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하지 말자. 하지 마.
그냥 이번 컷 써도 되잖아.
또 무슨 모험을 하려고?
에반의 팔뚝을 잡은 시우의 간절한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뭐 하려고?”
세트장으로 돌아가며 시우는 여전히 잡고 있는 그의 팔뚝을 꾹 누르며 물었다.
“나 믿는다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묻던 시우는 너무나도 태연한 그의 대답에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이쪽으로는 영 불안해서 그렇지. 내가 벌써 당한 것이 두 번이야.
처음은 진짜 실수인 것 같지만, 막대 과자는 확실히 실수가 아니었다.
“솔직히 나도 두 번은 할 자신 없어. 그랬다가 멈출 자신도 없고. 한 번에 끝낼 거니까 놀라지나 마.”
“뭔지 말을 해 줘야 안 놀라지.”
맨발로 물 위를 걷는 장면을 계속 찍어야 하는 시우가 신은 슬리퍼와 에반이 신은 검은 구두가 각기 다른 발자국 소리를 만들어 냈다. 세트장 근처에 다다라 슬리퍼를 벗은 시우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제자리로 걸어갔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긴 다리로 느릿하게 왕좌를 향해 걷는 에반의 뒷모습을 보며 시우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뭘 할 건지 말도 안 해 주고, 한 번에 끝내자니.
평소 버릇대로 입가를 가리거나 입술을 만질 수도 없어 괜히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긴장을 풀었다.
왕좌에 오른 에반의 자세가 변했다.
방금까지 반쯤 드러누워 루시퍼의 키스를 받던 악마는 이제 마치 루시퍼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의자에 똑바로 앉은 그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한 팔로 제 상체를 감싸고 그 팔 위에 팔꿈치를 세워서 댄 그는 손끝으로 자신의 턱과 하관을 받쳤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은 모습. 똑같이 눈을 감고 있었지만, 더 강한 기운이 그 주위를 감싼 것 같았다.
어떻게 다가가야 하지? 분명 다가가 그의 입술에 입 맞추는 건 루시퍼였다. 지금 그의 자세를 봐서는 일단 벌리고 있는 다리 사이에 멈춰 서서 상체를 조금만 숙여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그의 턱을 잡고 살짝 들어 저를 보게 할까?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면서 고개를 꺾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세를 바꿔 버린 에반 때문에 시우는 다양한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에반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녹안이 강한 조명에 반짝이는 것을 본 시우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제가 지금 꾸준히 느끼고 있는, 시원하면서도 싸하지만 한편으로 따뜻함까지 느껴지는 이 향이 에반의 페로몬이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회귀도 반복하고 있는 마당에 베타인 제가 알파의 페로몬을 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뭐가 됐든 에반을 믿어야 한다.
그의 앞으로 다가가면 어떤 힌트라도 주지 않을까?
촬영 준비가 다 됐는지 주위를 둘러본 에반이 다시 눈을 감았다.
“액션.”
석상처럼 앉아 있는 에반에게 다가가는 시우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처음엔 조금만 젖었던 바지는 계속 반복된 촬영 때문에 무릎까지 푹 젖어 들었다. 어차피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쓸 것이기에 바지가 어디까지 젖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자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키스가 아니라 이 소리가 잠든 악마를 깨우겠네. 엉뚱한 생각을 하며 계단을 다 오른 시우는 에반의 앞에 멈췄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
아래로 내리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그에게로 뻗었다. 이미 에반의 손이 그의 턱을 받치고 있다. 그의 턱을 잡아서 자신을 보게 하려고 했는데,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상체를 점차 숙였다.
“…….”
시우는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니. 분명 놀라서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는 에반의 입술에 먹혀 버렸다.
방금까지 잠들어 있던 악마를 깨운 건 루시퍼가 아니다.
악마가 루시퍼를 속인 것이다. 그가 스스로 제게 다가오기를.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악마는 루시퍼를 놓치지 않았다.
미동도 없던 악마는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바로 앞에 있는 루시퍼를 낚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고는 당황한 루시퍼에게 제 숨결을 불어 넣었다.
가녀린 루시퍼의 목덜미와 뒷머리를 한 손으로 감싼 악마의 시선이 정확히 이 모든 것을 훔쳐보고 있는 이에게 닿았다.
“미쳤네.”
상준은 카메라 감독님 옆에서 에반과 시우의 촬영을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카메라를 정확히 노려본 악마의 두 눈에 담겨 있는 것은 경고였다. 루시퍼에 대한 소유욕? 세상을 모두 가진 것처럼 자만하며 타락한 천사는 악마의 손에 들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영혼을 쟁취한 악마는 만족스러우면서도 위험한 경고를 했다. 이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그의 눈빛엔 짙은 색욕이 서린 것 같았다.
“……컷.”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모든 것이 깨져 버리는 얇은 얼음판 위에 아슬하게 서 있는 것 같던 분위기는 감독의 한마디에 깨졌다.
“하아…….”
방금까지 자신의 입술을 덮친 채 입 안을 희롱하던 에반이 사라지자, 시우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이지?
