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에반의 차를 타고 단둘이 움직이는 것은 익숙했다.
화려한 불빛이 가득한 밤거리를 달리자 시우는 차창을 열었다.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하던 차 안으로 후끈한 밤의 열기가 몰려들었다.
8월. 여름의 절정을 맞은 밤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지나치는 강변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덥네.”
“그래서 가을에 앨범 내잖아. 더운 게 싫어서.”
차창을 좀 더 열어 놓고 싶었지만, 습기 머금은 열기가 계속 들어왔기에 시우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들이 가을에 앨범을 내는 이유를 듣고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어쩐지. 오션은 항상 가을이나 이른 봄에 앨범을 냈다.
한여름은 그들의 공백기였다. 가을에 앨범을 내는 이유가 연말을 겨냥한 것으로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더운 것이 싫어서였다니. 참, 에반다운 발상 같았다.
싫고 좋은 것이 확실한 것 같았으니까. 단지 그것을 표현하고 하지 않는 건 그의 성격이었다. 대부분은 표현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여름에 연습하고?”
“연습실 에어컨 빵빵하잖아.”
“그런데 우리 어디 가?”
운전 중인 에반을 보던 시우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연습실에서 뒹굴다 온 자신은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땀에 몇 번이나 젖었다 마른 머리는 볼캡으로 숨겼다.
반면 옆에 있는 그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 더운 날씨에 정장이라니, 짙은 남색에 옅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정장이 에반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조용하게 맥주 한잔할 수 있는 곳.”
“우리 드레스 코드를 보고 말하지. 그냥 맥주 사서 숙소나 들어가자. 명훈 형 알면 난리 난다.”
“드레스 코드가 어때서?”
정말 태연한 에반의 말에 시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널 보면 고급 바에서 칵테일이나 양주를 마셔야 할 것 같고, 나를 보면 근처 포차나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맥주나 소주를 마셔야 할 것 같지 않아?”
이 더운 날에 반소매 셔츠도 아니고 긴소매 셔츠를 입고 있는 에반이 참 대단해 보였다. 더워서 넥타이 없이 그나마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에반이었기에 오히려 의도해서 그렇게 입은 것 같았다.
한결같이 잘났구나.
운전 중이던 에반의 시선이 시우에게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예뻐.”
“……뭐?”
“너 예쁘다고.”
“칭찬이지?”
뜬금없는 에반의 말에 살짝 표정을 구겼던 시우는 그의 의중을 알기 위해 한 번 더 물었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에반이 익숙하면서도 어색했다.
이쯤 되니 그의 말버릇이 이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시우의 질문에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길을 따라 달리던 차가 들어가는 곳을 본 시우의 눈이 커졌다.
호텔? 왜? 갑자기 왜 호텔에 온 거지?
당황스러움에 어떤 말도 못 하는 시우와 다르게 에반의 얼굴엔 평온함이 가득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것도 아닌 호텔 로비 앞에 차를 멈춘 그는 옆으로 다가온 직원에게 차 열쇠를 건넸다.
“야.”
“맥주 한잔하고 싶다며.”
에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우가 앉은 조수석 문이 열렸다.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 호텔로 온다는 생각은 누가 할 수 있는 건데?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향한 상황에서 미적거리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시우는 볼캡을 더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리면서 차에서 내렸다.
“그냥 숙소에서 편하게 한잔하자고 한 거지. 누가 호텔로 오자고 했어.”
에반이 옆으로 다가오자마자 시우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우리 시우, 이번에 래퍼 도전해 볼래? 이 악물고 해도 딕션 괜찮네.”
“장난쳐?”
“여기 조용한 곳 있어. 야경도 예쁘고. 내가 처음부터 여기 온다고 했으면 넌 오지 않겠다고 했을 거잖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에반이 시우의 허리에 손을 대고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자, 시우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김시우.”
“왜.”
“우리가 이렇게 호텔에 왔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그러지 않는다고.”
에반의 말에 시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11시가 다 돼 가는 시각. 호텔 로비는 조용했다.
지금 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시우는 멈췄던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에반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다 알아보지는 않겠지만, 이미 흘깃거리는 시선은 제법 많다는 것을. 어쩌면 자신은 이걸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그룹의 동갑내기 친구.
그 틀을 깨고 싶었다.
“분위기 안 좋기만 해 봐.”
엘리베이터에 단둘만 오르자 여전히 바닥만 보고 있는 시우의 작은 발이 에반의 발을 툭 쳤다. 운동화를 신은 그와 구두를 신은 자신.
회귀 전의 시우보다 지금의 시우가 더 밝았다. 적극적이었고 거침없었으며 더 편하게 대했다.
에반은 시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자신을 흘깃 본 시우가 어깨를 움직여 제 팔을 치워 버렸다. 이런 모습이든 저런 모습이든 시우는 시우였다. 제 심장은 그를 향해서만 뛰었다.
고층에 있는 회원제 라운지 앞에 멈추자, 시우의 손끝이 에반의 옷을 살짝 잡았다.
스무 살. 뭐든 다 할 수 있는 나이지만 어쩌면 세상에 대해 잘 모르는 나이. 열여덟부터 연습생의 신분으로 소속사 연습실과 학교만 오갔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되었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것 대신 여전히 그들은 연습실과 방송국 등을 오갔다.
