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한참을 달리던 차가 한적한 길로 접어들고 아름다운 오솔길을 따라 달렸다.
오솔길에 들어서자 차창을 연 시우는 신선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자동차 CF의 한 장면 같았다. 잘생긴 드라이버와 멋들어진 풍경의 조화는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 오솔길을 따라가다 커다란 문을 만났을 때도 시우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한국에도 이런 교외에 풍경 좋은 맛집들이 많았으니까.
커다란 철문을 만났을 때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에반은 클랙슨을 누르지도 않았고,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철문은 조용히 열렸다.
예약이라도 해 둔 것인가?
그렇게 철문을 통과해 차로 한참을 들어갈 때도, 시우는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기쁨을 누렸다. 그나마 한 생각이라고는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니 맛이 좀 없어도 이해하겠다는 것 정도였다.
“…….”
영화에서나 보던 고성이 눈에 들어올 때부터 시우는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껏 혼자 흥얼거리던 허밍도 멈췄다.
성 가운데 있는 커다란 분수대를 빙글 돌아 정문으로 보이는 곳 앞에 차가 멈췄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려는 찰나 조수석 문이 열렸기에 깜짝 놀란 시우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에반에게 질문을 할 시간이 없었다. 조수석 문을 연, 제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중하게 제게 인사를 건네 오자 시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무조건 차에서 내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
급히 에반에게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이미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섰을 때야 시우는 무언가가 확실하게 잘못됐음을 인지했다.
육중해 보이는, 양쪽으로 열리는 커다란 문이 열렸고, 그곳에서 우아한 중년 부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 어디야?”
차에서 내린 시우는 어느새 제 옆에 와 있는 에반을 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
“……밥 먹으러 간다며.”
“응. 우리 집 밥 맛있어. 왕실 수석 조리사 출신 요리사가 있거든. 거기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뭐든 상관없이 다 먹을 수 있어.”
그냥 조용한 곳에서 맛있는 밥을 먹자고 했는데, 집으로 와?
“아. 그리고 이 집이 내가 알기론 지어진 지 200년 정도 됐을 거야. 실제로 왕족의 별장으로 쓰인 성이기도 하고.”
웅장하다고 생각했다. 이 성을 가까이서 보는 순간, 왜 커다란 철문을 지나쳤는지도 이해했다.
그런데 이 성이 에반의 집이라고?
“음. 표정 보니 놀란 것 같은데, 언제 뽀뽀해 줄 거야? 고성. 맛있는 음식이 있는 조용한 곳.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것 같은데.”
옆에서 에반이 떠드는 소리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고 계시는 중년 부인을 보는 순간 시우는 이미 깨달았다. 저분이 누구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런 엄청난 외모를 가지신 분은 쉽게 볼 수 없으니까, 그리고 제 옆에 있는 사람과 제법 많이 닮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방금 에반이 당당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집이라고.
“에반이는 촬영 나간다더니, 갑자기 어떻게 온 거야? 시우 군, 어서 와요. 우리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죠?”
한국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것에 잠시 놀란 시우의 머리는 삐걱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에반의 어머님이 한국분이셨던 것을 겨우 찾아냈다. 굉장히 이국적으로 생기셨는데, 한국분이시구나. 이런 생각도 잠시.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는 말에 온몸의 솜털이 삐쭉 섰다.
그럼 다른 방법으로는 뵀다는 것인가? 이건 기억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짐을 안 챙겨서요. 짐 챙겨서 저녁 전에 호텔로 복귀해야죠. 시우가 맛있는 거 먹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죠. 우리 집만큼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곳도 없잖아요.”
“안…… 안녕하세요.”
어정쩡하게 서 있던 시우는 그녀가 가까워지자 일단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부터 했다.
“화상 통화 할 때도 느꼈지만, 시우 군은 정말 인사성도 밝지. 먹고 싶은 것 있어요? 저녁까지 복귀하는 것이면 시간적 여유가 좀 있겠네요. 아! 내 정신 좀 봐. 그이도 지금 잠시 들어오라고 해야겠다. 다 같이 티타임을 갖는 것도 좋잖아요.”
네? 잠시만요, 어머님?
바쁘실 것이 분명한 에반의 아버님을 부르신다고요? 겨우 저와 티타임을 하기 위해서요? 도대체 왜요? 글로벌 기업의 대표이신 분이 그렇게나 한가한가요?
흔들리는 동공으로 시우는 에반을 애처롭게 올려다보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에반뿐이었다.
그래, 친구 집에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같이 밥을 먹거나 다과를 먹는 경우가 있긴 있어. 충분히 있는 일이야. 그런데 내가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돼서.
그러니까 이건 마치 뭐랄까. 우리 친구 맞지? 어머님이 날 이렇게 반겨 주시는 게 왜 이상하게 느껴질까? 에반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런데 왜 굳이 어머님이 계단을 다 내려오셔? 그냥 우리가 올라가자.
