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85화 (85/187)

85화

명훈의 전화로 어영부영 둘만의 술자리가 끝난 이후, 시우는 에반과 제대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같은 숙소에 살아도 나가고 들어오는 시간이 다르고, 얼굴을 볼 시간은 단체 연습 시간이 전부였다. 그렇게 그 일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묻히는 듯 넘어갔다.

앨범 준비에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와, 이거 무게가…….”

뮤직비디오 촬영 날.

세트장에서 처음으로 ‘루시퍼’ 촬영에 쓰일 날개를 보는 순간 제일 먼저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와이어로 지지해 줄 거니까 괜찮을 거야.”

옆에서 누군가가 그리 말했지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완벽한 백색에서 시작한 날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검게 변했고, 아랫부분은 완전한 검은색이었다.

새하얀 색에서 점차 검게 물들어 가는 날개를 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루시퍼. 신의 은총을 받던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던 그는 오만이라는 감정에 빠져듦과 동시에 타락하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날개는 순백에 가까운 그가 서서히 변해 가는 그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뮤직비디오 촬영에 쓰인다고 했을 때, CG 작업을 하자는 말도 많이 나왔지만, 에반은 꼭 실물을 제작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CG도 들어가겠지만, 실물을 사용한 촬영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날개를 확인하고서야 시우는 에반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압도적인 카리스마. 과연 내가 그걸 해 낼 수 있을까?

시우는 날개 옆에 있는 커다란 거울을 바라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짙은 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은 며칠에 걸친 탈색 이후 고운 금발로 변해 있었다. 평범함이 가득한 자신의 짙은 갈색 눈동자엔 새파란 색의 컬러 렌즈가 자리했다.

강한 조명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촬영인지라 메이크업 역시 평소보다도 짙었다.

유독 붉은 입술과 역시나 붉은 계열이 도드라지는 눈 화장에 레이스가 잔뜩 달린 하얀 셔츠는 매우 얇았기에 자신의 실루엣과 피부색이 배어났다. 몸에 핏되는 검은 슬랙스와 로퍼를 신고 있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한참 보던 시우는 옆에 있는 날개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촘촘하게 자리 잡고 있는 깃털에 손을 뻗었다. 보는 것만큼이나 부드러운 깃털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이 의상을 입고 저 날개를 단다면…….

검은색과 흰색이 섞이는 부분의 날개를 만지던 시우는 제 옆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비하인드 촬영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카메라 감독님이 저를 보자마자 다가오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김시우입니다. 제가 다른 멤버들보다 좀 늦었죠. 다들 촬영 잘했어요?”

제 말에 카메라가 아래위로 살짝 움직이자, 시우는 카메라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자신의 얼굴을 렌즈에 가까이 가져갔다.

“저 처음으로 금발 했는데 잘 어울리나요? 파란색 컬러 렌즈도 껴서 솔직히 제가 봐도 저 같지 않아 가지고. 실은 제가 ‘루시퍼’거든요. 우리 멤버들, 확 다 꼬셔 버리겠습니다.”

콘셉트 회의 할 때 나온 말을 그대로 옮기면서 시우는 세트장을 훑어보았다.

“제가 늦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고 염색 때문이거든요. 어제까지 탈색했는데, 두피가 너무 아파서 이어서 염색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막 징징거렸더니 하루 쉬고 오늘 아침에 일찍 하자고 해서. 그런데 그래도 두피가 너무 아파요. 누가 쥐어뜯는 것 같아요.”

두서없이 말하던 시우의 시선에 찬이 보였다.

“오! 머리 색 진짜 잘 나왔다. 레몬이네, 레몬.”

다가오는 찬에게 팔을 뻗은 시우는 그가 가까이 오자, 슬쩍 그를 카메라 앞으로 보내고 제가 조금 뒤에 섰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은 큰 변화가 없었다. 모두 검은색으로 염색을 했고, 컬러 렌즈 같은 건 착용하지도 않았다.

이번 시즌 고생하는 건 시우였다. 머리가 자랄 때마다 상황 봐서 꾸준히 탈색과 염색을 해야 했으니까.

검은색 정장에 흰색 계열의 셔츠를 입은 찬은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이내 시우에게 장난을 쳤다.

“형, 촬영은?”

“난 아까 끝났지. 내가 제일 먼저 했잖아. 에반이 끝나 가더라. 끝나고 너 바로 들어가면 된대. 저기 날개 찍었어요? 오늘 시우가 저 날개를 달 겁니다.”

“우와! 우리 형! 시우 형! 대박 이뻐. 천사다!”

찬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던 시우는 역시 화려한 리액션을 하며 나타나는 예찬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천사는 무슨.”

어색함에 얼굴로 손을 가져가던 시우는 메이크업한 것을 떠올리고는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찬의 손을 슬쩍 잡았다.

“타락 천사도 천사잖아요. 우리 니모들 난리 나겠고만. 울 귀요미 코코가 이리 섹시해졌습니다. 성인이 되면 이리되는 겁니까?”

“섹시? 콘셉트에 섹시는 없었습니다.”

섹시라는 단어를 단호하게 부정한 시우는 옆으로 다가온 스태프가 건네는 제 재킷을 받았다.

촬영 들어가면 시우 역시 재킷을 걸치겠지만, 메이크업 후 촬영장으로 오는 길이 더웠기에 셔츠만 입고 있었던 것이다. 셔츠의 소재가 좀 얇다고 생각했지만, 강한 조명이 이렇게 실루엣과 살결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게 섹시지. 딴 게 섹시야? 시원하겠다. 야! 잠자리 날개네.”

