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70화 (70/187)

70화

“너 숙소에서 어떻게 살아? 안 갑갑해?”

“기숙사에서도 살았는데 거기서 왜 못 살아?”

킹사이즈보다 더 크고 넓은 침대가 방 가운데 있었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커튼이 커다란 창에 드리워 있었다. 자신이 아는 에반은 무채색을 좋아했는데, 이곳은 금색과 미색, 갈색이 가득했다. 중세 시대의 침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네 취향은 아닌 거 같다.”

침실로 들어간 시우는 천천히 둘러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발아래 푹신하게 밟히는 카펫은 물론 창가 쪽 테이블에 있는 화려한 꽃병과 싱그런 꽃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곳에서 자면 어떤 기분일까?

침실엔 커다란 벽난로도 있었다.

“어머니 취향이긴 하지.”

“벽난로도 진짜 쓰는 거야?”

벽난로 앞으로 다가간 시우는 한쪽에 장식품처럼 놓여 있는 부지깽이를 만져 보았다.

“고성의 문제점이 뭔지 알아? 아니, 영국 전체의 문제점이라고 말할게.”

“난방이 안 돼?”

“빙고. 침대가 저렇게 큰 이유도 거기에 있지. 과거엔 너무 추워서 개 대여섯 마리와 같이 잤다잖아.”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에반을 보는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리 리모델링을 한다고 해도 한국처럼 바닥에 난방을 다 깔지도 못하고. 에어컨이나 히터로 온도를 조절하긴 하지만 고성 전체를 난방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에반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여긴 봄, 여름, 가을. 난방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시즌에 지내는 곳이야. 솔직히 시내와도 거리가 있어서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거든. 여긴 욕실.”

집 구경을 시켜 준다며 앞장서는 에반을 따라 걸어간 시우는 방 한쪽에 있는 문을 통해 넓은 욕실도 보았다.

욕조는 창 옆에 있었다. 유연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욕조 앞으로 다가간 시우는 창밖을 보았다. 욕조가 창 옆에 있다고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긴 했다. 이런 사유지에 드론이 날아다닐 것도 아니고, 보이는 건 넓은 정원뿐이었다.

그리고 시선을 들면 시가지가 펼쳐졌다.

이 욕조엔 진짜 장미꽃이 떠 있어야 할 것 같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돌아서던 시우는 주춤거렸다. 둘 사이에 거리가 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너 짐은 다 쌌어?”

어색함에 시우는 사선으로 고개를 내리고는 손을 들어 볼을 긁적였다.

“보여 주고 싶었어.”

“뭘?”

무심하게 대답하며 시우는 슬쩍 그의 앞에서 벗어났다. 대리석 세면대와 그 앞에 있는 커다란 거울에 둘의 모습이 비쳤다.

거울을 보고 서 있는 자신과 뒤쪽에 서 있는 에반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우린 참 다르구나. 토종 한국인인 자신과 혼혈인 에반이 풍기는 외적인 이미지도 완전히 달랐다.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둘을 본 적이 없다.

늘 그의 얼굴을 보았지, 한 프레임 안에서 보자 기분이 묘했다.

“…….”

에반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고, 그는 시우의 뒤로 섰다. 거울 속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 시선을 피하고 거울 속에서 움직이는 건 에반이었다.

목석같이 굳어 있는 시우의 얼굴 옆으로 에반의 얼굴이 내려왔다.

“내 세상.”

시우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았다. 물 흐르듯 유연하게 움직인 에반은 분명 시우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고, 그가 하는 말을 시우는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더 숙인 에반의 입술이 드러나 있는 시우의 목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정말 움직이다 실수로 닿았다.

“나 짐 정리 좀 할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에반이 유유히 거울에서 사라졌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거울 속에 혼자 남은 시우의 얼굴과 귀는 한껏 붉어져 있었다.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다가 욕실을 나온 시우는 침실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지나쳤다. 그리고 처음 제가 있던 공간으로 왔을 때야 참고 있던 숨을 쉬었다.

처음 앉아 있던 소파 가까이 가자 소파 옆 테이블엔 시원한 레모네이드와 비스킷이 놓여 있었다. 어디에서도 에반은 보이지 않았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쓰러지듯 소파에 주저앉은 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과 귀 끝에서 열기가 가시고 나서야 두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물방울이 맺혀 있는 레모네이드 잔을 들었다.

적당히 시원했고 적당히 상큼했으며 적당히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순식간에 반이나 비워 냈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시우는 창을 열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들어오며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날렸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연의 싱그러운 향을 품은 바람은 심란한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고 밖을 보는 시우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제일 걱정 많이 했던 것이 에반과의 만남이었다.

익숙하고도 편안한 느낌이 시우의 몸을 감쌌다. 그와 함께 있을 땐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같은 공간을 공유해도 어색하지 않고 불편함이 없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시우는 시선을 소리가 나는 곳으로 옮겼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든 에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에반이 어디론가 갔다가 올 때마다 손에 옷이나 짐이 들려 있고, 그것이 가방에 차곡차곡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아니.”

“심심해?”

“아니.”

