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카페에서 촬영해야 할 분량은 음료를 마시면서 제작진이 내준, 서로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사이 그리 중요치도 않은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서로의 음식 취향 알아보기?”
봉투를 열고 카드에 적힌 말을 다 읽은 에반이 한쪽 눈썹을 움직이더니 카드를 제작진에게 반납했다.
“취향요? 음식 취향?”
시우는 검지 끝으로 에반과 자신을 가리키며 카드 내용을 확인했다. 오후 시간을 카페에서 보낸 이후 지금 있는 곳은 한강과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고층에 자리한 레스토랑이었다.
“네.”
“어쩐지 좀 전에 음료만 마시고 디저트를 못 먹게 하더라니.”
에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고 시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망고빙수를 주문한다더니 실제로 그가 받아 온 음료는 레모네이드 한 잔과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이었다.
그리고 그리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에반이, 레모네이드는 시우가 마셨다.
“아! 그래서 음료만 가지고 왔던 거네.”
시우는 제 앞에 놓인 고급스러운 메뉴판을 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디저트류를 먹었다면 이렇게 저녁을 먹을 순 없을 것이다. 찬찬히 메뉴판을 보던 시우의 눈이 커졌다. 이게 도대체 얼마야?
가격이 좀 나갈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제 생각을 뛰어넘는 가격에 그의 시선은 절로 제작진에게 향했다.
“서로의 취향을 확인하라고 했는데, 그냥 먹고 싶은 것 다 주문하면 되죠?”
차마 이 비싼 걸 어떻게 먹냐는 말을 시우가 하기 전에 에반이 말을 꺼냈다.
“네.”
“저희가 뭘 시킬 줄 알고요? 막 캐비어 이런 거 시켜도 돼요? 푸아그라 막 이런 거?”
시우는 방금 봤던 메뉴 중 비쌌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네. 뭐든 먹고 싶은 것으로 주문하세요.”
“나중에 뭐라고 하시기 없어요.”
건성으로 메뉴판을 뒤적거리던 에반이 메뉴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일단 스테이크, 양송이수프. 샐러드는 뭐가 좋을까. 그냥 코스가 나으려나?”
시우는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금 메뉴를 확인했다. 솔직히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읽기도 어려운 음식명 아래에 설명이 적혀 있지 않았다면 뭐가 뭔지도 모를 수준이었다. 한 끼에 수십만 원을 쓰는 건 시우의 취향이 아니다.
“코스도 괜찮은데, 맛있는 것들 골고루 시켜서 맛보는 것으로 할까? 캐비어샐러드, 푸아그라 뭐 이런 것들로. 스테이크도 티본이 괜찮겠네.”
에반이 줄줄 나열하던 음식을 찾아보던 시우는 테이블 아래에서 그의 발을 툭 건드렸다. 진짜 겨우 저녁 한 끼 먹는 걸 촬영하는 데 수백 쓸 생각이니? 티본스테이크는 양부터 많았다.
“저희 와인 먹어도 되죠? 일단 티본으로 할 거면 레드 와인이 좋겠고. 코코, 샴페인?”
방금 그러지 말라고 테이블 아래로 신호를 줬건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에반의 메뉴 선정이 이어졌다. 더군다나 그가 읊은 와인을 찾은 시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주요리보다 와인이 비쌀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촬영 중이란 말이다.
에반 루이스. 네가 엄청난 재벌가 아들인 건 알지만, 우리가 왜 지금 ‘친해지길 바라’ 같은 걸 찍으면서 이러고 있는 거니?
“나 그냥 등심스테이크.”
시우는 그나마 이 중에서 합리적인 가격이라 생각되는 것을 말했다.
“그럼 등심스테이크도 하나 추가할게요.”
왜 늘어나는 거지? 분명 당황해야 할 것 같은 감독님은 에반이 읊는 메뉴를 들으면서도 태연했다.
“그런데 우리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시우가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주문이 들어갔다. 해가 늦게 지는 늦여름이었기에 이제야 창 너머로 짙은 석양이 드리웠다.
“취향 찾으라니까 일단 먹어 보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겠지.”
“우리 취향 대충 알잖아.”
음식 취향이라는 건 대충 불곱창에 소주, 치킨에 맥주, 오겹살에 소맥. 뭐 이런 거 찾는 거 아니었어? 돈가스김밥보다 새우김밥, 콜라보다 사이다, 물냉보다 비냉, 칼국수보다 수제비. 이런 거 말이야.
“그럼 두 분, 음식 나올 동안 이것도 작성해 주세요.”
제작진은 이번에도 둘에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걸 받은 시우는 작게 웃고 말았다. 방금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적혀 있었다.
짜장면 vs. 짬뽕, 군만두 vs. 물만두, 부먹 vs. 찍먹.
음식 선호부터 세기의 난제까지 참으로 골고루 있었다.
“이거 뭐예요. 짜장면 vs. 짬뽕? 저 짬짜면인데…….”
솔직하게 대답했다. 짬짜면 같은 아주 합리적이고 올바른 선택권이 있는데, 왜 굳이 짜장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하냔 말이다.
“그럼…… 옆에 그렇게 적어 주세요.”
