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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68화 (68/187)

68화

자신은 오메가가 아니다. 휴대전화를 꺼내 다시 오션을 검색했다.

프로필에 베타라고 정확히 적혀 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슬픔이다. 그 아래 아주 미약하게 기쁨과 반가움이 숨겨져 있지만, 가장 많이 드리운 것은 고통 스민 슬픔이었다.

오른손이 그에게 잡혀 있었기에 시우는 왼손으로 어색하게 제 왼쪽 가슴을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에반을 응시했다.

이 감정 내 거 아니지? 네 거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랫입술 안쪽 여린 살을 깨무는 것이 고작이었다.

몇 시간 전이라면 당당히 물었을 것이고 답을 알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공기 중에 잔잔하게 스며 있던 향이 점차 짙어졌다. 핸들을 잡고 있는 에반의 손끝이 일정한 리듬을 타고 움직였다. 침묵만 가득한 공간에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코코.”

굳게 닫혀 있던 에반의 입술이 움직이며 시우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로 익숙한 단어를 꺼냈다.

엉켜 있는 단어가 제멋대로 튀어 나갈 것 같아 시우는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보았다.

“나 피곤해. 여유롭게 풍경 구경 하면서 맛있는 걸 먹을 만한 곳 있을까?”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던 감정이 사라졌다. 동시에 짙어졌던 향도 흩어졌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제가 느낄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다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으려면 우리에겐 어떤 시간이 필요할까?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기에 표정을 숨길 수 있는 시우는 혀끝을 내밀어 바싹 마른 입술을 훑었다.

“일등석 아니었어? 아. 그냥 전세기 띄울 걸 그랬나?”

“비행은 편했어. 그냥 조금 쉬고 싶은 거야.”

너 때문에 그렇다고, 갑자기 회귀해서 그렇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쉬는 건 둘째 치고 맛있는 것이라.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

시우의 말에 에반은 긴 한숨부터 쉬었다. 그리고 이내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 왔기에 시우는 어깨만 으쓱했다.

“나 영국 처음이야. 네가 다 알아서 해.”

서울과 다른 풍경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며 시우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잠시만 이렇게 있을게. 아직 내게 시간이 필요해서.

널 보듬고 챙기기엔 내가 좀 힘들어.

어쩌겠는가. 또 회귀한 것을. 그렇다면 이번 삶 역시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야 했다.

에반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창밖만 보던 시우는 슬쩍 눈동자만 굴려 에반을 훔쳐보았다.

앞만 보고 운전하는 그의 옆모습이 너무 낯익다. 며칠 전에도 이랬으니까.

둘은 그대로다.

달라진 건 상황이다.

지금은 변해 버린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둘은 서로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랬기에 에반을 순순히 따라가는 시우도, 순순히 따라오는 시우를 데리고 움직이는 에반도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자율주행이 시작된 이후 둘은 손깍지를 풀지 않고 있었다. 자율주행을 풀고 에반이 직접 운전할 때는 잠시 멀어졌지만, 자율주행 모드에 들어가면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찾았다.

“에반.”

“응.”

“에반.”

“응.”

“에반.”

“왜?”

시우는 계속 그를 불렀고, 몇 번 같은 대답을 하던 에반의 시선이 잠시 잠깐 시우에게 닿았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그냥 그를 부르고 싶었다. 짧은 대답을 들으면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어디 가?”

계속 그의 이름만 부를 수는 없었기에 시우는 질문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대답이 아닌 옅은 미소가 돌아왔다.

“뭐야. 어디 가냐고?”

또다시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었다.

“야! 에반 루이스!”

“말하면 알아?”

장난 어린 목소리에 시우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뭐?”

가 보면 안다는 말을 끝으로 에반은 목적지를 말해 주지 않았다.

신호에 걸리자 차를 멈춘 에반은 시우에게 시선을 두었다.

낯선 거리를 보느라 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시우를 보는 에반의 얼굴에서 연하게 깔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

이내 무표정으로 변한 그의 턱선이 도드라졌다. 어금니를 질끈 깨문 것이다.

시우를 보기 전까지 뒤죽박죽이던 기분은 지금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회귀 시점이 바뀐 것이 불안하긴 했다. 상황이 변한 것이 찝찝하기도 했다.

그리고 입국장 문이 열리고 제게로 걸어오는 시우를 보는 순간 무엇이 자신을 이리도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확실하게 알았다.

사라졌다.

시우의 주위에 항상 맴돌던 상큼하고 달콤한 자두 향. 자신의 기분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던 그의 페로몬이 사라졌다.

가까이 다가갔지만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이제 자신은 시우를 느낄 수 없다. 그의 감정을, 그의 페로몬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와 함께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의 감정을 읽고 그의 분위기를 보며 그에게 맞춰 왔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 둘의 관계부터 모든 것이.

그리고 모르겠다.

김시우. 그가 자신의 페어인 히든 오메가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루했는지 시우가 작게 하품을 했다. 그러고는 멋쩍은지 슬쩍 웃는 모습을 지켜보는 에반의 페로몬이 제멋대로 출렁거렸다.

