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92화 (92/187)

92화

내려놓으면 편하다.

시우는 어려운 문제라도 푸는 것같이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는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만지고 있는 에반을 쳐다보았다.

다양한 디자인의 우정 링으로 둔갑한 커플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앞에 있는 직원분은 하나하나 보이면서 디자인을 설명하고 있었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인 채 고개를 끄덕이는 에반을 보자니 속이 아려 왔다.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으니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 무슨 생각으로 에반이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알 만했다.

촬영 중이긴 했지만 에반과 시우는 평범한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를 따르고 있었다.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고 저녁을 함께 먹고, 커플링을 고르면서 서로의 미래를 그리는 연인의 모습.

이렇게 우정 링을 사는 것이 방송에 나간다면, 에반과 시우가 그 반지를 꾸준히 끼고 있어도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하겠다는 거겠지. 가장 포장하기 좋은 명칭이 우정이니까.

“나 왼쪽 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기에 시우는 제 의견을 말했다. 방송을 핑계로 산다 할지라도 마음에 드는 것을 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시우는 액세서리를 참으로 좋아했다.

“이거?”

어떤 무늬도 디자인도 없는 은색의 링이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겉면이 아닌 안쪽 면에 인그레이빙과 원하는 조그만 원석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착용한다면 에반은 제게 이것을 뺄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반지와도 어울릴 만한 심플한 디자인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응.”

자신이 고른 반지를 에반이 집어 들자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는 건데? 그냥 내 반지는 내가 끼고, 네 반지는 네가 끼면 안 되는 거니?

오른손도 아니고 왼손이 에반의 손에 잡혔다. 그리고 반지를 든 에반의 손이 시우의 손으로 다가왔다.

이 장면을 자세히 찍기 위해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착각할 뻔했다.

촬영인데 왜 촬영 같지 않을까? 숨을 쉬어야 하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거지?

에반의 손끝은 시우의 약지가 아닌 새끼손가락으로 향했다.

“…….”

그제야 숨을 죽인 한숨이 시우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왔다.

새끼손가락에는 확실하게 큰 반지가 빠져나가고, 이번엔 에반의 손이 약지로 향했다.

“여기가 딱 어울리겠네.”

심장이 미친 듯이 떨리고 이상한 기분에 시달리느니 시우는 이 상황을 강하게 이겨 내기로 마음먹었다. 에반의 손끝이 허공에 멈춘 틈을 타 집게손가락을 반지의 구멍 사이로 쑥 집어넣었다.

내가 오늘 새끼손가락과 집게손가락에 반지를 끼지 않은 것이 신의 한 수였구나. 왼손엔 중지와 엄지에만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어쨌거나 약지에 반지를 끼는 일은 피했다.

“봐. 사이즈도 딱이야.”

왼쪽 손끝을 잡은 에반의 손을 털어 내고는 집게손가락에 예쁘게 자리 잡은 반지를 보여 주기 위해 손을 카메라로 향했다. 그러고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반지가 잘 보이도록 했다.

“그럼 에바니는 어느 손가락에 잘 어울릴까.”

묘한 상황, 이상한 분위기가 되기 전에 움직이기로 마음먹은 시우는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로 직원이 내미는 반지를 받아 들었다. 확실히 제가 낀 반지보다 컸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에반의 손을 보던 시우는 이내 반지를 다시 직원에게 건넸다.

“에바니는 새끼손가락이 좋을 것 같아요. 작은 사이즈로 주세요.”

우정 링이다. 어느 손가락에 끼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장신구를 좋아하지 않으니 새끼손가락에 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 같았다.

직원이 건네는 조금 작은 사이즈의 반지는 이내 에반의 새끼손가락에 자리 잡았다. 에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 것 같았지만, 시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 이쁘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촬영은 우정 링을 나눠 끼는 것에서 끝났다. 둘은 우정 링을 낀 손을 카메라에 보여 주면서 형식적으로 우리 우정 변하지 말자 이런 말도 해야 했다.

‘Ocean Story’는 리얼리티를 추구했지만, 아주 기본적인 틀은 있었다. 거기다 오늘 취지가 친해지길 바라였으니 친해졌다는 것을 보여 주면 되었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한 촬영 팀께 인사를 끝낸 시우는 지금껏 흐트러질까 만지지 못했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대환이 앞서 걸었고 시우는 에반과 나란히 그를 뒤따라 걸었다.

“피곤해?”

머리를 쓸어 넘긴 후, 목을 가볍게 돌리면서 걷던 시우는 살짝 고개를 꺾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둘이서 촬영해서 그런가 긴장을 했나 봐. 완전체였으면 분량도 많이 나왔을 거고, 그러면 안 되긴 하지만 조금 뒤로 빠져 있어도 되는데, 오늘은 못 그랬잖아.”

그렇게 쳐다보는 것도 잠시, 다시 대환을 따라 걷던 시우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커다란 손이 제 어깨를 잡고는 주물렀기 때문이었다. 기차놀이 하듯 에반은 시우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린 채 걸었다.

“아~ 시원하다.”

