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진짜 너무들 하시네.”
찬은 쪼그리고 앉았고, 예찬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영국까지 와서 하는 게임이 그거예요?”
“3cm. 많이 줄이는 팀이 이기는 것이 아니고, 3cm에 근사하게 남기는 팀이 이기는 겁니다.”
여기저기서 멤버들이 중얼거리고 오디오가 맞물리자 상준은 그들의 투덜거림을 자르고 게임을 진행했다.
“이거 해요?”
“안 하면 어떡할 거야? 뭐 저기 호수에서 수초 찾아 오기 그런 거 할 거야? 빨리빨리 하고 쉽시다. 햇볕 뜨겁다고요.”
“상준 형. 자기가 하는 거 아니라고! 막 진행하고.”
진행하려는 상준과 나름대로 반항하는 멤버 사이에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수초 찾아 오기 좋네.”
휘적거리며 호수로 향하는 에반의 팔을 잡아 말리는 건 시우의 몫이었다. 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제작진이 건네는 막대 과자를 받아 든 상준은 하나를 집어 먹으며 손짓으로 흩어진 멤버를 모았다.
“이거 하고도 게임 한 개 더 있다고요. 아! 찬이 형. 찬이 형이 진행해요. 이 과자 맛있네. 예찬이 이리 와. 빨리하자.”
과자 하나를 다 먹은 상준은 하나를 더 집으면서 큐시트를 흔들었다.
“아. 몰라. 몰라. 빨리해.”
큐시트를 넘겨받는 대신 예찬을 끌고 메인 카메라 앞에 선 찬은 막대 과자를 자신의 입에 물었다.
“누구를 위한 게임인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 중얼거리는 에반의 말에 모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겨우 웃음을 수습하고 찬이 막대 과자를 깨물자, 예찬이 그의 앞에 섰다.
“이거…… 진짜 왜 해.”
막 하려고 막대 과자의 끝을 잠시 물었다가 물러선 예찬의 웅얼거림에 결국 찬이 예찬의 멱살을 잡아 제게로 당겼다.
“아. 울 애기, 진짜 안 되겠네. 형이 제대로 끝내 줄 테니까 잘 물어 봐.”
그러고는 자신이 물고 있던 막대 과자를 예찬에게 물렸고, 그 뒤로 게임 진행은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딱 굳은 예찬과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뒷머리를 잡은 예찬은 딱 세 번 깨물고는 멈췄다.
“……음. 다들 이걸 바란 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찬이 게임을 끝내 버렸기에 자를 들고 그들이 남긴 막대 과자를 측정하는 상준은 카메라를 흘깃 바라보았다.
“얼마? 몇 센티예요?”
촬영 팀이 분량이나 연출 걱정을 하며 터무니없이 길게 남은 막대 과자를 가지고 옥신각신할 때 가장 진지한 사람은 시우였다. 일단 저것보다만 짧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뭔가요. 분명 3cm라고 말씀드렸는데, 6.8cm. 이렇게 된 거 친구 팀 그냥 게임 끝내 버립시다. 여기서 0.1mm만 더 짧아도 성공인 거 아시죠?”
막대 과자의 길이를 측정한 상준은 상황을 정리했다.
“형! 보여 준다메요. 이게 뭐야!”
“난 그 정도 될 줄 알았지.”
“와~ 이 형 보소. 그냥 내가 하는 게 나았겠다. 딱 두 번, 아니 한 번만 더 와도 됐구먼.”
“아. 조용조용. 에반이랑 시우 빨리 앞으로 와.”
뒤에서 예찬과 찬이 티격태격하든 어떤 말이 오가든 게임을 진행하는 상준은 얼른 흩어져 있는 에반과 시우를 끌어왔다.
“예능으로 해요? 다큐로 해요?”
막내 과자를 들고 길이를 가늠하는 시우 옆에서 에반은 제작진을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에반은 가만히 있으라 하고 제가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시우의 시선이 에반에게 닿았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서 있었던 적이 있나? 게임을 하기 위해 가까이 서 있었기에 고개를 한참 젖혀야 그의 얼굴이 보였다.
“예능은 뭐고, 다큐는 뭐야? 열심히 해야지. 이겨야 할 거 아니야. 이기면 여기서 촬영 끝, 휴식인데 뭘 고민하고 있어.”
상준은 큐시트를 흔들며 아직도 제작진과 밀당 중인 에반의 입에 막대 과자를 물렸다.
눈높이가 맞지 않았기에 에반은 다리를 벌리고 서서 몸을 조금 낮췄다.
“넌 가만히 있어. 내가 할게.”
시우의 작은 목소리에 에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막대 과자를 문 채로도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시우의 말에 에반이 보인 반응은 그것이 전부였다.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데 손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주먹을 쥐었다 편 시우는 에반의 어깨에 제 손을 올렸다. 그와 반대로 에반은 제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짚었다.
이 게임이 이렇게 진지하고 심각한 게임이었나? 그날이 떠올랐다.
정신없이 종이를 옮기던 순간, 나풀거리며 떨어지던 얇은 종이 한 장. 아직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시우는 조금씩 과자를 베어 먹었다.
오독거리는 소리만이 주위를 감쌌다.
모두의 시선이 막대 과자에 집중된 것이 느껴지자, 갑자기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웃음을 참기 위해 에반의 어깨를 꾹 잡자, 살짝 눈을 내리깔고 있던 에반의 시선이 점차 위로 향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고 긴장되는 거지?
그냥 멈춰도 되는 거잖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시우는 조금 더 깨물었다. 윤곽이 뚜렷한 에반이었기에 더 다가가면 막대 과자가 아니라 코가 먼저 닿을 것 같았다.
