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음식 받으러 간 거 아녔어?”
갑자기 그의 벗은 몸을 본 시우는 슬쩍 시선을 돌리고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귀찮아서 가져다 달라고 했지.”
에반을 등지며 몸을 돌린 시우는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코 밑을 문질렀다. 분명 보디 제품 냄새가 아니다.
수시로 느껴졌다 사라지는 이 향은 에반의 것이 맞을 것이다.
에반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시우는 그가 굉장히 난감해하며 당황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에반은 머리의 물기를 다 털지도 않고, 티셔츠부터 챙겨 입었다.
시우는 테이블 위로 털썩 엎드렸다. 굳이 다른 곳을 보거나 그를 보지 않으려 하는 것보다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향이 사라짐과 동시에 제가 느끼던 감정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또 일어나기 시작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지만, 방금까지 맡은 향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를 가서 어떤 식으로 알아봐야 할까? 솔직하게 물어볼 사람은 에반뿐이다. 그는 분명히 무언가 알고 있었고 제게 그것을 말해 주려 했다.
처음엔 몰랐다. 하지만 아주 가끔 희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떤 향도 갑자기 느껴지다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나의 페어.’
오늘 계속해서 떠오르던 단어를 손끝으로 테이블 위에 적어 보았다.
페어. 에반. 나.
이번엔 에반과 나 사이에 페어라는 단어를 적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지만, 시우는 손끝으로 테이블 위에 낙서만 했다.
벨 소리가 들리고 에반이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렸어도 그대로 있었다.
“피곤하지?”
맛있는 냄새에 시우는 천천히 몸을 바로 했다.
티셔츠를 갖춰 입은 에반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물방울은 티셔츠 위로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조금. 하루 종일 나름 바빴잖아. 내가 할게. 머리나 닦아.”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백을 열어 보았다.
“그냥 편하게 있어.”
“됐네요.”
둘이 같이 움직이자 금세 테이블 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한가득 채워졌다.
“참, 다들 너랑 화해했냐고 묻더라.”
모르는 부분은 하나씩 찾고 맞춰야 했다. 여러 명에게 같은 내용의 말을 들었기에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런 에반과 싸웠다고?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문을 열고 나간다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싸우고 일주일을 떨어져 있었단다. 그사이에 화해한 것인가? 공항에서 다시 만난 에반은 평소 제가 알고 있는 그 모습과 똑같았다.
“싸울 일이 뭐 있다고?”
시큰둥한 에반의 목소리를 듣자 타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에 그동안 주고받은 메시지 같은 걸 확인하면 될 것이다. 얼마나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화해했는지 그런 것 말이다.
“루시퍼.”
에반의 질문에 시우는 들은 대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휴대전화를 들고 와 음악 플레이 리스트를 찾았다. 조용히 밥 먹는 것도 좋지만, 그냥 적당히 음악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형 형에게 말하기도 했는데, 네가 해야지. 시안을 조금 수정해야겠지만, 넌 잘할 거야.”
잔잔한 팝을 고른 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우의 오른손을 잡은 에반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예찬이 말할 때는 건성으로 들었지만, 에반에게 ‘루시퍼’를 하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그건 당연히 네가 해야지. 너만큼 잘할 사람 없는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몇 번이나 봤으니까, 볼 때마다 놀랐으니까.
포크를 쥐여 주더니 이번엔 스테이크를 제 앞으로 밀어 주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 이야기는 나중에. 지금은 밥부터.”
“그래. 일단 먹자. 먹어.”
포크를 움직이기도 전에 시우는 에반이 내미는 고기 조각을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 * *
“라이브 우리만 해요?”
예찬은 상준이 라이브를 한다는 소식에 그의 방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찬이 형은 씻고 온대. 어차피 주문한 음식 오려면 시간도 걸리니까. 넌?”
“저 아까 오자마자 씻어서 괜찮아요. 어. 벌써 방송 중이었어요? 안녕. 저희 여러분이 투표해 주신 화보 촬영을 하러 영국 왔어요. 뭐 시켰어요?”
넓은 테이블이 잘 보이는 위치에 휴대전화가 있는 걸 확인한 예찬은 손을 흔들어 보이곤 빈자리에 앉았다.
“이것저것 잔뜩.”
“누가 다 먹어요?”
“네가.”
“아까 찬이 형 배고프다고 했으니까, 찬이 형 많이 먹으라고 해요.”
“입 짧은 걔가? 잘도 많이 먹겠다.”
상준은 기타를 품에 안고 가볍게 손을 풀었다. 음식이 오는 것도 기다려야 했고, 접속자가 느는 것도 기다릴 셈이었다.
“여러분, 아시겠지만 찬이 형이 너무 안 먹잖아요. 이따가 오면 찬이 형 밥 많이 먹으라고 해 주세요. 그 형은 먹는 것도 귀찮대요.”
예찬은 상준의 옆에 앉아서 테이블에 있는 룸서비스 메뉴판을 한번 훑고는 라이브 방송이 비지 않게 말을 꺼냈다.
상준의 기타 연주에 따라 노래를 흥얼거리던 예찬은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다 상준에게 물었다.
