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90화 (90/187)

90화

숙소로 돌아간 시우는 샤워 후 옷장을 뒤적거렸다.

촬영이니까 너무 편하게 입어서는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캐주얼한 주제를 많이 다루는 ‘Ocean Story’에서 너무 갖춰 입는 것도 불편할 것 같았다.

얇은 소재의 검은 슬랙스에 오버사이즈 흰 셔츠를 선택한 시우는 각종 액세서리가 있는 화장대 앞으로 향했다.

은색의 귀걸이를 하고 얇은 팔찌 여러 개를 왼쪽 손목에 착용했다.

허전한 손가락엔 반지 몇 개를 꼈다.

“그러고 가게?”

“긴소매이긴 한데 얇아서 괜찮을 거 같아요. 더우면 좀 걷으면 되고. 그런데 이 날씨에 뭐 밖에서 촬영할 거예요? 상준 형이랑 하면 대부분 실내 촬영 아녔어요?”

“뭐 대부분 실내 촬영이긴 하지.”

숍에서 머리를 하고 메이크업을 받을 때도 시우는 별생각 없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뭐 해?]

[유닛 촬영 준비 중.]

에반의 메시지를 확인한 시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혹시나 그가 답을 기다릴까 냉큼 답을 보냈다.

[옷 뭐 입었어?]

[검은 슬랙스에 흰 셔츠.]

[밖에 더워.]

[이 날씨에 설마 야외 촬영을 하겠어? 정 더우면 팔 걷어야지 뭐. 무슨 촬영인지 알아?]

“시우 씨. 지령받으세요.”

한창 에반과 메시지를 주고받던 시우는 메이크업실 문이 열리고 카메라 감독님과 작가님들 그리고 저를 향해 봉투를 내미는 감독님을 바라보았다.

“아! 촬영 시작이에요?”

환하게 웃으면서 두 손으로 봉투를 받은 시우는 카메라 대신 감독님을 바라보았다.

“지령 확인하시고 읽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시우는 봉투를 열고 안에 든 카드를 꺼냈다.

-부디 친해지길 바라.

앞으로 여섯 시간 동안 팀 내 가장 서먹한 사람과 친해지기 위한 미션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제시한 모든 미션을 클리어하면 충분한 보상이 주어질 테니 적극적으로 임해 주세요.

오늘 당신이 친해져야 할 사람은 에반입니다.-

깔끔하게 타이핑된 종이가 붙은 카드를 읽은 시우의 입꼬리가 불안정하게 실룩거렸다.

이거 미친 거 아니야?

에반 루이스! 이거 네 짓이지!

시우는 입 안에 고인 침을 꿀떡 삼켰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으로 카드를 한 번 더 읽은 시우는 이번엔 소리를 내 카드를 읽어야 했다. 시청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줘야 했으니까.

“저 에반이랑 친한데요.”

우리 입술도 비비는 사이인데요. 뭐가 서먹한 사이라는 겁니까? 입술 비비는 사이가 서먹하면, 절친이면 아우, 큰일 나겠네요.

다 읽은 카드를 시우는 다시 감독님께 건넸다.

“그런데 미션은 뭐예요? 보상은 당연히 말씀 안 해 주실 거잖아요.”

한두 시간도 아니고 여섯 시간이나 둘이서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럼 첫 번째 미션입니다.”

시우는 감독님이 건네는 새로운 봉투를 받았다. 봉투를 열고 카드를 꺼내는 시우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조용한 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세요.-

이거 친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 맞나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장소 이동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며 감독이 재촉했다. 그의 말에 시우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일어났다.

카메라가 잡히지 않는 사이 시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거 뭔가 불길한 냄새가 난다.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런데 저 어디로 가요? 아직 에바니를 만나지 못했잖아요. 뭘 만나야 친해지든지 멀어지든지 하죠.”

“에반도 지금 약속 장소로 이동하고 있답니다.”

1층으로 내려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밴의 문이 열렸다. 진짜 이거 뭐 하자는 거냐고. 차에 오르긴 했지만, 시우는 찝찝한 기분을 쉽게 떨쳐 내지 못했다.

“근데 감독님. 이거 누가 기획했어요?”

“내가.”

“엑? 왜요?”

차라리 에반이 하자고 했다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텐데,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감독님이라고 말씀하시기에 시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매회 방영하고 나면 댓글로 너랑 에반이 유닛 촬영 요청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너희 둘 불화설은 유명하잖아. 곧 2집 나오는데, 그건 좀 접고 가야지. 그냥 우리 휴식기 동안 많이 친해졌습니다, 이런 거 보여 주라고.”

“그럼 말씀을 해 주시지. 뭘 또 이렇게 갑작스럽게 해요. 전 오늘 상준 형이랑 유닛 하는 줄 알았죠.”

“다 알면 재미가 없잖아, 재미가.”

“일정이 어떻게 돼요?”

“비밀.”

너무나도 당당하게 비밀이라고 말하는 감독님을 보며 시우는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그렇게 쉬는 것도 잠시, 차 안에서 카메라가 다시 돌기 시작하자 시우는 허리를 펴고 제대로 앉았다.

“저희 진짜 친하거든요. 굳이 이런 거 안 해도 되는데. 어, 음, 에바나! 우리 오늘 잘 지내보자?”

