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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89화 (89/187)

89화

안 취했어. 안 취했다고.

뺏긴 잔을 찾아오기 위해 시우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하지만 술잔은 제게서 멀어져 에반의 앞에 안착했다.

지금이 기회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확실하게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촬영 때문에 이뤄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키스 이전 원래 콘셉트대로 찍을 때 에반의 뽀뽀까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너.”

“응.”

“나 알은척하지 마.”

“충격인데?”

시우의 엄청난 협박에도 에반은 피식 웃으며 제 앞에 놓인 소주잔을 비워 냈다. 충격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알은척하지 말라고.”

“진짜?”

“남들이 알면 어떡해? 난 그런 거 싫어. 너랑 나랑 해. 우리 둘이만 해.”

“비밀 연애가 하고 싶다는 거야?”

“응!”

에반의 기준으로 시우는 술이 세지 않았다. 주는 대로 날름날름 고기도 잘 받아먹고, 멤버들과 이야기도 잘했다. 그러면서 술도 잘 마시고.

그 결과 지금 시우의 두 볼은 발그스름했고, 동공은 평소보다 커져 있었다. 스스로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살짝씩 흔들렸다.

비밀 연애를 하고 싶냐는 말에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것을 보니 그저 웃음만 났다. 이런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테이블 아래로 둘의 발은 맞닿아 있었다.

“내가 널 어떻게 이겨.”

처음 다시 만났을 땐, 시우에게서 페로몬을 느끼는 것도 그의 감정을 읽는 것도 어려웠다. 예전만큼 명확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술 취한 시우에게선 자신을 자극하는 자두 향이 강하게 풍겼다.

“코코.”

“응?”

테이블에 턱을 괸 시우가 살짝 고개를 젖히면서 에반을 바라보았다.

“예뻐.”

“맨날 예쁘다고만 해. 그래! 예쁘다. 진짜 예쁘지?”

술 취한 거 확실하구나. 평소의 시우라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로 말갛게 쳐다보던 이의 외모가 변했다.

화려한 백금발에 새파란 눈동자, 짙은 화장. 완전 다른 사람 같지만, 그는 시우였다. 에반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갈증이 더 심해졌다.

맛있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두가 먹고 싶다.

바로 앞에 있는 자두가.

“형, 우리 먼저 들어가래요. 스태프들은 더 마신다고. 다 먹었죠? 시우 형은 취했나? 형, 괜찮아요?”

건너편이 아닌 옆자리에 앉으려 했다. 살짝씩 흔들리는 시우를 그가 취했다는 핑계로 안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움직인 건 해맑은 예찬이었다.

예찬의 손이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는 시우의 어깨를 잡자,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그의 시선이 예찬에게 닿았다.

그리고 또 웃는다. 괜찮다며 일어났지만 살짝 비틀거린 그를 예찬이 감싸 안았다.

“내가 형이 취했다고 인정하는 꼴을 못 봤지. 어서 가요.”

예찬이 시우를 데리고 나가는데도 에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순간 짜증이 밀려 올라왔다. 시우는 비밀 연애를 원한다. 그렇다는 건 이런 상황을 숱하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에반은 자리에 선 채로 소주잔을 또 비웠다. 그리고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그들을 따라가는 에반의 얼굴엔 짙은 짜증이 깃들어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겠다, 방법을.

* * *

“둘이 뭐 하냐?”

“뭐가요.”

지친 몸을 의자에 편하게 묻은 에반은 찬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그가 뭘 묻는지 알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 기분으로는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너랑 시우.”

“우리가 왜요?”

지금 이 밴에는 에반과 찬 둘뿐이었다.

에반이 뒤따라 음식점 밖으로 나갔을 때는 토끼같이 요리조리 기를 쓰고 피해 다니던 시우가 예찬, 상준과 함께 다른 차로 먼저 떠나 버렸다.

“우리? 우리? 영국에서부터 좀 거시기한 거 같아서 그러지. 예전에는 아예 둘이 서로를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더니만, 아까 보니 아주 꽁지 빠져라 너 피해 다니던데, 그거 아까 촬영 때문에 더 그러는 거냐?”

사투리 억양이 섞인 찬의 뼈 있는 말에 에반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런 질문을 하면서도 찬은 제가 아닌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는 리더로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지금껏 리더는 제가 해 왔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번에는 찬이 리더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에반은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기기보다 가장 적합한 사람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배려심, 이해심, 포용력까지. 늘 한 발 뒤에 있는 것 같아도 그는 모든 것을 꿰고 있었다. 그리고 적합한 타이밍을 노려 이렇게 대화를 이끌 줄도 알았다.

“아마도 그런 거 같죠?”

“말이나 해 주고 그러지 그랬냐. 시우가 덤덤한 거 같아도 예민하잖아. 너한테 한마디 들었다고 애가 이 악물고 거의 이틀을 밤새우다시피 해서 퍼포먼스 완성하는 거 보니 크, 인간이 아니다 싶더라. 아까 것도 분명 놀랐을 텐데, 분위기 이상해질까 봐 아무 말도 안 하고. 니가 좀 잘해, 인마.”

“그러려고 하는데. 계속 마음이 앞서서 매번 이렇게 만드네요.”