시우와 단둘이 있을 때면 에반은 자신의 페로몬을 제어하지 않았다. 자신의 페로몬을 알아봐 줬으면 하는 욕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는 그 모습에 실망하는 것도 제 몫이었다.

“에반.”

방금까지 창밖을 보고 하품을 하던 시우의 시선이 제게 닿았다.

그리고 에반은 날뛰던 페로몬을 숨겼다. 저도 모르게 나온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페로몬을 숨기도록 교육받는 알파와 오메가였기에…….

자신이 페로몬을 거둠과 동시에 시우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시우는 한 손으로 자신의 코와 턱을 문지르고 있었다.

시우의 모습이 변해 있었다. 염색이나 파마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듯 참하던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은 연갈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파마라도 한 듯 곱슬곱슬했다. 아주 귀여운 갈색 푸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곱슬곱슬 부드럽고 폭신할 것 같아 만져 보고 싶은 그 동글동글한 뒷머리를 보던 에반의 시선이 이번엔 그의 귀에 닿았다.

주렁주렁 달려 있는 화려한 귀걸이를 보자 자신을 휘감고 있던 불안함과 초조함이 서서히 사라졌다.

시우는 시우다.

그는 제가 아는 코코였다.

장신구를 좋아하는 것도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모든 것이 제가 아는 시우임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변한 것이 없음을.

“왜, 코코?”

한발 늦은 질문에 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기에 에반은 천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어 액셀을 밟았다.

시우가 자신을 대하는 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예찬의 말대로 비행이 힘들었는지 처음엔 피곤해 보였지만, 이내 평소의 모습을 보였다.

방금까지도 둘은 평소 하던 대로 이야기를 나눴다.

페로몬이 사라졌다고 해서, 시우가 히든 오메가가 아니라고 해도 변한 것은 없다.

그는 자신의 페어이다.

굳어 있던 에반의 얼굴이 서서히 풀렸다. 성급할 필요가 없다.

언제 또 회귀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닐 것이다.

그럼 됐다.

시우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됐다.

“영국에 오면 가 보고 싶거나 해 보고 싶던 거 있어?”

“고성 같은 곳은 한번 가 보고 싶긴 해.”

시우는 이제 자신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빠르게 변하는 거리 풍경에 닿아 있었다. 그런 것으로 서운하지는 않았다.

지금껏 무표정에 가깝던 에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고성?”

“응. 그런데 지금은 그냥 조용한 곳이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아.”

“맛있는 음식이 있는 조용한 고성 같은 곳?”

에반은 시우의 말을 다시 정리해서 되물었고, ‘응’이라는 작은 대답을 들었다. 옅은 미소는 이내 짓궂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창밖만 보고 있는 시우는 에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솔직히 에반도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일단 공항에서 벗어나야 했고, 배가 고프다고 했기에 번화가 쪽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하지만 방금의 대화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한 목적지가 생겼다.

“코코.”

“응.”

“놀라지 마.”

“뭘?”

“뭐가 됐든.”

“에반. 너 나 무시하는 거 같은데, 내가 이제 웬만한 거에 놀라지 않아. 하도 놀랄 만한 일이 많아서. 진짜 네가 날 놀라게 만든다면, 뭐…… 내기해도 좋아. 뭐 해 줄까?”

시우는 웃으면서 말했다. 일반 회귀가 식상하니 이런 이벤트를 넣어 줬나?

제가 불쌍했을까? 그래서 에반과 같은 그룹을 하면서 인기도 좀 얻어 보고 친해져서 추억이라도 만들라고? 시우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던 중이었다.

“뽀뽀.”

내기라는 말과 더불어 해 준다는 말에 에반의 입에서 한 단어가 튀어 나갔다.

“뭐래?”

뽀뽀라는 단어를 듣고서야 시우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내기라며.”

“야! 그런 건 애인이랑 해야지. 너랑 나랑 왜 하냐?”

이런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회귀가 뭐가 중요할까? 복잡한 감정은 또 뭐가 중요하고? 이렇게 함께 있으면 되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면 그러면…….

에반의 말에 따박따박 대답하는 시우는 주먹을 꼭 쥐었다 놓았다. 힘들게 생각하지 말자. 편하게 생각하자. 결국은 숨기는 건 자신이겠지만, 힘든 건 한 명이면 족하다.

“애인 하면 되지.”

에반의 말을 듣는 순간 시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큰 소리로 웃었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아. 이런 대화, 예전에도 했다. 그것도 차 안에서.

뜬금없이 현수 형이 하는 라디오에 전화 연결이 됐던 그날이 떠올랐다.

“왜 웃어?”

“그냥.”

그때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의 말을 무시했던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던 것도 같다.

그때의 에반은 제법 화를 냈던 것 같은데, 이번엔 그냥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팝송이 나왔고, 시우는 다시 낯선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시우는 전혀 몰랐다.

곧 제게 닥칠 어마어마한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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