“조금만 기다려. 얼른 짐 싸고 밥 먹고 난 뒤에 집 구경 시켜 줄게.”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앉은 에반이 시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나만 불렀어. 멤버 다 부르지. 불렀으면 멤버들도 좋아하고 어머님도 좋아하셨을 것 같은데.”

“너니까.”

시우는 눈을 깜박였다.

“코코. 네가 먼저라고.”

대답하는 대신 시우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렸다. 진짜 성격은 안 변하는구나. 에반은 그대로인데 이런 작은 것 하나에도 일희일비하는 제가 우스웠다.

다시 방 안엔 침묵이 맴돌았다. 그가 짐 정리 하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내일 촬영 어떨 것 같아?”

침묵을 깬 것은 시우였다. 정보가 없으니 이런 시간에 조금이라도 습득해야지. 인터넷 검색을 해 봐야 과거에 대한 설명이고 팬들의 입장에서 쓴 것이었다.

당장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지금 2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이런 것들은 관계자들만 아는 극비였다.

“평소랑 똑같겠지. 아까 공항에서도 카메라 돌고 있었잖아.”

“피곤해.”

“카메라 도는 거?”

어떻게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지만, 시우는 어떤 정보도 알아내지 못했다. 여기서 어떤 촬영이냐고 상세하게 말해 달라 이런 말을 하면 에반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오늘 아침 눈뜨는 순간부터 영국 공항 입국장에서까지 멤버들은 계속해서 괜찮냐는 말을 엄청나게 해 댔으니까.

“컹.”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대답을 미적거리던 시우를 구해 준 것은 개가 짖는 소리였다. 일단 소리가 먼저 들렸고, 다음으로 살짝 닫혀 있던 방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러쉬!”

개가 짖는 소리가 나기에 문 쪽을 보고 있던 시우가 어떤 행동을 할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에반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과 동시에 시우는 어마어마한 것의 습격을 받아야만 했다.

문을 열고 거대한 것이 날 듯이 공간을 침범했다.

검고 큰 것이 자신을 덮치는 순간, 시우의 입에선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러쉬! 당장 내려와.”

에반의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온몸을 짓누르던 묵직한 것이 사라지자, 그제야 시우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하지만 이번엔 편안히 내리고 있던 다리까지 끌어 올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야만 했다.

거짓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태어나서 이렇게 큰 개는 처음 봤다. 개가 맞기는 한 걸까? 시커먼 색의 동물은 자신을 보며 눈을 반짝였고, 커다란 입으로 컹컹거리며 짖을 때마다 시우의 몸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엎드려.”

그래도 말을 듣기는 하는 놈인지 바닥에 엎드리는 걸 본 시우는 개와 에반을 번갈아 보았다. 에반이 저렇게 무서운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가. 단번에 커다란 개를 복종시키는 모습이 조금 멋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미안. 얘가 이런 애가 아닌데. 러쉬, 왜 그래? 경계심이 강해 쉽게 사람에게 다가가지도 않지만, 허락 없이는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거든.”

큰 손으로 개의 머리를 툭툭 치며 하는 그의 말에도 시우는 섣불리 다리를 바닥으로 내릴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커 보였다.

설마 지금 그거 하품이니?

커다란 입이 쩍 벌어지면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는 순간, 시우는 눈도 깜짝할 수 없었다. 물렸다가는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황천길은 아무렇지 않게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런 놈을 키우는 거야?

“으아아…….”

방금 하품을 끝낸 개가 자신 쪽으로 주둥이를 디밀자, 시우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소파로 바짝 몸을 붙였다. 킁킁거리는 콧김에 옷깃이 살짝 날렸다.

난 고양잇과지 갯과가 아니라고.

“러쉬, 그만해. 코코가 불편해하잖아. 누누이 말하지만 넌 록시가 아니야.”

에반이 손끝을 세워 보이며 말하자, 앓는 소리를 내며 개가 엎드렸다. 웬만하면 강아지라 불러 주겠지만 저 덩치와 외모를 보았을 때 절대 그렇게 부를 수가 없었다.

“야옹~”

이건 또 뭐야. 커다란 개에 정신을 놓고 있던 시우는 작은 고양이 소리에 또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 앞에 얌전히 앉아 새초롬하게 야옹거리고 있는 하얀 고양이를 보는 시우의 얼굴에서 긴장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시우와 시선이 마주친 고양이는 살며시 일어나 도도하게 걸어왔고, 허락 같은 건 구하지도 않고 소파 옆으로 냉큼 올라왔다. 이 집 동물들은 다 이런가?

“록시도 왔네.”

무언가 허탈한 감정이 들어간 에반의 말에 시우는 조심스럽게 안고 있던 다리를 바닥에 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양이가 허벅지 위를 차지했다.

순간 시우의 다리를 건들려는 것인지 발을 만지고 싶은 것인지 허공에 떠 있는 개의 앞발이 보였다.

“…….”

이렇게 보니까 좀 순해 보이는 것도 같고, 이제야 개가 이 방에 난입한 이후 제대로 눈을 보게 된 시우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결국 허공을 맴돌던 커다란 앞발이 시우의 발 위에 살포시 놓였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