분명 제가 그의 턱을 잡으려 하는 순간 에반이 눈을 떴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제 입술을 짓눌렀다.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큼한 에반의 혀가 밀려들었다. 촬영 중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우가 버둥거리려 했지만, 목덜미와 머리를 잡은 큰 손과 허리를 휘감은 그의 팔에 막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기보다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자신의 목을 받친 그 손과 허리에 닿은 다른 손. 그리고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페로몬이 시우를 사로잡았다.
“괜찮아?”
괜찮고 말고 할 게 아니고. 온몸의 힘이 빠진 시우는 에반의 품에 그대로 안긴 채 가빠진 숨을 골랐다. 그냥 입 맞추는 척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랬고. 물론 에반이 장난을 친다고 살짝살짝 닿긴 했지만, 그건 마치 솜사탕같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장난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너는…… 말은 하고…….”
얼굴에 열기가 몰렸는지 갑자기 더워졌기에 손을 파닥거리며 얼굴의 열을 식히려 했다. 에반과 닿으면 시작되는 열기. 카메라에는 어떻게 잡혔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몇 초? 아니면 몇 분? 시간 감각이 흐릿해졌다.
“대박. 대박……. 완전 쩔어.”
웅성거리는 사람들 목소리 사이로 큰 예찬의 목소리가 튀었다. 박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감탄사가 들리기도 했다.
“너 일부러 그랬지.”
몸을 일으키려던 시우는 여전히 제 허리에 감겨 있는 에반의 팔을 손으로 툭툭 쳤다. 우리 사이는 비밀로 하자고.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는 건 사절이다.
“반 정도는?”
에반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을 한 시우는 에반의 팔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자마자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
에반이 제 뒤를 따르든 어떻든 방금 찍힌 영상을 확인하기 위해 옅은 물이 찬 세트장을 가로질렀다. 누군가가 내민 티슈를 받아 든 시우는 입술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감독님에게로 다가갔다. 이런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감정은 표현하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우린 연기자니까 이 모든 것은 설정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 정도로 여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시우가 무의식적으로 붉디붉은 입술을 티슈로 톡톡 찍어 내는 그 행동이 보진 못했지만, 어떤 상황이 오갔는지를 유추하게 만들었다.
티슈를 입술에 살짝 댄 채, 방금 녹화된 화면을 다 지켜본 시우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분명 에반과 키스를 나눴다. 절대 부드럽지 않은 그런 키스.
하지만 화면엔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다. 나온 것이라고는 제 뒤통수와 강렬한 에반의 눈이 전부였다.
“어때요? 뭐랄까 좀 심심하던 것 커버 됐죠?”
언제 다가온 것인지 바로 옆에서 에반의 목소리를 들은 시우는 게걸음으로 슬쩍 그에게서 멀어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러지 그랬어. 한 번 더 가?”
“아뇨. 그냥 이것 쓰죠.”
감독의 권유에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떴던 시우는 곧바로 이어지는 에반의 대답에 바짝 힘이 들어갔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런데 형.”
에반의 대답에 그러면 다음 촬영으로 넘어가자는 감독의 말이 떨어지고 세트를 정리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란 속에서 시우는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뭐 그리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제게로 몸을 숙인 예찬이 시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뽀뽀했어요?”
“아이고. 이 어린 놈아…… 그게 뭐가 중요해. 잘 나왔으면 됐지.”
예찬의 질문에 입이 쩍 벌어졌던 시우는 갑자기 나타나 예찬의 뒤통수를 툭 치면서 그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가는 찬을 보며 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비밀 연애는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럴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으면 오래 사는 것에도 문제가 생길 것 같다. 지금 시우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티슈로 두드리고 있는 그의 입술에 발려 있던 립스틱이 살짝 번져 있는 것을.
어쩌면 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나 잘했지?”
예찬과 찬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오른손으로 떨리는 왼쪽 가슴을 꾹 누르던 시우의 몸이 또 한 번 파드득 튀었다.
이 모든 일을 만든 원흉.
뻔뻔스레 웃고 있는 잘생긴 낯짝을 보는 순간 시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 해도 되는 거였잖아. 화면에 하나도 안 잡혔더만.”
어금니를 꽉 깨문 시우는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참고 싶지 않아서.”
“뭘.”
딱 붙어서 세트장을 이동하며 시우는 에반과 말을 주고받았다.
“네가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에반의 손끝이 나풀거리는 시우의 상의에 닿았다.
“이 콘셉트 회의 주도한 거 너였거든? 이따 조용히 나 좀 봐.”
“데이트 신청이야?”
분명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자는 뜻으로 말을 했건만, 가볍게 돌아오는 대답에 시우는 팔꿈치로 그의 배를 툭 쳤다. 에반의 작은 웃음소리가 시우의 귓가를 맴돌았다.
다음 세트장에 다다른 시우는 메이트업 아티스트가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자 그리 몸을 틀었다. 그러면서 지금껏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한 번 더 찍어도 됐잖아.”
방금 본 영상은 제가 봐도 괜찮긴 했다. 어떻게 찍을지 알았으니까 재촬영한다면 저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에반이 단칼에 재촬영을 거절했다.
“그랬다가는…… 못 놓아줄 것 같아서.”
조금 뜸을 들여 에반이 대답했지만, 질문만 던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멀어진 시우에겐 그의 대답이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