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볼캡 위로 후드티까지 눌러쓰고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걷던 시우의 손목이 잡혔다.
누가 잡았는지 뻔히 알기에 시우는 바삐 걷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려고 했다.
“시우야.”
하지만 제 이름을 부르며 따라 걷지 않는 그 사람 때문에 강제로 멈춰야만 했다.
진짜 오늘 얘가 왜 이래. 다른 곳도 아니고 호텔이라고.
새벽에 호텔에서 우리 실랑이하는 거 들켜서 좋을 거 하나도 없거든.
“야, 일단 나가자. 명훈 형 전화가 또 올지도 몰라.”
재빨리 몸을 돌린 시우는 에반에게 다가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작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손목에서 손을 빼내는 것이 아닌 제 손목을 잡은 그의 손목을 잡고 당겼다.
“김시우.”
솔직히 자신도 조금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회귀 전 둘의 사이엔 제법 무겁고도 진한 많은 감정이 오갔다. 하지만 그것들은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정형화되지 않은 감정들이 둘의 주위를 복잡하게 맴돌기만 했다. 그리고 어떤 틀에 그 감정들을 밀어 넣으려던 순간 회귀했다.
지금은 또 상황이 다르다. 그렇게 부유하던 미묘한 감정들이 특정 단어에 종속될 것 같았다. 그것과 함께 관계성은 완전히 틀어질 것이고.
“그래. 알아, 안다고. 일단 조용한 데 가서 다시 이야기해.”
재촉하듯 건넨 말에 그제야 에반이 걷기 시작했다.
에반이 놓아준 손목을 만지며 시우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진짜 이상하다. 울렁울렁 일렁일렁 바로 옆에서 걷는 이의 감정이 또 제게로 다가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건 맑은 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서서히 번져 나갔다.
아주 작은 간질거림은 가슴에서부터 피어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차라리 어떤 말이든 하는 것이 나을까? 볼캡과 후드를 눌러쓴 채 바닥만 보며 걷는 시우는 에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에반은 너무나도 초조하고 당황하여 복잡한 제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넓은 로비를 지날 때도 에반과 시우 사이에 생긴 약간의 틈은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우가 조금이라도 늦게 걸으면 에반의 넓은 어깨와 등을 보아야만 했다.
발레파킹 직원이 로비 앞에 차를 멈추자, 시우는 얼른 조수석에 올랐다. 그때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렸다. 이번엔 전화가 아닌 메시지였다.
[오는 데 얼마나 걸려?]
명훈의 메시지에 시우는 슬쩍 에반의 눈치를 봤다.
[15분 정도요.]
호텔에서 숙소까지 이 새벽에 길이 막힐 일도 없었기에 시우는 솔직하게 답을 보냈다.
메시지를 확인한 명훈은 더는 답을 보내지 않았다. 15분 이내에 들어간다면 별일이 없을 것이다.
“에반.”
숙소로 향하는 길에서도 에반이 어떤 말도 하지 않았기에 시우는 먼저 그를 불렀다.
“네가 날 좋아하고,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크게 변할 건 없을 것 같아. 우리 이미 같은 팀이고, 같이 일도 하고, 같은 집에서 살……”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시우는 말을 제대로 끝낼 수 없었다.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휘청거렸기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쏠리는 몸은 에반이 팔을 내밀어 잡아 주었다.
어느 순간 갓길에 차가 멈춰 있었다.
“…….”
너 갑자기 왜 이러냐고 한 소리 하기 위해 에반을 본 시우는 꼭 붙은 입술을 떼지 못했다.
생각보다 에반과의 추억이 많았다. 그날도 그랬다. 현수 형의 라디오에 전화 연결이 됐던 날.
짙은 어둠이 내린 눈동자에 제가 가득 담겨 있었다. 둘 사이가 조금씩 좁혀지는 것을 알면서도 시우는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에반의 손이 다가오고 꾹 눌러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졌다.
에반이 고개를 살짝 틀었고,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와 함께 짙게 파고드는 향에 시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우야, 에반 좋아해?”
눈을 감은 시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제 입술에 열기를 품은 부드럽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그 상태로 에반이 말을 했기에 자신의 입술도 같이 움직였다.
“걘 널 엄청 좋아한대. 네가 이렇게 또 벽을 만들고 도망가려 하면 미쳐 버릴 것 같다는데, 어떡하지?”
입술이 맞닿았지만, 에반은 대답이라도 기다리는 듯 더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시우도 널 좋아한대. 그리고 이번엔 도망가지 않을 거야. 그래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라고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시…….”
‘시우도’라는 단어로 말을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느낀 것은 아득함이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에반의 혀는 시우의 입술을 적셨고, 말을 하려 살짝 입술을 벌린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촉촉한 온기를 머금은 에반의 입술이 시우의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물었다.
그와 함께 싸하면서도 시원한 박하 향이 시우의 몸을 휘감았다.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두 입술이 맞물리고 시우의 목덜미에 뜨거운 에반의 손이 닿았다. 시우가 지금껏 쓰고 있던 볼캡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엔 에반의 향으로 가득 차 있던 공간에 달콤한 자두 향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완전히 다른 두 페로몬이 부드럽게 얽히고 섞였다.
시우는 에반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흣……”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간 에반의 혀는 시우의 입 안을 훑었다. 부드럽고도 유연하게 시우를 탐하던 에반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리고 급작스레 에반의 혀를 맞아들이느라 당황한 시우의 혀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거칠게 일렁이는 페로몬과 다르게 에반의 행동엔 여유가 있었고, 시우를 배려하고 있었다. 숨이 막히고 갑갑하면서도 짜릿한 감각에 녹아든 시우는 잠시라도 에반의 입술이 멀어질라치면 급히 숨을 들이마시고는 다시 그를 찾았다.
