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어릴 적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학교 끝나면 집에 가방만 던져 놓고 우르르 몰려가기도 했고, 친한 친구 집엔 가방을 멘 채로 가기도 했다.
맞벌이하시느라 바쁘신 부모님 대신 이웃집에서 저녁을 먹는 일도 허다했다.
그땐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정원 가운데 있는 테이블엔 맛있는 과일과 과자가 잔뜩 쌓였다. 커피, 홍차, 음료까지 다양한 마실 거리가 즐비한 공간에 다섯 사람이 둘러앉았다.
에반의 부모님과 에반, 시우. 그리고 집사님까지.
시우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손바닥에 촉촉이 배어 난 땀을 닦았다.
에반의 어머님이 한국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것에는 그리 놀라지 않았지만, 영국인 아버님과 집사님까지 그 누구도 이곳에서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CF와 화보 촬영 끝나면 바로 한국 들어가는 거야?”
“네. 2집 준비해야죠.”
“아들 얼굴 보기 힘드네.”
“저보다 어머니가 더 바쁘셔서 그럴걸요.”
아, 엄마 보고 싶다. 우리 엄마는 뭐 하고 계실까?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던 시우는 자신의 허벅지를 건드는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넌 또 언제 왔니? 에반에게 혼나고 잠시 모습을 보이지 않던 러쉬가 어느새 제 옆에 앉은 채, 코끝으로 다시금 허벅지를 툭 건드려 왔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커다란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 테이블 위에 있는 비스킷 쪽을 가리켰다.
너 지금 저 비스킷을 나에게 달라고 하는 거니? 솔직히 이곳이 나에겐 엄청 숨 막히는 곳인데. 나도 앉아 있기 힘든데?
“시우 군은 활동하는 데 힘든 거 없어요? 퍼포먼스가 정말 힘들어 보이던데.”
러쉬와 눈빛으로 서로 의사를 주고받던 시우는 어머님의 말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인위적이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열심히 해야죠.”
“예찬 군이나 에반이 보다가 시우 군 보면 진짜 팔랑팔랑 날아갈 것 같아서 그러지.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에반에게 말하든가 소속사에 말해요.”
“네. 그러겠습니다.”
어쩜 이리도 다정하실까? 아마도 어머님의 성격을 닮아 에반도 다정다감하고 남을 잘 챙기는 것 같았다.
“멤버들 다 들어온 거면 하루 집으로 초대하지 그러니?”
잠시 제게 쏠린 시선이 다시 에반에게 향하자, 속으로 한숨을 삼킨 시우는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주스 잔을 집었다. 목이 탄다, 목이 타.
“스케줄 봐서요. 단체로 놀러 온 것도 아니니까. 아버지는 별일 없으시죠?”
시우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주스 잔을 잡자마자 밑에서 또다시 러쉬가 은밀한 거래를 제안해 온 탓이었다. 아니 여기 너희 가족 다 있잖아. 왜 나한테 그래. 에반에게 말해.
“러쉬. 넌 왜 계속 시우 군 괴롭히고 그래. 비스킷은 안 돼.”
분명히 테이블 아래에서 일어나는 물밑 작업이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아신 것인지 어머님이 정확히 지적하셨다.
“아, 아니에요. 그냥 러쉬가 장난치는 것 같아요.”
왜 여기서 자신이 이 집 개를 대변하고 있을까?
“러쉬도 록시도 시우 군을 좋아해서 다행이네요. 혹시 영국 오면 에반이 없더라도 언제든 놀러 오고 해요.”
시우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티타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계속 허벅지를 건들던 러쉬는 포기했는지 나중엔 그냥 시우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얌전히 있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말을 하고, 활동에 관한 이야기도 잠시 나눴다.
에반의 부모님이 먼저 일어나고 덩그러니 둘만 남은 공간에서 시우는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7월 초지만 그리 덥지 않았고, 노을 지는 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제 가야겠지?”
러쉬의 머리를 쓸어 주던 시우는 다리를 꼬고 앉아 홍차를 마시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래야지.”
“이 집 정말 예쁘다. 말도 보고 싶었는데.”
“말도 있고, 호수도 있지. 오고 싶을 땐 언제든 와도 돼.”
“무슨 소리야?”
“어머니도 허락했잖아.”
“넌 참 쉽구나.”
길게 쭉 뻗은 다리를 흔들거리며 시우는 피식 웃었다. 시우가 아는 보통 집이었다면 얼씨구나 좋다구나 그럴게, 라고 대답하겠지만. 이곳은 제게 가장 어려운 곳이었다.
부모님이 따스하게 맞아 주셨고, 동물들까지 저를 좋아해 줘서 좋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룹 멤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도 안 쉬워.”
“장난쳐? 네가 어려운 게 뭐가 있어? 작사, 작곡 다 되지. 춤도 되지. 비주얼도 되지. 배경 빵빵하지. 거기다 넌 알파잖아. 골든 알파. 세상 다 가졌네. 와~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세상 엄청 불공평하네.”
시우는 러쉬의 얼굴을 잡고 마구 비비고 문지르며 장난을 쳤다. 처음에는 그리 무섭더니 괜한 선입견이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록시에게 싸대기를 두들겨 맞아도 흥. 지금 얼굴이 찌부러져도 신경도 안 쓰는 놈이었다.
“그럼. 네가 가질래?”
