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86화 (86/187)

86화

세트장에선 ‘루시퍼’가 계속 흘러나왔다.

온통 검은 세트장 가운데 놓여 있는 금색의 왕좌.

혼자 앉기에도 과하게 커 보이는 그 의자로 에반이 다가갔다.

그의 얼굴엔 다시금 지루함과 나태함이 가득 찼고, 다리를 꼬고 나른하게 앉은 자세가 오만해 보였다.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그리고 모든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이 시우에겐 모든 것의 시작점이었다.

왕좌는 넓은 인공 호수 가운데 외롭게 자리했다.

그에게로 다가가는 길. 시우의 맨발에 차가운 물이 닿았다. 아주 얕게 물이 고여 있는 세트장 위를 걷고 있지만, CG를 입힌다면 시우는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바닥의 물이 시우의 바지 끝단을 적셨고, 아래에서부터 조금씩 젖어 들었다. 잔잔하게 깔린 음악 사이로 찰박거리며 물 위를 걷는 시우의 발소리가 불규칙하게 섞였다.

조금씩 그에게 가까워지자 시우의 심장도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냥 촬영이다. 뮤직비디오에 꼭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며, 이 스토리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낼 장면. 하지만 지금 시우는 정말로 악마에게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에반. 그는 제게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 긴 시간을 알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한순간 지나갈 불장난일지, 기억과 가슴에 인이 박여 끝나지 않는 저주의 굴레를 함께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운 좋게 에반과 함께한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모든 틀이 깨어져 버린 상황에선 그 어느 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미 회귀 시간이 변했다. 그리고 회귀 시작 지점과 나이가 변했고, 상황도 변했다. 시작 지점이 바뀌었으니 도착 지점 또한 바뀌었을 것이다.

다음 회귀에서는 그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늘 끝나던 스물셋으로 되돌아갈까? 오늘. 내일. 아니면 5년의 텀이 있었으니 스물다섯?

에반과 나누었던 키스. 그 순간만큼은 에반과 제가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여겼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지금은 또 모호해졌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매번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으니까. 한 번도 포기해 본 적이 없다.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리 살았다.

에반에게 다가가는 시우의 얼굴엔 어떤 표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설정상 그래야 하는 것도 있지만, 혼자만의 세계에 깊게 빠져든 시우는 허무함에 잠식당한 상태였다.

복잡한 생각은 매번 같은 지점에서 멈췄다. 허무함.

매번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고, 그 시간이 물거품이 되고. 이번에도 그럴 텐데.

이렇게 화려한 조명 아래. 사람들의 환호성 아래. 가장 동경하던 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난 후엔.

물이 끝나는 지점엔 하얀 대리석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어서 와.’

분명 에반은 눈을 감고 있다. 그는 잠이 든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시우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물에 젖었던 발아래로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이 스치자 한기가 스며들었다. 주위에서 지미집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시우의 입꼬리가 조금씩 움직였다. 지금껏 어떤 표정도 스미지 않았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붉은 입가에 야살스러운 미소가 피어오르고 눈꼬리가 유독 붉은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잠든 악마에게 다가간 루시퍼는 겁도 없이 그를 깨울 생각이다.

모든 것을 다 홀려서 제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서.

연기? 진심? 시우는 에반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부신 조명에 둘러싸인 그는 너무 평온해 보였다.

난 이렇게 힘든데. 난 이렇게 아픈데. 난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그가 너무 편해 보여서 괜히 억울했다.

가까이 다가간 시우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파란색 렌즈는 그 아래 깔린 어두움을 완전히 감췄다.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살짝 벌어져 있는 에반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야 했다. 딱 거기까지! 잠든 악마를 키스로 깨우는 루시퍼. 그 장면까지가 지금 찍어야 할 분량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에반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컷!”

몸을 강타하는 한 단어에 나른하게 풀리던 시우의 몸에 힘이 들어가고, 감겨 있던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몸을 바로 했다.

“분위기 좋고, 다시 가자.”

“네!”

뒤돌아서서 계단을 내려오는 시우는 두 팔로 제 상체를 감싸고 팔뚝을 쓸었다. 8월.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그랬기에 세트장엔 대형 에어컨이 쉼 없이 돌아갔다. 그런데도 곳곳에 선풍기가 놓여 있었고, 다들 덥다며 땀을 흘렸다.

춥다.

그리고 따뜻하다?

한기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열기를 느낀 시우는 뒤돌아봤다. 눈을 감고 있던 에반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박하 향이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수도 있나? 방금까지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박하 향이 시우의 주위에 진하게 맴돌았다.

물이 고인 세트에 발을 들이고 있던 시우는 제게로 다가오는 에반을 응시했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온 에반이 대리석 위에서 발을 멈췄다. 그러잖아도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사람이 단 위에까지 서 있으니 더 커 보였다.

“코코.”

갑자기 울컥 알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와 쉬이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뮤직비디오 촬영이었기에 둘은 마이크를 차고 있지 않았다. 주위엔 각종 소음으로 가득했고, 둘의 이야기가 들릴 만한 거리엔 스태프조차 없었다.