에반은 씁쓸한 표정으로 괜히 손바닥을 제 허벅지에 비볐다. 바로 며칠 전. 시우가 제 허벅지 위에 있었다. 작은 몸에서 일렁이던 그 감정들. 붉어진 얼굴과 불규칙한 숨소리.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페로몬을 느꼈다.

달다 못해 자신의 뇌를 절여 버린 것 같은 짙고 유혹적인 향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뻔했다. 명훈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그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되살아나는 감각에 에반은 마른세수를 했다.

“어쨌거나 좀 친해진 것 같은데, 또 어색해지면 뭣하니까. 그래서 내가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둘 다에게 서프라이즈를 해 주고 싶었지만, 너한테만 일단 귀띔해 줄게.”

음식점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적당히 취한 찬과 에반의 심도 깊은 대화가 밴 안에서 이루어졌다.

주로 찬이 이야기하고, 에반이 들었으며, 운전 중이던 매니저 대환이 간간이 끼어들었다.

* * *

“무슨 촬영인데요?”

스케줄이 없는 날은 늘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시우는 갑자기 촬영이 있다며 자신을 데리러 온 대환을 따라나섰다. 며칠 후 2집 공식 발매일이 잡힌 가운데, 원만한 컨디션을 위해 연습량은 조금 더 여유 있게 조절한 상태였다.

단체 안무 연습이 끝난 후, 찬은 계속된 연습으로 피곤한 몸을 풀러 마사지를 받으러 갔고, 상준은 작업실로 향했다. 에반은 사무실로, 예찬은 운동을 하러 갔기에 홀로 연습실을 지키던 참이었다.

“‘Ocean Story’”

대환의 대답에 시우는 얼른 옷을 끌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니 촬영이 있으면 있다고 미리 말을 하든가.

“숙소 잠깐 들러서 씻고 간단하게 옷 챙겨서 숍으로 가면 돼.”

“오늘 주제 뭔데요?”

“가 보면 알지.”

“엥? 그럼 다른 멤버들은요? 예찬이랑 찬이 형은 지금…….”

“유닛 촬영.”

밴에 오른 시우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손으로 털었다. ‘Ocean Sorty’는 주로 완전체로 촬영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유닛 촬영도 이어 갔다. 멤버 모두 스케줄을 맞추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고, 팬들의 니즈를 따르다 보면 두 명이나 세 명이 움직이는 것이 나을 때도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럼 옷도 내 거 입어요? 아까 옷 챙긴다면서요.”

“어. 그냥 날씨에 맞게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편하게 입어.”

“근데 뭐 촬영하는데요? 상준 형이랑 하나?”

“아니 뭐 꼭 주제 알아야 촬영해? 또 어디 맛집 갔다 오거나 그런 거겠지.”

“맛집은 예찬이 전문 아녔어요?”

대환과 대화를 나누며 시우는 대충 머릿속으로 오늘 촬영 때 입을 옷을 떠올려 보았다. 어떻게 어떤 상황으로 회귀를 하든지 제 취향은 대쪽 같았다. 그래서 더 편안한 걸지도.

“참. 너 작사 하고 싶다고 했다며.”

“작사는 무슨. 그냥 뭐…… 끄적거리긴 하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상준과 상의했던 것을 대환이 말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직계 관계자들은 다 아는 내용일 듯했다.

에반도 알까? 문득 에반의 얼굴이 떠오르자 시우는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그와 좋은 관계로 지내는 것, 친밀해지는 것 모두 좋았다. 그래, 충분히 에반과의 연애를 즐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반은 시도 때도 없었고, 도무지 타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제가 피해 다녀야지. 솔직히 둘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데, 갑자기 붙어 지내고 친밀해 보이면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그냥 적당히 같은 그룹의 멤버처럼 지내다가 단둘이 있을 때야 뭐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렇게 지내다가는 비밀 연애가 아니라 공개된 걸 당사자들만 모르는 멍청한 바보 연애를 할 것 같았다.

“그래, 열심히 해 봐. 상준이도 너 도와준다고 하고. 뭐 싱글 내고 싶으면 내는 거고.”

“무슨 싱글이에요. 그냥 조금씩 연습하는 거지.”

과거엔 자작곡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생각만 하고, 지금껏 반복되던 회귀 중 도전하지 않았던 것 중 하나였다.

며칠 전, 상준이 만들어 낸 부드러운 발라드 리듬을 듣는 순간 그 곡에 제 생각을 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상준의 옆에 앉았다.

‘형. 나 있으면 작업하는 데 방해돼요?’

‘딱히 그렇진 않아. 왜? 할 말 있어?’

‘아뇨. 방금 그 리듬이 너무 좋아서.’

‘마음에 들어?’

‘네. 생각해 둔 가사는 있어요?’

‘아직. 이제 생각해 봐야지.’

그렇게 대화가 끊긴 후, 상준은 계속 작업을 이어 나갔고, 시우는 한쪽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해 볼래?’

‘네?’

‘여기 가사 한번 붙여 보겠냐고?’

‘에이, 제가 어떻게 그런 걸 해요.’

‘못 할 게 뭐 있어? 생각나는 대로 붙여 보는 거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시우는 단 한 줄도 써 내려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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