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80화 (80/187)

80화

시우가 테이블을 엎은 걸 제외하고 마지막 게임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세 개 차이로 친구 팀이 승리했고, 자연스럽게 에반과 시우는 벌칙 의상을 면할 수 있었다.

상준의 벌칙 수행 여부는 동전 던지기로 결정됐다. 앞면이 나오면 벌칙 면제, 뒷면이 나오면 벌칙 수행.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는지 뒷면이 나왔고, 다음으로는 벌칙 의상을 선택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앙증맞은 천사 날개는 예찬에게, 드라큘라 망토는 찬에게, 슈퍼맨 망토는 상준에게 돌아갔다.

* * *

처음에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멤버들과 지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예찬과 에반은 시우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였고, 찬이나 상준도 그리 까다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수시로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지내는 것도 익숙해졌다.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엔 곧바로 2집 데뷔 준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지막 안건이 문제였다.

“루시퍼.”

그래, 루시퍼. 원조 루시퍼가 지금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루시퍼를 시우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해.”

상준의 작업실에서 시우와 에반은 대치 중이었다.

거기다 가사를 확인한 시우는 긴 한숨을 쉬었다.

가사가 바뀌었다.

루시퍼가 모두를 휘두른다는 기본 틀에선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에반의 루시퍼가 강렬하다면 지금의 루시퍼는 유혹적이었다. 한 명씩 한 명씩 타락의 길로 인도하는 루시퍼.

이 가사의 루시퍼는 확실히 에반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에서 원래 가사를 들고 올 수는 없었다.

아니. 원래의 가사를 들고 와도 되지 않을까? 그 가사라면 에반에게 ‘루시퍼’를 넘기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래. 목소리 톤이나 이런 걸 고려하면 이 파트는 시우가 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해. 뮤비 콘티는 어떻게 됐는데?”

양쪽에 에반과 시우를 두고 가운데 앉은 상준은 연필을 돌리며 문제의 파트를 반복해서 틀었다.

“루시퍼가 멤버들을 한 명씩 타락의 길로 인도하려고요. 무대에서 쓸 날개 제작도 들어가야 하고.”

“강한 루시퍼가 확 휘어잡는 건 어때?”

올 블랙의 에반. 유일하게 색을 가진 것은 그의 눈동자가 전부였다. 그리고 오묘한 눈동자에 지배당하는 멤버들. 마치 줄 달린 인형처럼 모두 루시퍼에 놀아나는 뮤직비디오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둘이서 정하지. 난 왜 불렀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것도 아니고, 에반이나 시우 둘 다 고집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니 데뷔 전부터 기 싸움에 대놓고 싸운 것까지 그건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었다.

“정해지면 바로 수정 들어가야 하는데, 그건 형이 해야 하니까요.”

“버전 두 개는?”

돌리고 있던 연필을 툭 던진 상준은 의자에 기대앉은 채, 책장에 기대고 서 있는 에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볼캡을 깊게 눌러쓰고 있어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에반은 항상 완벽한 모습을 원했고, 모든 멤버에게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밝혔다. 하지만 멤버가 버거워하거나 싫어한다면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왜 이렇게 시우에게…….

“곡 느낌이 완전히 달라질걸요. 그만큼 형이 고생하는 거고.”

“그래. 내가 고생이다, 이놈들아. 하면 될 거 아니야. 그만 싸우고. 솔직히 나도 둘 중 뭐가 더 나을지 모르겠고. 일단 나와 봐야 아니까.”

팔짱을 끼고 자신의 엄지를 아프지 않게 질겅거리고 있던 시우는 맞은편에 있는 에반을 슬쩍 올려 보았다. 그에게서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에반은 굉장히 고심 중이었다. 두 개의 버전도 괜찮지만, 그는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은 것 같았다.

굳이 버전 두 개로 만들어서 같은 멤버와 경쟁하는 것 같은 구도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메인 곡이 ‘루시퍼’면, 다음 곡은 뭔데?”

기억이 맞는다면 다음 곡은 경쾌한 곡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도배된 ‘루시퍼’와 다르게 파스텔 톤이 가득한 ‘Dream True’의 리듬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Dream True.”

“상준 형, ‘루시퍼’ 내가 해 볼게요. 대신 이번 앨범 망해도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어차피 반복되는 삶이다. 시작점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루시퍼의 주인공이 한 번쯤 자신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사라질 물거품인데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겠다.

“좋아. 그럼 시우는 남고, 에반이는 가 봐.”

손끝을 튕긴 상준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렇게 실랑이하는 사이에도 2집 데뷔일은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것보다 곧바로 실천하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 * *

“괴물.”

시우는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자신을 보고 거친 말을 마구 쏟아 내는 찬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마 자신이 찬의 입장이라고 해도 저럴 것 같았다. 거기다 대놓고 욕설이 섞여 있지만, 그 뜻이 정말 그 뜻이 아닌 것도 알기에 웃을 수 있었다.