어디를 가든지 매니저가 동행했고, 아이돌로서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지금 그들은 소속사의 철저한 감시 속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반 술집도 어색할 텐데, 호텔의 회원제 라운지라면 더할 것이다.
“야, 여기…….”
“맛있는 거 먹자, 시우야. 너 오늘 연습 많이 했잖아.”
미적거리는 건 그만. 또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또 반복된다면, 또 같은 짓을 반복하겠지만 에반은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옷깃을 잡은 시우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끝이 차가운 작은 손이 제 손에 들어왔다.
갑갑한 룸은 싫었다. 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홀에서 가장 뷰가 좋은 자리가 비어 있었기에 그리 안내받을 수 있었다.
“넌…….”
“응?”
시우는 넌 왜 모든 것이 자연스럽냐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늘 이곳에 와 봤던 사람처럼. 에반이 다양한 역할을 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도 연습생이었고, 많은 시간을 연습실과 소속사에서 보냈다.
마치 자신처럼 같은 상황을 여러 번 반복한 사람 같다.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둘은 커다란 통 창을 향해 있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옆에 기둥이 있어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가려졌다. 앞에는 시원한 맥주와 과일, 핑거푸드 등이 놓였다.
그런데 왜 맥주잔이 하나지?
맥주잔으로 손을 뻗던 시우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차가운 얼음물을 마시고 있었다.
“난 운전해야지.”
“대리…….”
대리를 부르자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그럼 명훈 형을 부르자는 말도 쉬이 나오지 않았다.
둘의 상황이 그랬다.
“너 마시라고. 난 그냥 이렇게 쉬는 거면 됐어.”
“같이 마시려고 한 거지. 나 혼자 무슨 술을 마셔.”
“내 것까지 다 마셔 줘. 아! 공식적으로 없긴 한데, 소주도 부탁하면 가져다주긴 할 거거든. 소맥?”
“소주는 무슨. 됐어.”
시우는 맥주잔을 들었다. 스무 살로 회귀했더니 이런 좋은 점이 있네. 열여덟이었으면 술은 참아야 했다고.
여름날 온종일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연습하고 난 후, 숙소에서 마시는 맥주는 별미 중 별미였다.
데뷔 직전엔 체중 관리 때문에 마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마른 체격인 시우는 다른 멤버들에 비해 체중 관리로 스트레스받은 적은 없었다.
“으……. 시원하다.”
벌컥벌컥 들이켜 3분의 2는 마신 시우는 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가볍게 떨었다.
“좋아?”
“그래, 좋아 죽겠다. 네 것까지 다 먹어 줄 테니, 말리지 마.”
분명 에반도 마시고 싶을 것이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푹 기대자 나른함이 몰려왔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서 보는 야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소파에 온전히 몸을 기댄 채 멍하니 창밖을 보던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에반과 시선이 얽혔다. 분명 그도 야경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네에 같이 앉아 마셨던 맥주가 떠올랐다.
그때 에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제 감정이 버거워 그가 하려던 말을 덮어 버렸다.
이런 조명으로 아름다운 밤이 아닌 자연의 빛으로 가득했던 그날 밤. 시우는 에반을 홀로 두었었다.
“하고 싶은 말 있어?”
“…….”
“이번엔 다 들어 줄게. 그게 무슨 말이 됐든 네가 하는 말이면 다 들어 줄게.”
에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젖혀 위를 바라보았다. 둘 사이를 채운 건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뿐이다.
에반의 초록 눈동자에 어둠이 서렸다. 참 다양한 색을 가졌다. 짙은 갈색에 가까운 자신의 눈동자는 그리 다양한 색을 가지지 못했는데.
에반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서 그의 코로 시선을 옮기던 시우는 소파에 기댔던 몸을 바로 하곤 맥주잔을 잡았다. 그새 컵의 표면엔 맑은 물방울이 잔뜩 맺혔다.
“이번엔?”
단둘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는지, 아니면 진짜 거절했던 순간이 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꽤 긴 시간 같이 지냈으니 이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
남은 맥주를 쭉 들이켜고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시우는 아예 몸을 에반 쪽으로 틀어 앉았다.
“응. 지난번엔 내가 거절했잖아.”
“끝까지 들어 줄 거야?”
소파 끝에 걸터앉아 에반을 바라보는 시우와 다르게 그는 몸을 완전히 이완시킨 채 소파에 드러눕듯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분명 얼음물이 든 잔일 텐데, 그는 마치 취한 것 같았다.
“응.”
지금껏 푹 눌러쓰고 있던 볼캡을 벗어 머리를 정리하고는 모자 대신 후드를 써 엉망인 머리를 감췄다.
“그게 어떤 말이어도?”
가벼운 시우의 목소리와 다르게 에반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다른 곳을 향하던 그의 시선이 다시 시우의 얼굴에 닿았다.
갑자기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킨 시우는 혀끝을 내밀어 건조한 것 같은 제 입술을 조금 적셨다.
“됐어.”
“그래.”
됐다고 말하는 에반의 말과 무슨 말이든 듣겠다는 다짐이 들어간 ‘그래.’라는 시우의 말이 맞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