오고요.”

노크도 없이 갑자기 문이 열리며 찬의 목소리가 들리다 황급히 문이 닫히는 소리에 에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의 입술 사이로 불만 어린 혀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동시에 방금까지 잠들어 있던 시우의 움직임이 커졌다.

잊고 있었다. 시우와 함께면 참으로 많은 것을 잊었다.

오늘 뮤직비디오 공개 리액션을 찍기로 한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이제 2집을 내는 신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아침에 일어나는 장면부터 방송 준비를 하는 모습들까지 가볍게 담기로 했다.

팀원 중 가장 성실하고 일찍 일어나는 찬이 방을 돌면서 깨우기로 했다. 에반, 성준, 예찬, 시우 순서로 깨운다고 했었지. 그나마 눈치 있는 찬이니 다행이지 예찬이었으면…….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에반은 이번엔 자신을 보고 있는 시우와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잠시 시선이 얽혔지만, 시우의 커다란 눈은 느릿하게 깜박일 때마다 이곳저곳 다른 곳을 보기 바빴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 같은 모습에 또 미소가 지어졌다.

연예인 같은 거 진짜 때려치우면 안 될까? 아니면 적어도 공개 연애를 하든지.

에반의 검지 끝이 결국 참지 못하고 시우의 턱을 살짝 건드려 저를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안녕.”

잠이 들지 않았지만, 잠긴 목소리가 에반의 입에서 흘러나갔다.

그와 동시에 시우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방금까지 꼭 붙어 있던 몸이 빠르게 멀어졌다. 하얀 얼굴이 붉어지고 귀 끝까지 빨개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뭐냐……. 너네 어제 같이 잤냐? 시우 빨리 네 방 가서 자는 척해. 어쩐지 계속 찬이 이상하게 굴더라니. 지금 예찬이 깨우고 있으니까, 다음 시우 차례 맞지?”

침대에 앉은 채, 시우는 멍하니 문 쪽을 바라보았다. 막 일어난 것 같은 상준이 하는 말에 다시금 시우의 머리가 휙휙 돌아갔다.

블랙 & 화이트.

어질러진 것 하나 없이 군더더기 없는 방.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에반을 본 시우는 그대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뛰었다.

지난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거실로 나가면서 뭉쳐 놓고 나온 이불을 보자니 제가 에반의 방에서 잔 것이 더 와닿았다. 일단 이불을 제대로 펼치고 그 안으로 들어간 시우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잠이 안 와서 수면 유도제를 먹었는데, 그때 에반이 왔고, 자두도 먹고.

그러니까 키스하다가 잤네.

나 잠들었네.

시우는 한 손으로 제 입을 턱 막았다.

어떻게 그 상황에 잘 수가 있지? 어쩐지 수면 유도제가 먹고 싶지 않더라.

어젯밤 일을 떠올리던 시우는 급히 손을 뻗어 테이블 옆에 있는 휴대전화를 낚아채고는 손을 이불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오전 8시 12분.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이렇게 푹 잔 것이 언제였지?

꿈조차 꾸지 않은 완벽한 숙면이었다. 수면 유도제나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약 기운에 눌려서 잠이 들긴 했지만 계속 잠을 설쳤고 결국 남는 건 무거운 피로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그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고 몸이 가벼웠다. 아니 어떻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거기다 처음 눈을 떴을 때의 상황이 떠오르자 시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언가를 안고 자는 자신의 잠버릇.

그래서 시우의 침대 위엔 크고 작은 쿠션, 베개들이 가득했다. 킹사이즈의 침대를 혼자 썼지만, 실질적으로 제가 잘 만한 공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이 침대 위에도 푹신한 인형과 쿠션들이 가득했다.

갑자기 상준 형에게 고마움이 밀려왔다. 그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에반과 어땠을까? 가슴이 간질간질해진 시우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벅벅 긁었다.

“시우야…….”

찬의 목소리에 혼자 이불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입술을 만지고 가슴을 두드리던 시우의 행동이 멈췄다. 깜박거리고 있던 눈을 황급히 감았다. 또 잊었네, 촬영을.

어쨌거나 지금은 자다가 일어나는 모습을 촬영해야 했다.

“김시우. 일어나야 해.”

부드럽고 나지막한 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침대 한쪽이 묵직해지는 것을 보니 아마도 침대에 걸터앉은 것 같았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이 슬슬 내려갔다.

얼른 한 팔을 들어 자신의 눈 위에 올려 둔 시우는 혀를 살짝 내밀어 바싹 마른 입술을 적시고,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형.”

이불이 내려가자 일부러 말꼬리를 늘이며 몸을 뒤척여 엎드렸다. 그러면서 잡히는 쿠션을 품으로 끌어당겨 얼굴을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촬영은 수없이 했다. 데뷔 초 어떻게든 인기를 얻기 위해서 숙소 소개를 하거나 멤버들끼리 서로 깨우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랬기에 팬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도 정확히 알았다. 깨운다고 바로바로 일어나고, 너무 멀끔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촬영을 알고 있었다는 티도 내서는 안 되고, 깨어나는 모습을 인위적으로 보여서도 안 됐다.

가장 쉬운 것 같으면서도 까다로운 촬영 중 하나였다.

“일어나. 오늘 우리 뮤직비디오 리액션 있잖아. 서둘러야지.”

찬의 손이 제 등을 토닥이고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쿠션에 얼굴을 묻고 시우는 웅얼거렸다.

“어서 씻고 나와.”

촬영 마지막을 알리듯 찬이 시우의 엉덩이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는 방을 나갔고, 이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아…….”

쿠션에 얼굴을 묻은 시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잘 자고 일어나서 몸과 머리는 참으로 편안한데 마음이 무겁다. 진짜 에반의 얼굴 어떻게 보냐고. 거기다 자두가 떠올랐다. 갑자기 왜 자두를 가져오는 것일까? 더군다나 자두의 맛은 익히 제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맛이었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자두 맛과는 확실히 달랐다.

많은 생각이 또 머릿속을 채웠지만 더는 미적거릴 시간이 없는 시우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하던 스트레칭 같은 것을 할 여유도 없었다. 곧장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은 시우는 부스 안에 들어가자마자 치약을 칫솔에 묻혀 입에 물고는 물을 틀었다.

“으으으…….”

갑자기 찬물을 맞은 시우는 얼른 옆으로 물러나며 물 온도를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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