“좀 쉬었다가 해요. 쉬었다가.”

선 채로 몸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숨을 고른 시우는 한쪽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냉수 두 개를 꺼냈다. 하나를 찬에게 건네며 그의 옆에 편하게 앉았다.

“내가 문제냐. 네가 문제냐.”

“음. 둘 다?”

팀에서 움직이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상준이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곡 작업 하는 것이 취미이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쉬려고 꼼수를 부렸다. 다행히도 신은 그런 그에게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 조건을 하사했다.

에반이나 시우보다는 늦긴 했지만, 안무를 습득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도 단체 안무 연습 시간이 끝나자마자 사라졌지.

예찬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으니 안무 연습을 즐겼다. 반면 찬은…… 냉정하게 말해서 다른 그룹의 멤버였다면 톱급이었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괴물들이 모여 있는 오션의 멤버였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하루 안에 안무를 습득해 버리는 에반과 시우가 있었고, 재능이 있는 상준이 있었으며, 끈기와 춤을 즐기는 예찬이 있는 곳에서 그는 본의 아니게 열등생이었다.

늘 바쁜 에반을 대신해 당연히 시우가 그의 안무 도우미가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덕분에 혹독하게 연습시켰다가 이렇게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고.

“갑자기 왜 ‘루시퍼’ 한다고 했어?”

둘만 남은 연습실에서 찬이 물어 오자 시우는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저도 살면서 한 번은 주인공 해 봐야 되잖아요.”

“정답이네. 아…… 힘들다.”

누워 있던 찬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시우가 옆에 놓은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오늘 그만하고 쉴래요?”

벌써 밤 10시가 넘은 시각. 요즘 그들의 일정은 똑같았다.

일어나서 단체 안무 연습 후엔 각자 개인 연습. 에반은 더 보기 힘들었다.

“아직 있었어요?”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와 함께 예찬이 등장했다.

“넌 이 시간에 여길 왜 와?”

“저. 연습 좀 하려고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사 온 것을 찬에게 넘기는 예찬을 보며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제삼자는 빠져 줘야 할 시간.

원래 자신의 연애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남의 연애는 잘 보이는 법이다.

“어디 가?”

“전 들어가서 쉴래요.”

“난 어떡하고?”

“예찬이 왔잖아요. 어려운 거 예찬이에게 물어봐요. 예찬이 안무 다 외웠잖아. 솔직히 우리 중에 제일 FM으로 소화하는 건 예찬이에요. 전 아직 몸에서 발레 느낌 다 못 뺐고, 에반은 같은 퍼포먼스라도 강한 편이고.”

예찬이 사 온 것들을 뒤적이던 찬이 ‘사이다 왜 없어?’ 투덜거리자 ‘뼈 삭아요.’라고 대답하며 사과주스를 건네는 모습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난 갑니다.”

“어? 야, 먹고 가.”

“싫어요. 밤에 먹으면 붓고 살찝니다.”

“가는 마당에 그런 저주를 퍼붓는 게 어딨어!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형은 말랐으니까 먹어도 돼요. 그리고 먹고 연습 빡시게 하면 됩니다. 내일 검사할게요.”

“싫어! 안 해! 안 할 거야!”

“형. 잘 가요.”

전혀 다른 둘의 배웅을 받으며 시우는 연습실을 나왔다. 여기서 숙소까지 걸어서 10분이면 되는데. 창가에 발을 멈춘 시우는 밖을 내다보았다. 아침저녁이면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런 밤. 가로등만 밝힌 길을 걷는 기분은 꽤 괜찮았다.

이제 시우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자정을 넘기고 모두가 잠드는 시각.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나 사 갈까? 안주 없이 먹으면 덜 붓는데.

밖을 보던 시우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팬들이 보였다.

아침에 다 같이 밴으로 이동해서 타고 갈 것도 없는데, 그냥 후드를 눌러쓰고 가면 안 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후드를 끌어 쓴 시우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변하는 것을 보는 시우의 입에서 작은 허밍이 흘러나왔다.

“이제 가?”

갑자기 어깨가 묵직해지고 따스한 체온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우는 손을 들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예찬이랑 찬이 형은 더 연습한대.”

“그래? 맥주 한잔 어때?”

“오.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갔냐? 그런데 숙소에 맥주 없어.”

“맥주는 사면 되는 거고. 명훈 형한테 간다고 말했어?”

“아니. 혼자 걸어갈까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었거든.”

“그럼 내 차로 나가자.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에반은 시우의 어깨에서 팔을 풀지 않은 채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의 말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시우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둘이서 나가서 맥주를 마시자고? 소속사에 말도 안 하고 일탈을 하자는 거야?

분명 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에반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