시우의 셔츠를 잡고 만지면서 떠들어 대는 찬의 말에 예찬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스무 살 성인이 되면 이리되는 겁니다. 막 섹시 콘셉트도 주고. 어쨌거나 귀요미 시우 형이 섹시해졌습니다! 나도 그럼 내년에 섹시하게.”

“넌 안 될걸?”

“아! 왜! 왜요. 나도 섹시할래.”

“시우, 너 오래.”

예찬과 찬이 또 투덕거리는 사이 들리는 상준의 부름에 시우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세트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 오늘 좀 다른데?”

“형까지 놀리지 마요. 이미 찬이 형이랑 예찬이가 많이 놀렸어. 나도 옷이 이렇게 비칠지는 몰랐거든요. 오는 동안에 아무도 말 안 해 주고.”

“놀리긴 뭘 놀려, 인마. 예쁘네. 우리 루시퍼 최고다.”

“완전 놀리는 걸로 들리는데요.”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웃으며 말하는 상준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 시우의 시선이 촬영 중인 세트장에 닿았다.

이번 ‘루시퍼’는 제가 아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기본적으로 곡의 리듬과 분위기는 비슷했지만, 가사나 콘셉트가 바뀐 것이다. 주인공이 바뀌니 나머지도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

화려한 왕좌 같은 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에반은 시우가 기억하는 완벽한 루시퍼의 모습이었다. 그의 금발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다른 멤버들의 셔츠는 흰색이었지만, 에반은 정장도, 셔츠도, 구두까지 모두 블랙이었다.

완벽하게 검은 그의 모습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녹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와 모든 것에 무감해진 루시퍼.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은 에반은 진지하게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루시퍼인데.

그리고 마지막 콘셉트 회의에서 나온 안건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에반이 제게 루시퍼를 맡기려고 했던 이유가 나온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이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상황이 변해도 주위의 멤버가 바뀌어도 에반은 항상 최고를 선택하는 것 같았다.

반복된 회귀 중 오션의 멤버가 바뀐 적도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톱의 자리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임이 분명했다.

“시우 왔어? 에반이 개인 촬영 끝나는 대로 둘의 컷부터 찍고 단체 들어갈 거야.”

“그 컷부터 촬영한다고요?”

“저 의자를 소품으로 사용하는 컷이니 그게 낫지.”

뮤직비디오의 마지막에 들어갈 장면이었다. 지금껏 촬영에 집중하던 에반의 시선이 시우에게 닿았다. 그 순간 시우는 저도 모르게 조금 뒤로 물러섰다.

어떤 것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부정맥이라 여겼던 것. 조금 지났을 때는 제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던 것.

그리고 며칠 전.

열기를 가득 품은 여름날의 밤보다 더 자신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모든 감각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는 확실하게 알았다.

김시우. 자신은 에반을 사랑한다. 또 반복되거나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그가 제게 관심이 시들해지더라도 제 감정은 같은 것이다. 수없이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옅어질지도 모르는 감정.

지루함, 나른함 그런 감정이 가득하던 에반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났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동자에 빛이 어렸다.

이 느낌, 이 감정. ‘Journey’ 촬영 후, 에반의 화보 촬영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시우는 손을 코끝에 댔다.

‘예쁘다.’

시선을 시우에게 고정한 에반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그는 정확히 그리 말했다.

“컷.”

그리고 감독의 컷 사인과 동시에 의자에 드러눕듯 앉았던 에반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스태프가 얼른 에반에게 생수를 내밀었고, 그것을 받아 든 에반은 거침없이 시우에게로 다가왔다.

“예뻐.”

“뭐래.”

그날 밤.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더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나누지 않았다기보다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긴 했지만. 하지만 에반은 불쑥불쑥 이런 말을 참 자주 했다.

에반. 넌 그날 밤을 어떻게 기억해? 그냥 분위기가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일까? 한순간의 실수? 하지만 그렇다기에 제가 느낀 에반의 감정은 무거웠다.

“우리 코코 진짜 예쁘죠. 천사 같아요.”

갑자기 제 어깨에 팔을 두르며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에반을 보는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을 보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을 보고서야 카메라가 다가왔음을 알았다.

“코코가 ‘루시퍼’잖아요. 그럼 저는 뭘까요?”

“괴물.”

다른 멤버들과는 카메라 앞에서 장난을 치고 농담을 하는 것이 쉬웠지만, 에반과 단둘이 한 화면에 잡힐 때면 불편했다. 혹시나 이상한 장면이 잡힐까 봐.

“뭐? 내가 괴물로 보여?”

에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지금 에반이가 올 블랙으로 엄청 멋있고 막 이렇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여기 뿔이 이렇게 생긴다고요.”

시우는 두 손을 들어 에반의 머리 위로 가져갔다.

어차피 뮤직비디오 비하인드는 뮤직비디오 공개 후에 나갈 것이기에 시우는 씩 웃으면서 스포했다. 가끔 위험한 단어나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그였기에, 제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넌 내가 ‘루시퍼’인 걸 말했잖아. 제가 참 멍청하게 마지막에 이 잠들어 있는 ‘악마’를 깨운답니다. 결국 ‘루시퍼’가 주인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주인공은 ‘악마’였다! 제가 뮤직비디오 콘셉트 스포합니다. 아니지. 어차피 뮤직비디오 공개 후 나가는 거니까 스포는 아니네요.”

“에반, 시우. 촬영 준비 하자.”

다행히 에반이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문제의 장면 촬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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