호흡이 엉키고 질척한 타액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힘겹게 따라오는 시우를 배려해 에반이 몸을 물리자 촉촉이 젖은 둘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타액이 이어졌다.
“하아…… 이거…….”
떨어지기 싫다. 조금이라도 에반이 멀어지는 것이 싫어서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며 더 다가가려던 시우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무언가 자신을 강하게 누른 탓이다.
지금껏 감고 있던 눈을 뜬 시우 얼굴엔 홍조가 짙게 어려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지금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터질 듯 뛰는 심장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던 시우는 갓길에 세워진 차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건 것은 안전벨트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제게로 가까이 몸을 기울인 에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밀려드는 복잡한 감정에 그의 시선을 피하려던 시우의 양 볼이 에반의 큰 손에 감싸였다.
“내가 물었잖아. 시우는 어떻대?”
눈을 내리깔아 에반의 시선을 피하던 시우는 아랫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입 안에 잔뜩 남은 짙은 향. 방금 제게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았다.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은 건 너잖아.
숨기고 도망가고 피할 시간에 이러는 것도…….
남들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돼. 둘이서만. 둘.
에반과 나. 우리 둘.
에반의 두 손은 생각에 잠긴 시우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에반의 목에 두르고 있던 두 손 중 한 손을 내린 시우는 제 움직임을 방해하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시우는…… 에반이랑 키스하고 싶대.”
시선을 맞춘 시우는 이번엔 제가 먼저 다가갔다.
솔직하자. 숨기지도 말고, 도망치지도 말고.
무엇보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말랑하게 입술이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시우는 몸을 뒤로 살짝 물렸다. 금세 에반의 입술이 따라붙었다. 아슬아슬 장난치듯 둘의 입술이 맞물리고 떨어졌다.
시우가 다가가자 이번엔 에반이 멀어졌다.
조금 더 조금 더. 시우가 다가가는 만큼 에반이 물러났다.
“……김시우.”
평소보다 더 낮고 잠긴 것 같은 에반의 목소리에 시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냥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에반과 닿는 건 기분이 좋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황홀한 감각을 따랐을 뿐이다.
“아……”
운전석에 앉아 있는 에반. 그리고 그의 다리 위에 앉은 자신. 위에서 에반을 내려다보던 시우는 손을 뻗어 에반의 눈을 가려 버렸다. 자신의 눈이 아닌 그의 눈을 가린 것은 자신을 보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반을 보고 싶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열기가 아랫배에 몰렸다.
눈을 가렸지만, 잘생긴 그 얼굴은 다 가려지지 않았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에반의 손은 시우의 허리에 닿아 있었다. 얇은 후드 티셔츠 위에 있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후드 티셔츠의 아랫단을 건드렸고, 다음으로 미끄러지듯 그 손이 시우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둘의 숨소리 사이로 가끔 빠르게 도로를 지나가는 차 소리가 들렸다. 주황빛 가로등이 차 안을 밝혔다.
허리를 쓰다듬는 에반의 손이 뜨거웠다. 제 몸이 차가운 것인지 그의 손이 뜨거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느릿하게 허리를 쓰다듬는 손은 척추를 타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에반의 손을 따라 열기가 우르르 몰려다녔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시우는 에반의 눈을 가리고 있던 제 손을 천천히 치웠다.
“키스할까?”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속삭이는 에반과 시선을 마주한 시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퍼는 자신이 아닌 에반이었다. 3초 만에 모든 사람을 홀린다는 에반은 처음 공항에서 만나는 순간 자신을 사로잡은 것이 분명했다.
키스하자고 권유한 것은 에반이었지만, 다가간 건 시우였다.
질척하게 젖은 입술이 다시 엉켰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시우를 인도하던 에반은 없었다.
입 안 곳곳을 건드리고 휘저어 대며 따라오지 못하고 움츠리는 시우의 혀끝을 자극적으로 깨물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질 때도 에반은 시우의 입술을 지분거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고 누가 피하는 것도 없이 깊게 서로를 탐했다.
시우가 숨을 고르는 그 짧은 시간도 아까워하며 수없이 키스를 나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시우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리다 끊기길 반복했다. 몇 번 더 징징거리는 것으로 보아 메시지가 오는 것 같았다.
벨 소리도 진동도 모두 무시하던 시우는 에반의 입술을 피하고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의 틈을 두고 에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방금까지 나눈 키스에 온몸이 달아올라 버렸다. 눈을 감은 채, 시우는 제 것인지 에반의 것인지 모르겠지만 빠르게 뛰던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과녁을 향해 달렸다. 아니 이제 과녁까지 도달했기에 되돌릴 수 없다.
그사이에도 에반의 손은 시우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어 계속해서 울리던 벨 소리가 멈췄다.
“네.”
“어디야?”
“밖이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에반의 손끝이 시우의 턱에 닿았다. 손끝의 움직임으로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시우의 얼굴이 드러나자 한껏 붉어진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사이에도 휴대전화 너머로 명훈의 말이 늘어지고 있었다.
“지금 들어가요.”
그건 명훈에게 하는 말이면서도 시우에게 하는 말이었다. 편안히 제 품에 안겨 있던 시우가 움직이고, 조수석에서 벨트까지 스스로 매는 것을 본 에반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손.”
방금까지 뜨겁게 시우가 안겨 있던 품 안으로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자, 에반은 시우에게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내 손안으로 작고 따스하며 부드러운 시우의 손이 들어왔다.
에반은 그 손을 잡고 끌어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숙소로 돌아가는 짧은 시간.
대화는 오가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대화를 한 것 같았다.
어둠이 가득했던 하늘에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시우가 가장 좋아하는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