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하지만 지금 제가 안 사실은 정말 상상도 못 한 내용이었다.
엄청난 비틀림이 생겼다. 늘 같은 장면, 같은 상황에서 반복되던 시작점이 틀어졌다.
“서로 보고 지낸 지 2년 넘었는데, 이제 미운 정이라도 들 때 되지 않았어? 2집 활동에서는 제발 그런 티 좀 내지 마. 그리고 ‘루시퍼’ 시우, 다시 생각해 보고. 아니면 예찬이랑 시우 둘 다 해 보고 결정하든지.”
재형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에반은 휴대전화를 켜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션의 멤버를 확인하고 시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뇨. ‘루시퍼’는 시우예요.”
입국장 문이 열리고 사람들 사이에 싸인 시우의 모습을 보는 순간 에반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은 슬랙스에 흰 셔츠를 입고 검은색 볼캡을 쓰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바로 뒤로 예찬이 있어서 그런가. 오늘따라 유달리 시우가 더 작아 보였다.
하지만 에반의 눈엔 정확히 보였다. 커다란 한 쌍의 날개를 달고 있는 시우의 모습이.
문제는 시우가 달고 있는 날개의 색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우 날개는 색이 다를 거고요.”
설득이나 동의를 구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건 재형의 말에 대한 확답이었다.
몇 집 앨범이라거나 타이틀이라거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제게 루시퍼는 시우였고, 지금 제게로 걸어오는 그에겐 흰색과 검은색의 날개가 동시에 달려 있었다.
아직 모든 것을 다 파악하지 못했다.
오션의 멤버가 바뀌었고, 상황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히 아는 건 하나였다.
시우는…… 그는 제 것이다.
우리는 현재 어떤 관계일까? 방금 재형과의 짧은 대화에서 둘의 사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또 네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 네가 오메가임을 알게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그 전에 내가 널 어떻게 대해야 할까.
뒤틀리고 꼬인 이 매듭을 어찌 풀어야 할까.
당장이라도 뛰어가 끌어안고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지금 에반이 할 수 있는 것은 힘껏 제 주먹을 틀어쥐는 것이 전부였다.
입국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순간 시우는 쓰고 있던 볼캡의 끝을 더 내려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아까 비행기에서 곧 착륙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을 깨운 상준의 얼굴이 이곳이 현실임을 일깨워 줬다.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제멋대로 나대는 심장은 이미 통제를 벗어났다.
에반을 만난다는 사실에 그리 반응하는 것이다.
친구다. 친구다. 우리는 데뷔 팀 멤버이며, 동갑의 친구다.
실제로 사이가 나쁜지 좋은지 알 수는 없지만, 그리 특별한 관계가 아니다.
시우는 주문이라도 외는 듯 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었다.
예찬이를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
끊임없이 되뇌며 입국장을 나서 공항 로비로 들어가던 시우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리고 소매 끝을 끌어 자신의 코와 입을 가렸다.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사람이 많은 곳에서 페로몬 조절 못 할 리가 없다.
익숙한 향이다. 에반과 함께 있을 때면 가끔 느낄 수 있던 향.
하지만 이번에 느껴진 건 향이 아닌 감정이었다. 혼란. 놀람. 당황스러움.
어떻게 제가 이런 걸 알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에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짙은 초록빛 눈동자와 시선이 얽히자마자 다시 고개를 숙였다.
회귀의 부작용인가? 다시 한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시우의 작은 머리가 갸웃거렸다. 숨을 또 들이마셔도, 편하게 숨을 쉬는 지금에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혼란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던 익숙한 향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에반 형!!”
스태프와 멤버들 사이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 시우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커다랗고 굵직한 예찬의 목소리를 들으며 코밑을 손으로 살짝 문질렀다.
“야. 쪽팔려. 조용히 좀 해.”
신나서 마구 날뛰는 대형견 같은 예찬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진정시키는 사람은 찬이었다.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줄 알겠네. 에반이랑 떨어진 지 일주일밖에 안 됐거든.”
여전히 붕방거리며 두 손을 흔들고 난리 치는 예찬의 옆을 지나치는 상준 역시 한마디 했지만, 시우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와 가까워졌다.
앞에 서 있던 에반과 스태프로 보이는 팀과 자연스럽게 합류했지만 둘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이 상황을 모두 찍고 있는 카메라와 많은 스태프, 오션을 알아보고 웅성거리는 분위기까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모두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는 분위기에 우르르 몰려 같이 움직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시우는 에반이랑 나갔다가 온다고? 짐은 우리가 들고 갈 테니까 저쪽 차에 싣고. 에반이는 어떡하기로 했어?”