“힘들어?”

자신을 보며 다정하게 묻는 에반이 미웠다.

에반이 미운 것일까? 틈에 갇혀 결정을 내리고도 수없이 반복되는 고민에 빠진 자신이 문제인 것일까?

시우는 여전히 고개만 돌려 에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석상처럼 서 있던 에반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앉자, 이번엔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다봐야 했다.

“나 좀 믿어 줘.”

“믿어.”

널 믿어. 그런데 나를 못 믿어서 이러는 거야. 난 아직도 내가 돌아온 수많은 시간들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거든. 평행 세계인지, 계속해 덧씌워지는 것인지 그 어떤 것도 몰라.

그런데 그날 밤. 비 오던 밤.

모든 것을 말해 주던 에반이 지금의 너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사람인지를 모르겠어.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같은 장면을 다시 촬영해야 하니까. 마치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던 제 모습 같다.

발을 떼던 시우는 제 손을 잡아 오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에게 등을 보이고 겨우 시선만 맞췄던 방금과 다르게 온전히 몸을 돌려 에반을 내려다보아야 했다.

“네가 다 하고 싶다고 했잖아. 앨범을 안 낼 수도 없고, 너 이러면 내가…….”

분명히 아픈 건 자신인데, 왜 더 아픈 사람이 에반인 것 같을까?

그가 아플 이유가 전혀 없다. 에반은 제게 고백했고, 자신은 고백을 받아들였다. 단지 바쁜 일정에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끝나고 시간 내서 데이트할까?”

“웃겨. 무슨 데이트야, 데이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데이트라는 단어를 꺼내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피식 웃으며 마음과 상반되는 말을 꺼냈다.

“시우야.”

“우리 매일 하루에 한 끼는 같이 먹고. 최소 두 시간 이상은 같이 연습하는 거 알지?”

“그런 거 말고.”

“2집 활동 끝나면, 그때.”

제 욕심이 너무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 하고 싶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지.

시우는 손끝을 움직여 에반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우야,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이 가 보자. 진짜 닿을 정도로 가까이. 그러니까 고개도 옆으로 좀 더 틀고. 카메라 이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네.”

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면서 대답했다. 그리 어려운 장면이 아닌데, 감독님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번엔 조금 다른 제안을 해 왔다.

처음에 시우를 사로잡았던 잡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득하게 제 주위를 맴돌던 박하 향도 사라졌다. 잠이 든 것 같은 에반의 얼굴도 반복해서 보니 조금은 적응된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에반과 대화를 나눈 후, 불안함과 머릿속을 떠돌던 잡생각들이 사라졌다.

짜증 나게 잘생겼어, 진짜.

심장 떨릴 만큼.

에반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더 틀고 카메라를 신경 쓰지 말랬던 감독님의 말을 떠올리고는 조금 더 다가가…….

“쪽-.”

“컷! 왜 그래?”

아니. 감독님. 제가 아니고. 이놈이…….

석상처럼 가만히 있던 에반의 입술에 제 입술에 닿았던 것이다. 그것도 소리까지 났다고! 깜짝 놀란 시우가 급히 몸을 바로 세우는 바람에 NG가 나고 말았다.

“아…… 아니.”

“방금처럼 다시 가자.”

쟤가 나한테 뽀뽀…… 그러니까 이 사람 많은 데 쟤가…….

사실을 말도 못 하고 어버버거리는 시우의 눈에 자신을 향해 윙크를 하는 에반이 보였다.

지금 신성한 일터에서 뭔 해괴망측한 짓이야?

하지 말라고. 뭐 하는 짓이냐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시우는 에반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갔다.

“컷!”

“컷!”

“다시……. 딱 그림 나올 거 같은데, 뭐가 아쉽지?”

감독님 옆에 선 채 방금 촬영한 것을 본 시우는 감독님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니. 문제는 있었다.

에반이 재미를 붙인 것인지 그렇게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입을 맞췄다. 처음에야 화들짝 놀라서 NG를 냈지만, 어느새 다시 걸어가 가까이 다가갈 때면 시우는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했다.

그러니까 분명 제 뒤통수가 카메라를 가려 어디에도 잡히지 않았지만, 지금 돌려 보고 있는 영상에서도 둘의 입술은 아주 짧게나마 닿았다가 떨어졌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럼 이번엔 제 마음대로 해 볼까요?”

“뭐 좋은 생각 있어? 아니면 이 컷을 살려도 될 거 같은데.”

팔짱을 낀 채 같이 영상을 보던 에반이 감독에게 제안하는 순간 시우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뚝을 잡았다. 뭔지 모르지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주 짧은 시간 지난 상황들을 떠올렸을 때, 이런 경우 에반이 내놓는 대안들은 참으로 답이 없었다.

‘콜! 그럼 나랑 시우랑 둘이서 다섯 번 주고받으면 성공한 거로 하죠.’

이런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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