에반을 만나러 가는 길, 시우는 설렘을 담은 멘트를 해야 했다. 물론 그건 연기였다. 설렘은 개뿔. 마치 지옥 불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우리 평범하게 그렇게 촬영하자.

나, 이 촬영 무사히 제대로 할 수 있겠지? 시우는 착잡함에 손끝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계속 두드렸다.

[너. 알고 있었지?]

[뭘?]

[지금 촬영.]

[나도 몰랐어. 방금까지 사무실에 있다가 끌려 나왔는걸.]

촬영 준비가 끝난 조용한 카페의 의자에 편히 앉은 에반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메시지만으로도 시우가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 어디야? 이거 일정 어떻게 돼? 나한테는 말 안 해 줘도 너한테는 말해 줄 아니야.]

[코코.]

[왜!!!!!!!!!!!!!!!]

‘왜’라는 단어 뒤에 붙어 있는 느낌표에 결국 에반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음성 지원이 되는 것 같지. 더군다나 자신을 올려다보며 동그란 눈을 깜박이는 장면까지 연상되어 버리자, 한 손으로 계속해서 실없이 올라가는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그냥 촬영이야, 촬영.]

[그래, 촬영이다. 너 이상한 짓 하기만 해 봐.]

[너 들어오는 거 보이네. 조금 이따 보자.]

시우는 에반의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휴대전화 액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에반의 말대로 그냥 촬영이다. 그러니까 더 불안한 거라고. 그나마 다행인 건 편집이 있다는 것일까? 정말 도착한 것인지 곧 밴이 멈췄다.

차에서 내린 시우는 고개를 들어 위부터 바라보았다.

2층 테라스에 서서 자신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드는 에반을 보는 순간, 방금까지 부글거리던 속이 싸하게 풀려 버렸다. 그 잘생긴 얼굴이 밝은 햇살에 빛이 났다. 후광이 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 거다.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던 시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싹 걷혔다.

누가 이거 우연이라고 해 줘.

테라스에 서 있는 에반은 검은 구두를 신었고, 검은 슬랙스를 입었으며,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둘의 차이점이라고 꼬집어 말하자면, 정장 느낌으로 갖춰 입은 에반에 비해 시우는 캐주얼한 차림이라는 것 정도.

같은 점이라고 말하자면 둘 다 같은 구성으로 입었다는 것이었다.

이거 누가 봐도 커플 룩이잖아.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촬영이 피곤하게 다가오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안녕.”

“안녕.”

“……뭐 마실래?”

촬영을 위해 카페 전체를 빌린 것인지, 직원만 있는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 시우는 에반과 마주 보고 선 채,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어색하다.

그래서 가장 무난해 보이는 뭐 마실래, 를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시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간지럽다. 간지럽다. 이 오글거림 어떻게 하지?

“내가 갔다 올게.”

자신의 어깨를 한 손으로 꾹 잡았다 놓으며 제 옆을 지나쳐 1층으로 향하는 에반의 뒷모습을 보며 시우는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망고빙수!”

그러고는 잊지 않고 에반이 좋아하는 것을 주문했다.

“어? 너 망고빙수 잘 안 먹잖아.”

계단으로 내려가다 말고 에반이 멈춰 선 채 되물었다.

“네가 좋아하잖아.”

너 망고 좋아하잖아. 그래서 망고빙수 잘 먹는다고 분명 회귀 전 그가 한 인터뷰에서도 봤고, 실제로 같이 망고빙수를 먹기도 했었다.

“그래. 넌 레모네이드?”

“아니. 오늘은 아아가 필요해.”

달달한 레모네이드 대신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다.

1초가 10분 같다.

“우리 이제 뭐 하면 돼요?”

1층으로 내려갔던 에반이 올라오고 둘은 창가에 앉았다.

감독님은 말 대신 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뭣 하는 짓이야. 음료를 사이에 두고 시우와 에반은 무언가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었다. 서로를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아는지 테스트를 한단다.

진짜 유치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열심히 답을 써 내려가던 시우의 손이 멈췄다.

-에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고개를 들어 제작진을 바라보았다. 이 질문들 자체가, 지금 찍는 설정 자체가 모두 그런 것들이었다. 얼마나 친한지 적으라니.

-나.

시우는 당당하게 적었다. 정답이 아닐 테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팬들이 원하는 건 이런 것이었다.

꼼꼼하게 질문에 답을 하던 시우의 손이 테이블로 향했다. 제가 당당히 아아라고 말했지만, 시우의 손은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아닌 그 옆에 있는 레모네이드로 향했다.

빨대를 입술로 물고 살짝씩 흔들면서 레모네이드를 마신 시우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별로야.”

더운 날씨에 레모네이드만큼 완벽한 음료는 없다고 생각하는 시우였다. 그랬기에 여름엔 늘 레모네이드를 달고 살 듯이 했다. 평소라면 즐기면서 먹었을 레모네이드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맛없어? 다른 거 먹을래?”

“딱히. 네 집에서 먹었던 레모네이드 먹고 싶다. 그거 진짜 개꿀맛인데.”

촬영 중이긴 했지만, 에반도 시우도 편하게 말을 했다.

“가져다 달라고 할게.”

“응?”

에반을 보지 않은 채, 종이에 시선을 두고 대화를 주고받던 시우는 이상함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앞에 앉은 에반은 벌써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