“부먹 vs. 찍먹이요. 저 탕수육 반만 소스 그릇에 넣거든요? 반은 그냥 바삭하게 간장 소스에 찍어 먹으려고 안 넣는데, 그것도 그렇게 적어요?”
“……취향이니까요.”
시우의 질문에 조금의 시간 텀이 있었지만, 감독님은 뭐든 편하게 적으라는 말을 남겼다.
“에바나.”
“응?”
“너 물냉 먹고 나 비냉 시켜서 나눠 먹는 건 그리 적으면 되겠지? 혼자 먹을 때가 문제지 여럿이서 먹을 때는 전혀 문제 되는 것들이 아닌데.”
테이블에 종이를 놓고 펜 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면서 정말 진지하게 질문을 하는 시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에반은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지금 이 유닛 촬영은 찬과 자신의 작품이었다. 먼저 제안한 것은 찬이다.
팬들의 니즈도 충족하고, 둘이서 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 주고자 했다.
흔히 다루는 주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제 사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시우가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서로에 대해 알아보자는 말도 안 되는 설문지를 했다.
그리고 이 레스토랑은 티본스테이크와 와인이 유명해서 같이 먹고 싶어서 코스에 넣었다. 그러면서 시우의 음식 취향을 확실히 알고자 또 설문지를 만들었다.
아이돌이라면 누구나 흔히 하는 수많은 설문지와 다를 것이 없었기에 시우는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지금껏 에반은 단 한 번도 이런 설문지에 솔직하게 답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제가 뭐라고 체크했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대충 그냥 그때 보이는 것에 체크를 했다.
하지만 모든 질문에 성심성의껏 열심히 답하는 시우의 모습을 보니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제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다.
“그렇게 적으면 되겠네.”
제 대답을 기다리며 시선을 맞춘 채 눈을 깜박이고 있는 시우를 마주하고 있자니 또 심장이 요동쳤다.
내 사람이다, 내 오메가다, 내…… 전부다. 이렇게 외치고 싶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두고 혼자만 보고 싶다.
세상 좋은 것만 주고,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좋은 것만…….
“그렇겠지?”
제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문지에 열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에반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 * *
산 넘어 산이구나.
푸아그라니 캐비어샐러드니 하는 생소한 음식부터 티본스테이크까지 실컷 먹은 시우가 그다음 도착한 곳은 명품 거리 한가운데 있는 매장이었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근접 촬영을 하고 맛을 보고 그러느라 촬영 시간이 길어졌다.
영업 종료 후 시간을 촬영을 위해 대여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말이다.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장신구를 보고 있을까? 시우는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친해지길 바라’라며.
친구들끼리 친해지는 방법은 참으로 많잖아. 같이 농구를 해도 되고, 게임을 해도 되고, 만화책을 본다든가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면 대부분 서먹한 사이도 웬만큼 친해졌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요즘 핫하다는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여 우아하게 칼질을 하고. 다음 코스가 명품 매장인 거니?
“어떤 게 좋을 것 같아?”
눈앞에 즐비하게 놓여 있는 귀걸이, 팔찌, 목걸이, 반지 들을 보자 아득해졌다.
“아니. 뭘 굳이 이런 걸 해.”
“우정 템 하라잖아.”
꽤 심각한 표정으로 이것저것을 살펴보는 에반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팀 내에서 가장 친하면서도 티격태격하는 것으로 유명한 예찬과 찬도 이 비슷한 것을 유닛으로 촬영하긴 했다.
두서없이 닥치는 대로 그들의 활동을 담은 영상들을 보았을 때, 이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도 이런 코스였나? 가끔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의 기억들이 복잡하게 뒤섞일 때면, 어느 것도 확실하게 단정 짓지 못할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그들도 비싼 장신구를 주고받았던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았다.
“티셔츠 같은 건?”
“반지 할까? 우정 링?”
우정 링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너와 내 사이가 우정 링을 낄 사이냐? 우정 링을 빙자한 커플링 찾는 거 아니야?
속에 있는 마음을 솔직하게 내뱉지 못한 시우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에반의 한마디에 다른 장신구들은 멀어지고 반지들이 앞으로 소복이 모였다.
예쁘긴 하다. 그 긴 시간 동안 커플링 같은 것도 안 해 보고 난 뭐 했나 몰라.
“귀걸이는 어때?”
“우리 귀걸이 취향이…….”
팔짱을 끼고 말하는 에반을 본 시우는 혀끝을 살짝 내밀고는 가볍게 깨물었다. 지금도 주렁주렁한 귀걸이를 착용한 자신과 다르게 에반은 딱 붙는 스타일의 간결한 것을 하고 있었다.
촬영 때는 대부분 스타일리스트들이 챙겨 온 것들을 하기에 다양한 것들을 착용했지만, 에반의 취향대로 한다면 무조건 심플한 것이었다.
“팔찌?”
시우는 자신의 왼손을 들고는 짤짤 흔들었다. 여러 개 겹쳐진 팔찌들이 화려한 매장의 빛을 반사시켰다. 그러자 말없이 에반이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보였다.
묵직한 시계가 자리 잡은 걸 보니 할 말이 없다.
“……발찌?”
“잘 보이는 반지로 하자.”
반지만 아니면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말을 하던 시우는 단호한 에반의 말에 지금껏 내놓고 있던 혀끝을 쏙 집어넣었다. 더 이상 반박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