시우의 말이 가벼운 만큼 에반의 대답도 가벼웠다.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시우는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리 보고 있었을까? 러쉬와 노느라 느끼지 못했었다. 가벼운 말투와 달리 에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뭘 내가 가져. 가진다고 가져지는 거냐? 그런 게?”
“날 가지면 되잖아. 그럼 그런 것들 다 부수적으로 따라가는 건데. 네가 가져, 나.”
“너 그거 엄청 이상한 말인 거 알지?”
“알아.”
“알면 됐다. 이제 가자. 저녁에 뭐 촬영한다고?”
“에피소드.”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걷자, 마치 호위라도 하는 듯 러쉬가 그의 옆에 딱 붙어 걸었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로 기억될 것 같았다.
* * *
“에반이 3호, 시우 4호. 짐 풀고 7시까지 1번 방으로 모여.”
에반과 함께 호텔로 들어오자마자 마중 나온 재형은 저녁에 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에피소드 찍은 후, 식사는 각자 알아서 룸서비스로 해결. 내일 아침 7시에 기상해 화보 촬영이라고 했다.
재형에게 룸 카드를 받아 4호로 들어간 시우는 자신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캐리어를 물끄러미 보았다. 혼자 쓰는 방인데 싱글 침대가 두 개야? 옷을 벗지도 않은 채, 침대 하나에 풀썩 쓰러졌다.
침대가 하나였다면 외출복을 입은 채 뒹구는 일은 하지 못하겠지만, 침대가 하나 더 있기에 아무렇지 않게 그런 행동을 강행했다. 푹신한 침대가 출렁이다 멈추고 깔끔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긴 시간 비행에 시달리고, 긴장 상태로 에반의 집에서 지냈던 몸이 이제야 나른하게 풀렸다. 그냥 이렇게 30분만 누워 있다 나가자. 짐을 풀거나 하는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형.”
하지만 시우가 원한 휴식은 그리 길지 못했다. 벨 소리와 함께 예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어 준 시우는 곧장 몸을 틀어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한 팔을 들어 눈을 가려 빛을 차단했다.
“괜찮아요?”
오늘 내가 괜찮냐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던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예찬은 태연하게 침실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
“별일 없었죠?”
“별일 있어야 해?”
“아니. 그게 형이랑 에반 형이 둘이서 어디 갔다니까 신경 쓰여서 그렇지. 어디 가서 뭐 했는데요?”
“에반이 집.”
“헐.”
“헐?”
“완전 헐이지. 둘이 일주일 전에 그렇게 싸워 놓고. 화해했구나! 아. 진짜 잘 생각했어요. 에반 형이 좀 냉정하고 FM이긴 하지만, 할 땐 제대로 하잖아요.”
힘없이 누워 있던 시우의 눈이 뜨였다. 에반이가 뭐? 지금 예찬이 하는 말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션 불화. 에반과 자신의 불화가 사실이었다고? 팬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 사실이라고? 지금 예찬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예찬이 너 말이 좀…….”
말이 심하다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누구 편을 들 수도 없고 섣불리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딴 게 아니고 ‘루시퍼’. 그거 형이 해요. 난 형이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
시우는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천천히 치웠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루시퍼’. 다음 앨범 곡이 ‘루시퍼’라고? ‘루시퍼’는 당연히 에반이었다. 그만큼 완벽한 ‘루시퍼’는 어디에도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검은색으로 꾸며진 에반의 어두운 초록 눈동자가 떠올랐다. 거기다 그의 키만 한 날개를 떠올리자 지금도 소름이 돋았다.
그 퍼포먼스는 두고두고 회자되었고, 오션이라는 이름과 에반이라는 존재를 완벽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루시퍼는 에반이지. 뭔 소리야.”
“에반 형이랑 그렇게 싸워 놓고도 아직 그 말이 나와요? 서로 ‘루시퍼’ 하라고 아주 연습실을 뒤집었잖아. 와. 난 지금도 싸우다 말고 벌떡 일어나 나가 버린 에반 형 뒷모습만 생각하면 오싹해. 오늘 그거 둘이서 해결하고 온 거 아니에요?”
“……그런데 갑자기 넌 왜 내가 ‘루시퍼’라는 거야? 곡을 보고 분위기를 봐. 딱 에반이지.”
머리가 지끈거려 시우는 주먹을 쥐고 제 머리를 통통 두들겼다.
“아까 재형 형이랑 이야기했는데, 오늘 아침에도 에반 형이 형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내 이야기도 나왔다고 해서. 어쨌거나 난 아니고. 형이나 에반 형이 하는 게 맞는데. 에반 형이 하면 진짜 멋있긴 할 거 인정. 그런데 난 형이 ‘루시퍼’ 하는 거 보고 싶어요.”
“그거 나중에 전체 회의 할 때 다시 말하자. 나 머리 아프다.”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콘셉트 회의 할 때 자세히 나눠야 할 부분이며, 어떻게 보면 일개 멤버가 하겠다 말겠다 말할 내용도 아니었다. 최대한 합의를 하겠지만, 소속사의 결정이 가장 큰 부분이었다.
“알겠어요. 조금 있다가 봐요.”
예찬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시우는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웠다.
지금 에반과의 관계를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은 오션의 멤버였고, 생각지도 못한 톱 아이돌의 길에 적응하는 게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