“둘이 놀고 들어올 때, 에반이도 짐 챙겨서 호텔로 들어오라고 했어. 나머지는 뭐 한대?”
“상준이는 호텔에서 곡 작업 더 한대고, 예찬이랑 찬이는 빅벤도 보고 투어한대서 내가 붙으려고.”
본의 아니게 재형과 명훈의 대화를 듣게 된 시우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과 에반이 나갔다 온다고? 어디를? 둘이서 무엇을 하러? 하지만 그 어떤 궁금증도 질문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러잖아도 멤버들과 매니저들은 제가 오늘따라 이상하다고 예의 주시 하는 중이었다.
“괜찮아?”
“응?”
갑자기 괜찮냐는 에반의 말에 깜짝 놀란 시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언제 자신의 옆으로 왔을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앞에 있는 에반과 눈이 마주쳤다. 이 복잡한 상황에 에반은 뒤로 걷고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아…… 비행이…….”
대답하는 사이 시우의 손은 에반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뒤로 걷는 그가 제 옆에 걷도록 유도했다.
에반이 옆에서 나란히 걷자 그제야 시우는 잠시 멈췄던 숨을 다시 쉴 수 있었다. 예찬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그리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에반의 입술이었다.
“그럼. 쉴래?”
“어. 아니.”
젠장. 시우는 고개를 숙인 채 혀끝을 깨물었다. 다시 만난 에반은 역시나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원래 친절하고 다정했으니 모두에게 이렇게 대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평소처럼 자신을 대할 텐데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았다.
팬들이 생각한 것은 억측일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다양하고 풍부하게 상황을 봤으니까.
특별했던 둘의 일은 모두 추억으로 묻어야 한다. 계속해 속으로 평범하게 나처럼, 평소의 나처럼이라는 말만 되뇌었다.
“가고 싶은 곳 있어?”
“시우 형. 캐리어 우리가 들고 가요. 에반 형이랑은……. 있다 봐요!”
에반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는 그 틈을 예찬이 채워 주었다.
“너, 넌?”
“난 찬이 형, 명훈 형이랑 투어 가기로 했어요. 에반 형. 추천해 줄 곳 있어요?”
예찬에게 되묻는 시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버벅거렸지만, 해외 나왔다는 사실에 들뜬 멤버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빅벤.”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에반의 목소리에 시우는 얼른 뒤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자신의 뒤에 있었지? 방금까지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들은 공항 로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 유명한 곳 말고 덜 유명하지만 좋은 곳 그런 곳은 없어요?”
“너 영국 처음이라며.”
“그렇긴 하죠.”
“그럼 남들 다 가는 데 그런 곳부터 가.”
에반과 예찬의 대화를 들으며 시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미친 듯이 떨리던 몸도, 쿵쾅거리던 심장도 점차 안정을 찾아 가고 있었다.
에반을 다시 만나는 순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음을.
그와 완전히 남이 될 수 없음을.
어떻게든 그와 엮여 있음을.
바로 직전 삶에서 회귀가 멈춘 줄 알았다. 회귀 시점이 지났으니까, 그러고도 몇 달을 평범하게 살았다. 하지만 이번에 깨달았다. 회귀가 멈추지 않았음을.
또 언제 어느 순간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제는 정해져 있던 루틴까지 바뀌었다.
“일단 너희부터 가라.”
공항 대기실 입구에는 고급 SUV가 있었고, 재형은 서두르며 시우의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조수석에 앉은 시우는 차창 밖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을 바라보았다.
“아까 말했지? 늦지 않게 들어와.”
미적거릴 여유도 없이 함께 탄 차가 출발했다.
서둘러 안전벨트를 맨 시우는 핸들을 잡고 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옆모습을 보자니 허탈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나씩 하자, 하나씩.
모래성이 무너졌다. 그러면 다시 만들면 되지.
대신에 L은 뺄게. 멋진 우정을 만들고 인기 아이돌이 되어 보자.
순간 자신의 앞으로 에반의 큰 손이 내밀어졌다. 에반이 어떤 뜻으로 제게 손을 내밀었는지 모르겠지만, 시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가볍게 손바닥이 맞닿았지만 이내 둘의 손은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끼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시우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그만큼 천천히 내뱉었다. 이상했다. 전엔 어쩌다 가끔 느낀 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자연스럽게 맡아졌다. 짙지는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밴 것 같은 향.
아마도 이 차가 에반의 차여서 그런 것일까?
‘나의 페어.’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에반의 목소리가 또 귓가에서 맴돌았다.
왜 자신을 그렇게 불렀을까? 그리고 에반은 왜 제가 그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다고 확신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