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벅찬 감정에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덜덜 떨리는 몸을 힘겹게 가누고 있던 시우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리고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라이브 방송을 하려고 켜 놓은 작은 스탠드가 서재를 겨우 밝히고 있었다.
서재 문에 기대서 있는 에반은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끝으로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고, 그의 넓은 어깨로 떨어졌으며, 그가 서 있는 바닥이 젖어 들고 있었다.
“네가 아니면 안 되니까.”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에반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 처음부터 이상했어.”
“알아.”
“너지! 지금 이거! 내가 맡고 있는 향. 항상 그런 건 아니야. 조금 전도 괜찮았는데 지금 또 맡아져. 박하 같은데, 그러니까 시린 것 같고, 하여튼 이런 냄새가 내 방에서 날 리가 없어. 너 맞아?”
에반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시우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럴 리가 없지만, 그는 분명히 말했다. 제가 그의 페로몬을 알고 있다고.
“그럼 놀이공원에서도 너 때문이야?”
다시 한번 에반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방금도?”
시우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에반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에반이 두어 걸음 다가오자 그만큼 시우는 뒷걸음쳤다.
“거기 멈춰.”
등 뒤에 벽이 닿자 시우는 손을 들어 그가 다가오는 걸 저지했다.
“따뜻한 물 가지고 올게. 일단 너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다 이야기할 테니까. 네가 원하는 만큼 네가 듣고 싶은 만큼. 내가 아는 만큼 다 말해 줄 테니까. 시우야, 잠시만.”
초조하고 미쳐 버릴 것 같고 답답한 자신과 다르게 에반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쉰다고? 지금 몰아치는 이 감정에서 벗어나고 나면 난 어떤 것도 묻지 않을 거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우리 무슨 사이야?”
시우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 지금껏 묻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물 가지고 올게.”
“너 지금 나에게 등 보이면 나 두 번 다시 너 안 봐.”
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아랫입술이 떨리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시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대일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고 꼭 해야 하는 일.
외면하고 무시하고 어쩌면 이렇게 커져 버릴 때까지 방치한 것은 자신일 터였다.
한 번쯤은 이런 감정 느껴도 된다고 생각했고 묵인했다.
열애설을 보는 순간, 제가 얼마나 멍청하고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미련한 자신이 싫었다. 그로 인한 아픔도 힘겨움도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다.
그는 친절했고 다정했으며 그렇게 그가 자신의 삶에 스며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자신은 천국에 있었지만, 지금은 지옥에 있었다.
알파인 그에겐 오메가 연인이 맞다. 베타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스캔들에 부정적인 말도 많았지만, 대체적으로는 젊은 선남선녀의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비밀 연애를 더 궁금해했다. 셀럽들의 연애는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시우야.”
“말해.”
망설임. 그는 지금 망설이고 있었다. 우리 사이를 정의하는데 왜 망설임이 필요한 것일까?
“내가 널 좋아해.”
“대답이 틀렸어.”
시우는 에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부정했다.
“오늘 열애설은 유리 폭행 스캔들 막으려고 회사에서 고의로 퍼트린 거야. 내일 오전 10시에 기자회견이 있어. 그때 다 말할 거야. 그리고 우리 관계는 다시 말하지만.”
“나 군대 가.”
“못 가.”
못 가. 못 가. 시우는 단호한 에반의 말에 피식 웃어 버렸다.
영국 시민권자인 넌 국방의 의무가 없겠지만, 난 있어.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일주일도 안 남았어.”
“그래도 못 가.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에반. 나 좋아하지 마. 난 너 안 좋아해.”
막무가내 어린아이 같은 말에 들썩거리던 감정이 한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됐다.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다면 그걸로 됐다.
적어도 자신을 향해 웃어 준 게 진심이었고, 같이 보낸 시간이 즐거웠다면 됐다.
혹시 몰라 하는 말인데. 네 감정이 더 커질까 봐 하는 말이야.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는 걸 눈감고서 그대로 두는 건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혼자 좋아하고 아픈 건 내가 하면 될 거 같아.
그거 내가 할 테니까, 그냥 넌 나 좋아하지 마라.
“면회나 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남은 감정을 추스른 시우는 손을 뻗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에반의 어깨를 툭 쳤다.
“김시우.”
“그런 심각한 표정 짓지 마. 솔직히 말해서 진짜 멋있는 얼굴인데, 나한테는 안 통해. 확실하게 하려고 물은 거야. 우린 친구야. 그러니까 비 오는 날 이렇게 찾아오고, 데이트니 뭐니 그런 말 이제 하지 말라고.”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고 자리를 비키려던 시우는 한 걸음 다가온 그와 벽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벽을 손으로 짚고 상체를 굽혀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피하려 시우는 고개를 돌려야 했다.
“우리가 친구 사이라고? 진짜 친구야?”
에반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친구가 아니면 같이 있을 이유가 없어.”
시선을 내린 시우는 책상 위에 있는 조명에 시선을 뒀다. 주황빛 불빛이 참으로 예쁘게 번져 보였다.
“시우야. 난 네가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그렇듯 너도 내가 아니면 안 되면 좋겠어.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도 난 똑같을 거야. 어떻게 하면 날 좋아해 줄래?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은데, 네가 좀 가르쳐 줘. 제발.”
너무 가까웠다.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
시우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자신의 마음을 가져갔으니까. 이미 자신은 그를 좋아했고 사랑했으며, 몇 번의 회귀를 반복하더라도 그일 것이다.
“에반. 난 너만 아니면 될 것 같아.”
애써 무덤덤함으로 가장한 날카로운 말은 에반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좌절하고 아파했으며 힘겨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시우의 페로몬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모르지 않았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시우의 페로몬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다 묻어났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날 자신을 보고 놀라는 그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훔쳐보려 훔쳐본 것이 아니다. 같이 있을 때면 절로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신을 놓을 만큼 달콤하고 상큼한 자두 향과 함께 말이다.
다만 왜 그렇게 애써 접으려 하는 것인지, 왜 그렇게 포기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노력했고,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 끝에서 시우가 선택한 것은 부정이었다.
게다가 그가 선택한 도피처가 군대일 줄이야.
“코코.”
에반은 자신을 피하려는 시우의 턱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조금씩 그가 자신을 보도록 돌렸다.
“도망가지 마.”
코끝이 닿았다.
떨고 있다. 시우는 불안해했으며 반대로 흥분하고 있었다.
살짝 벌어져 있는 촉촉하고 달콤한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덧대었다. 그리고 지금껏 숨기고 있던 말을 꺼냈다.
“김시우, 넌 오메가야. 히든 오메가. 나의 페어.”
<1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