3cm, 아니 6cm.
게임의 조건을 떠올린 시우는 에반의 시선을 피해 제가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그리고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오독.
시우의 이 끝에서 막대 과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또 들렸다. 이만하면 되겠지? 시우는 암묵적인 동의를 구하기 위해 애써 피하고 있던 에반의 시선을 찾았다.
오묘한 색의 그의 눈동자.
멀리서 보아도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그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기에 물러나려던 시우는 에반이 눈을 천천히 감는 것을 보았다. 동의겠지? 시우가 물고 있던 막대 과자를 놓고 뒤로 물러나는 것보다 소리 없이 시우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던 에반이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으아아아!”
“뭐야. 뭐야!”
“막대 과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가장 먼저 알려 주는 것은 이 게임에 집중하고 있던 멤버들의 목소리였다. 방금까지 코앞에 있던 에반이 뒤로 물러섰고, 그의 어깨에 올리고 있던 시우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과자 맛있네.”
에반이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에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졌고, 지금 입 안에는 막대 과자가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놀라 물고 있던 것을 놓친 것이다.
“에반. 과자 내놔.”
“없는데요.”
측정을 위해 남은 과자를 달라고 말하는 상준은 남은 과자를 먹으며 태연하게 대답하는 에반을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시우 형. 괜찮아요? 살아 있어요?”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시우가 눈만 껌벅거리고 있자니 예찬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걸로 죽기엔 너무 그런데.”
그래, 처음이었다면 심장이 내려앉고 난리가 났겠지. 그런데 나 이거 두 번? 세 번째인 것 같아. 그리고 불과 일주일 전쯤엔 이런 뽀뽀가 아니라 키스. 거기까지 생각한 시우는 뒤늦게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갑자기 왜 그게 떠올라.
그때 그 어둠 속에서 본 눈동자와 방금 환한 햇볕 아래에서 본 에반의 눈동자가 같았던 것 같다.
“으앙. 쟤가 내 입술 훔쳐 갔어요.”
이건 예능이다. 지금 같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당황하고 놀라고 그런 웃음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을 원할 것이기에 시우는 슬쩍 몸을 틀어 예찬에게 기댔다. 그러면서도 분명 미묘할 것이 분명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 않았다.
“과자 없다고?”
예찬에게 안겨 징징거리는 시우의 모습과 한쪽에서 과자를 내놓아라 없다, 실랑이하는 상준과 에반의 모습이 한 프레임에 담겼다.
“이거 어떻게 해요. 에반이 다 먹었다는데.”
뭐가 남았어야 측정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결국 이 게임은 무승부로 판결이 났다. 없는 것과 6.8cm 남은 것을 어떻게 비교하냐고 한참을 실랑이하다 내놓은 답이 그것이었다.
“아! 에반 진짜. 그냥 거기서 조금만 남기지. 결국 마지막 게임까지 하게 만들어요.”
“해 져요. 빨리빨리.”
상준의 옆에서 이번엔 찬이 빨리 진행하라고 난리를 피웠다.
“가만히 있어 봐요. 제가 읽어 봐야 설명을 해 드릴 거 아닙니까.”
“진행자가 미리미리 봤어야지. 왜 이제 봐요.”
“아니. 남들 다 쉬는데 그럼 나도 쉬지. 난 일해요?”
“쉬면서 읽어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형, 형. 이리 와. 여기 조용히 좀 있어요. 이 시간에 다 설명했겠다.”
톰과 제리처럼 농담 따먹기를 하는 찬의 어깨를 잡아 제 옆에 세운 예찬은 그의 어깨에 한 팔을 얹어 아예 다른 곳으로 가려는 걸 막았다.
“이번 게임은 진짜 쉬운 게임. 제한 시간 내에 젓가락으로 콩을 더 많이 옮기는 팀이 승리하는 겁니다. 여기 양쪽 테이블에서 동시에 진행하도록 하고요. 한 명당 30초씩. 둘이 합쳐 1분 동안 옮긴 개수를 셀 겁니다. 제가 중간에 호루라기 불면 자리 바꾸세요.”
큐시트를 확인한 상준의 설명에 시우는 옆에 서 있는 에반을 어깨로 툭 밀었다.
너 아까 왜 그랬어? 라든가 그걸로 얼굴 붉히고 민망해하기보다 그냥 평소처럼 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과자 맛있디?”
“…….”
“한국 가서 많이 사 줄게.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지 몰랐지.”
시우의 말에 에반이 피식 웃었다.
“말만 해. 이 형이 종류별로 다 사 준다.”
“코코.”
어이가 없는 듯 웃던 에반이 슬쩍 몸을 숙이며 앞에 있는 테이블을 짚었다. 그러자 시우가 에반의 얼굴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번엔 시우가 가볍게 턱짓을 했다.
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할 테면 해 봐.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제작진이 건네는 젓가락을 본 찬이 제법 큰 목소리로 제작진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해도 정상적인 게임을 할 수 없는 것인가? 방금 제작진이 건넨 젓가락은 일반적으로 쓰는 젓가락이 아닌 튀김용으로 나온 기다란 나무젓가락이었다.
“과자 말고 키스해 줘.”
옆이 소란스러웠기에 시우에게만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였다.
와르르…….
“야! 너넨 왜 그래.”
정말 앞에 있는, 콩이 담긴 볼과 옮겨 넣을 빈 볼이 같이 있는 테이블을 엎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당황한 시우의 움직임에 넘어진 테이블과 사방으로 굴러가는 콩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