에반이 간지럽지도 아프지도 않게 손끝으로 시우의 어깨를 꾹꾹 누르자, 시우는 몸의 힘을 빼고 그에게 제 몸을 맡겼다.

“좋아?”

“응.”

반은 자력으로, 반은 에반이 밀어주는 힘으로 걷던 시우는 대환이 밴의 문을 열어 주자 얼른 올라탔다.

“손.”

안전벨트를 매고 났더니 대번에 손을 달라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환이……. 아직 차에 탄 것 같지는 않지만 이제 곧 그가 운전대를 잡을 것이다. 시우는 대답 대신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다.

아니. 완벽한 비밀은 있다. 그리고 현재 시우는 그런 비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건 단지 제가 말을 하지 않아서, 표현하지 않아서. 아니 술을 먹고 가끔 말했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는 허무맹랑한 얘기라서 비밀로 묻혀 버린 진실이었다.

혼자만 간직한 비밀은 영원할 수 있지만, 둘이서 나눈 비밀은 언제 밝혀질지 모른다.

그리고 인간이 숨길 수 없는 세 가지는 가난, 사랑, 재채기라고 했다.

조금도 숨길 의지 같은 것이 없는 에반과 함께라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손.”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금 에반은 제게 손을 달라고 했다. 그가 제게 내민 왼손 새끼손가락에서 은색 링이 반짝였다.

“갑자기 왜 손을 달래.”

그 말을 하는 순간 운전석 문이 열리고 대환 형이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이 열리고 닫히면서 안의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는 순간 시우는 살짝 코를 실룩거렸다. 방금까지 느끼지 못하고 있던 향이 훅 끼친 것이다.

달콤한 향.

그 향을 느끼는 순간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그리고 지금껏 에반이 아닌 창밖을 향해 있던 시우의 고개가 그에게로 돌아갔다.

“이제 손 줄 거야?”

싱긋 웃는 에반을 향해 시우는 홀린 듯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시우의 손바닥 위로…… 자두 한 알이 올라왔다.

자두 한 알.

별것 아닌 과일. 순간 시우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아랫입술을 이로 꾹 깨물었지만, 떨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제게 힘드냐고 물어도 늘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프냐고 물어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몇 시간을 연습실에서 춤만 추다 보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이면서 차가운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그럴 땐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상쾌했고 뿌듯했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는 만큼 퍼포먼스가 더 완벽해졌으니까. 그러니 그런 힘듦은 괜찮은 것이다.

당연히 아플 때도 있다. 감기에 걸릴 때도 있고, 근육통에 시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괜찮았다. 약을 먹으면 되고 휴식을 취하면 나았으니까. 그러니 괜찮은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왈칵하고 밀려드는 감정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꾹꾹 누르고 누르며 무시하고 덮어 놓은 것들이 거침없이 솟구쳐 올랐다.

그립다. 에반이 보고 싶다.

바로 앞에 그가 있는데 보고 싶다. 제 팬이라고 말하며 프로필을 줄줄 읊던 에반이 그립다. 제게 자두를 한 알씩 건네주고, 해장국을 사 두고 가던 에반을 느끼고 싶다. 큰 손으로 작은 옹이를 쓰다듬으며 제가 부엌에서 움직이는 걸 눈으로 쫓던 그가 여기 있으면 좋겠다.

내 앞에 있는 에반이 그 에반이면 좋겠다.

나만 간직한 이 기억, 그도 알았으면 좋겠다.

평생 혼자 끌어안고 살기엔 너무 아프다.

“코코.”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볼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그가 갑자기 우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지만 이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눈물이 잠깐 걷힐 때 본 에반의 얼굴이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 하긴 앞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울어 버린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에반이 다시 자두를 집는 순간 시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두를 그에게 뺏길 수 없었다. 그가 준 자두지만 다시 그가 가져갈까 두려웠다. 시우는 자두를 움켜쥔 손을 망설임 없이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입 안으로 자두를 밀어 넣었다.

깨무는 순간 달콤하고도 새콤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시원한 자두즙이 쓰다. 너무 쓰다. 목이 메고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시우는 꾹꾹 씹었다.

“그러지 마. 제발. 시우야.”

커다란 에반의 두 손이 시우의 볼을 감싸도 시우는 얌전히 있었다.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면서도 눈을 깜박일 때면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졌다. 낮고 조용한 에반의 음성이 시우의 귓가에 닿았다.

감정 동화.

시우는 아주 가끔 에반의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너무 강렬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엔 그런 적이 없다. 회귀한 이후엔 그렇게 격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에반의 기분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은 들었지만, 그런 강렬한 공유를 경험하지 못했다.

“…….”

부드럽게 녹아내리던 자두가 사라지고 입 안엔 딱딱한 씨 한 알이 남았다. 그리고 자두가 조금씩 입 안에서 사라지는 것과 비슷하게 시우의 눈물이 천천히 말라 갔다. 시우는 눈을 감았다. 눈에 열이 몰려 홧홧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시우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울고 있는 에반의 얼굴이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