“에반 형이랑 시우 형한테는 라이브 한다고 말했어요?”
“둘이 밥 먹는다던데.”
“둘이서요? 에반 형은 일주일 전에 영국으로 먼저 가서 지난번 라이브에도 없었잖아요. 그럼 제가 에반 형 방으로 가 보겠습니다. 다 같이 라이브 하는 것도 좋잖아요? 에반 형은 라이브 하는 거 모르니까, 몰래 가 봅시다.”
예찬은 고정해 둔 휴대전화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스태프들까지 같은 호텔에 투숙하여 한 층을 전부 빌려 외부인의 출입이 없었기에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처음 재형이 각자의 룸을 알려 줄 때 번호를 들어 놨기에 찾아가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에반 형은 호텔에 들어오면 철저하게 쉬는 편이잖아요. 분명히 같이 라이브 하자고 하면 거절하겠지만, 그래도 말은 해 보겠습니다. 아마 얼굴은 보여 줄 거예요.”
휴대전화를 고쳐 잡아 제 얼굴과 문이 잘 보이게 조정한 예찬은 에반의 방 앞에 멈춰 노크했다.
“형! 형! 빨리! 에반 형!”
장난스럽게 벨도 빠르게 여러 번 눌렀다. 그러면서 라이브 방송에 대고 조용히 해 달라는 뜻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술 가까이 대고 ‘쉿’ 소리를 내었다.
“왜.”
예찬은 예상대로 들려오는 무뚝뚝한 한 단어에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큭큭거리는 소리를 삼켰다.
“문 좀 열어 줘요.”
“싫어.”
이렇게 빨리 거절할 수 있나? 질문과 동시에 거절의 말이 들려왔다. 문 쪽으로 아직 오지 않았는지 그의 목소리가 멀리서 작게 들렸다.
“할 말 있어요.”
“내일 말하면 되잖아.”
둘의 대화가 라이브로 고스란히 나가고 있었다. 역시나 에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댓글이 무수한 가운데 그럴 거면 라이브 잘해 주는 시우의 방으로 가 달라는 말도 올라왔다.
“예찬이야? 문 열어 줘.”
처음부터 에반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을 알고 돌아서려던 예찬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럼. 시우 형에게 가 볼게요.’라는 말을 하려던 예찬의 놀란 얼굴이 그대로 나갔고, 갑자기 채팅창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수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이제 막 씻고 나왔는지, 머리가 촉촉이 젖은 채 아직까지 볼이 발간 시우가 눈을 깜박이며 예찬을 올려다보았다.
“문을 왜 열어 줘?”
여전히 에반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린다 싶더니, 테이블 쪽에 서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예찬의 얼굴을 보았지만, 이내 그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본 시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오해 진짜 싫은데, 같은 상황. 같은 일은 한 번이면 족했다.
“시우 형. 여기 있었구나.”
예찬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은 모두의 착각일까? 슬리퍼 끄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을 돌아 나오는 에반을 본 예찬의 동공이 떨렸다.
“에반 형! 라이브. 라이브.”
라이브 화면엔 지금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있는 시우의 얼굴이 나가고 있었지만, 예찬은 자신을 향해 오는 에반을 향해 급히 말했다. 미리 말하지 않는다면, 또 어떤 말을 할지 몰랐다.
“라이브 할 거였으면 좀 전에 말을 하지 그랬어. 니모~ 안녕.”
가까이 다가온 에반은 시우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예찬이 들고 있는 화면을 향해 팬클럽 이름인 ‘니모’를 부르며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시우와 제대로 밥 좀 먹으려는 찰나 예찬이 방해하긴 했지만, 지금 라이브가 나가는 상황에 불편함을 드러낼 만큼 방송을 모르지도 않았다.
“상준 형이 갑자기 시작해서요. 룸서비스 오면 먹으면서 뭐 편하게 이야기하자고, 찬이 형도 씻으면 온다고 하고. 어쨌거나 두 분 다 라이브 하러 오시죠.”
예찬은 얼른 제가 여기에 온 목적을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 라이브 하는 줄 알았으면, 좀 예쁘게 하고 있을걸. 이제 막 씻고 나와서…….”
시우는 라이브에 나가는 제 모습을 보고는 얼른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라이브에 놀라긴 했지만,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잠깐만 이거 무슨 냄새예요? 뭐 먹고 있었어요? 룸서비스가 벌써 왔다고요?”
시우가 에반의 팔뚝을 툭툭 치며 그를 몰고 안으로 들어가 공간을 만들어 주었기에 예찬은 따라 들어가다 테이블 가득 쌓인 음식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촬영 끝나자마자 주문한 룸서비스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여긴 벌써 와서 먹고 있다고?
하지만 이내 표정을 달리했다. 룸서비스가 아니라 외부 음식인 것 같았다.
“룸서비스 아니야. 근처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주문했대. 맛있어 보이죠?”
시우는 예찬의 자리를 만들며 라이브를 의식해 예찬의 말에 얼른 대답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이상하게 보일 만한 것은 없겠지? 그냥 에반의 룸이었고, 테이블엔 음식이 가득했다.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없는 것을 확인한 시우는 예찬의 옆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