그래. 너도 짐을 챙겨야 하니까 들어가서 네 짐만 가지고 나오는 게 어떨까?
혼란에 빠진 시우는 손끝으로 에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렇게 서 있지 말고 뭘 어떻게 하자고. 좋아. 이거 혹시 내가 모르는 나와의 약속이니? 그런 거야?
“티타임 좋죠.”
에반이 자신을 보며 윙크를 하는 순간 시우는 혀끝을 깨물었다. 도대체 누가 뭐라고 내게 설명 좀 해 줘! 아니면 차라리 이게 꿈이라고 해 주든가!
소리 없는 절규는 시우의 입 안에서 메아리쳤다.
* * *
결국 계단을 다 내려오신 에반의 어머님께 끌어안겨 볼 인사를 나눴고, 차 문을 열어 주신 분의 안내를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로비를 지나 카펫이 깔린 계단을 지나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편하게 쉬십시오.”
여기 영국 아니었던가요? 분명히 영국인으로 보이는 분의 완벽한 한국어를 들으며 시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의 침실로 보이는 공간.
그가 어떤 질문을 하기도 전. 안내해 주신 분은 문을 닫고 방을 나가셨다.
“…….”
아치형의 커다란 창을 통해 환한 햇살이 가득 들어왔다. 소파와 책상, 책장이 있는 공간을 보아하니 누군가의 서재로 보였다. 침대는 어디 있지? 침실이 아닌 접객실 이런 곳으로 안내해 준 것인가? 방 가운데 덩그러니 선 채 주위를 둘러보던 시우는 슬금슬금 움직여 소파로 향했다.
푹신한 일인용 소파 끝에 살짝 걸터앉은 시우는 커다란 눈만 도록도록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정리를 해 보자.
아침에 눈을 떴더니 스무 살로 회귀했고, 데뷔 1년 차 오션의 멤버임도 확인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영국까지 왔고, 지금 자신은 에반의 집에 있었다.
잠시 후엔 에반의 부모님과 티타임을 가질 예정이다.
에반이 엄청난 집안의 아들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고성에 살고 있는지는 몰랐다.
순간 에반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확 와닿았다.
같은 그룹의 멤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사이라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에반과 자신은 다른 것이다.
내가 이런 엄청난 사람과 썸을 탔구나.
가슴이 간질거려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 위를 벅벅 긁었다.
까딱하면 막장 드라마를 찍을 뻔했다. 그런 관계가 계속되고, 갑작스럽게 회귀하지 않았다면, 에반과 자신의 관계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깊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 만약 그런 사이가 됐다고 치자.
끝은 뻔했다. 연애는 하겠지, 연애는. 행복하겠지, 잠시는.
결혼은 비슷한 사람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알파와 베타라는 형질을 떠나서, 태생부터 다른 둘의 끝은 결국 파국이었을 것이다.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뻗쳐 나가자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원래 약속되어 있던 걸까? 매니저 형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과 에반의 동행을 허락했다. 다른 멤버들도 왜 둘만 가냐는 그런 말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오션을 검색했다.
분명 둘의 관계성은 좋지 않았다.
[에코 진짜 얘네 뭐야?]
시우는 이곳에서도 별명이 코코였다.
그 이유로 쿼카를 닮았다는 설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에코라고 부르는 것이구나. 소속사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팬들이 그렇게 불러 주시는지는 지금 상황에서 알 방법이 없었다.
한쪽에서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둘을 그렇게 줄여서 부르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에반이 자신을 대하는 것을 봤을 때, 둘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건 억측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둘이 앙숙이었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것 같다.
역시 뭐든 겪어 봐야 했다. 지금부터는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믿고 행동해야 한다. 여러 번 회귀를 거치면서 배운 것이 그것이었다.
혼자 지레짐작하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
에반과 자신의 사이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시우의 손끝이 분주히 움직였다.
직접 겪긴 해야 하지만 그래도 선행 학습은 조금 해 둬야 하잖아.
스스로 합리화한 시우의 시선이 한 곳에 닿았다.
찬찬은 뭐야.
이 찬과 예찬을 묶어서는 찬찬이라 부르네.
“점심은 조금 기다리면 될 거야.”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에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시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시우는 자신을 보며 싱긋 웃는 에반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얘는 그냥 존재 자체에 까방권이 있었지.
“야. 너는 갑자기 날 여기 혼자 두고!”
그래도 서운함을 담은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우리는 친하니까.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 보기에 정말 친했으니까 원래 그를 대하던 대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미안. 여기가 내 방이야.”
소파 앞에 서 있는 시우나 문 앞에 서 있는 에반이나 둘 사이는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네 방이라고? 침대가 없잖아.”
“이쪽.”
에반이 방 한쪽에 있는 문으로 걸어가자 시우는 저도 모르게 그리 다가갔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안을 들여다본 그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