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시우는 아랫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물면서 휴대전화 액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화려한 액션 영화로만 골라서 몇 시간이고 보았다. 영화를 봤다기보다 틀어 놨다고 하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골골송을 부르는 옹이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넋을 놓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확인한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특정 인물 몇이 무척이나 열심히 제게 연락했다. 본의 아니게 모든 연락을 무시한 것이 됐지만, 지금 그의 손은 한 명의 메시지에 멈춰 있었다.
[시우야. 연락 좀 받아.]
[만나서 이야기할까?]
[저녁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코코야.]
시우는 코 아래를 마구 문질렀다. 어느 순간부터 에반을 떠올리면 묘한 향이 같이 연상되었다. 갑자기 그가 자신에게 제 페로몬을 알지 않냐고 묻던 것이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잖아.
몇 번이나 쓰고 지웠다.
열애설이 진실이냐는 내용을 썼다가 지웠다.
결국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축하한다는 말이었다.
둘은 너무 잘 어울렸으니까.
그러고 나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김시우. 진짜 미쳤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시우는 옹이와 함께 컴퓨터 앞으로 갔다.
너무 오랫동안 코코맘들과 소통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들과 수다라도 떨면 괜찮지 않을까?
깊게 생각할 시간도 없이 손이 먼저 움직였다.
“안녕.”
잠옷으로 입는 편안한 반바지와 라운드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시우는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순식간에 빠르게 올라가는 참여자 수를 보고는 혀를 살짝 내밀어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늦은 시간인데 다들 안 자고 뭐 해요?”
채팅창이 너무 빠르게 올라가서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옹이를 보여 주자 귀엽다는 말이 빠르게 올라왔다. 간간이 뭐 하냐는 말도 있고, 에반의 열애설과 관련된 말도 같이 올라왔다.
“잠이 안 와서 들어와 봤어요. 어? 비 와요? 언제부터 왔지?”
비 온다는 말을 본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언제부터였는지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슴없이 창을 열자 계절의 변화를 품은 찬바람과 함께 시원한 빗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빗소리 너무 좋죠.”
문을 열어 둔 채 자리로 돌아온 시우는 비와 관련된 노래를 흥얼거렸다. 제대로 불러 달라는 말이 올라오자 그냥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너무 많은 분들이 들어오셔서.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준비도 좀 하고. 노래도 준비하고 그렇게 올 걸 그랬어요. 비와 관련된 노래가 뭐가 있을까요?”
예전처럼 후회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코코맘들과 오붓하게 이야기하고 그때 노래 많이 불러 드릴 걸 하는 후회가 있었기에 시우는 듣고 싶은 노래 제목을 말해 달라고 했다.
“저 지금 화면 너무 빨리 올라가서 읽을 수가 없어요. 조금 천천히요.”
읽을 수 없다는 말과 동시에 채팅창이 느려졌다. 제 한마디에 이렇게 바뀌는 것이 신기하고도 멋쩍어 괜히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채팅창에 집중했다.
역시 충동적인 것은 좋지 않았다. 채팅창이 느려지자 확실하게 보였다. 에반과 관련된 말이. 친구니까 알고 있지 않았냐는 말도 있었다. 안부를 묻는 말과 듣고 싶은 노래 제목을 적은 것들이 뒤섞여 난잡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스치듯 지나간 한 글자에 시선이 꽂혔다.
[코코내꺼 : 전화받아.]
잘못 본 것 같아 눈을 조금 길게 감았다가 뜬 시우는 가장 많이 보인 노래를 부르려고 몸을 뒤로 물렸다. 채팅창을 보기 위해 모니터 가까이 갔던 것이다.
[코코내꺼 : 메시지 확인이라도.]
또 금방 스쳐 지나갔지만, 시우의 심장은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책상에 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곧장 창가로 향했다.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 시우가 가장 좋아하는 고요함이 내려앉은 밤의 거리엔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주황빛 가로등만이 어둠을 밝혔다. 그리고 그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비는 비 오는 가을밤의 운치를 고스란히 내비쳤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전화가 울렸다. 시우는 얼른 액정부터 확인했다.
[에반]
액정을 확인하고 다시 거리로 시선을 옮겼을 때, 길 건너편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도로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인 한 사람이 가로등 아래에서 발을 멈췄다.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는 남자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늘 그가 쓰는 검은 모자가.
그 키나 체격, 느낌이 한 사람을 가리켰다.
“너야?”
손을 천천히 들고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간 시우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응.”
“여기 있으면 안 돼.”
“알아.”
“비 맞지 말고 돌아가. 늦었어.”
“알아.”
“그런데…….”
“보고 싶어서.”
덤덤히 오가는 말이었다. 시우는 휴대전화를 들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입 안이 쓰고 떫다. 우울감이 몰려들고 가슴이 터질 듯이 갑갑해져 왔다.
위가 조여들고 술이라도 마신 듯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코코.”
그는 마치 연인을 부르듯 달콤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 주었지만, 시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그만큼 천천히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쉽지 않았다.
이 느낌 낯설지 않다. 전에도 느껴 본 것이었다.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복합체. 얼굴을 쓸던 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툭툭 쳤다.
“전화 끊어, 당장!”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던 에반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큰 목소리로 제게 다그쳤다.
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숨을 쉴 때마다 싸하다 못해 시린 것 같은 찬바람을 머금은 박하 향이 자신을 감싸는 것 같았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을 때, 시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귀에 휴대전화를 대고 있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반.”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었기에 그의 이름을 부른 시우는 그제야 전화가 끊어졌음을 알았다.
온몸의 힘이 빠지며 몽롱해졌다. 힘없이 떨군 손에서 흘러내린 휴대전화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야옹.”
자신이 걱정되는지 옹이가 주위를 맴돌며 야옹거리는 소리를 냈다. 누군가 심장을 틀어쥐는 것 같은 고통이 주기적으로 몰려오고 사라졌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숨을 헐떡이는 것이 전부였다.
분명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 분명했다. 방금까지 제 주위를 감싸고 있던 것 같던 향도 사라졌다.
“괜찮아.”
갑자기 다양한 모습을 보인 제가 걱정인지 옹이는 계속 주위를 맴돌며 작은 소리로 울어 댔다.
쪼그려 앉았던 시우는 어느새 그 자리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불안해 보이는 옹이를 손으로 감싸 품으로 당겼다.
거친 폭풍이 지나간 듯 이번에는 처음과 다른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걱정, 초조, 불안. 하지만 이 중 가장 큰 것은 걱정이었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것.
까칠한 옹이의 혀가 자신의 손을 핥았다. 괜찮다는 듯, 괜찮아질 것이라는 듯. 작은 존재는 저를 달래려 노력하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잔뜩 긴장했던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진짜 이게 무슨 일…….”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시우는 두 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요란한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그의 시선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하필 지금.
에반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시우의 숨소리가 불안정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감정 동화.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되지 않는, 이 미쳐 버릴 것 같은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그에게로 넘어갔다.
그대로 뛰었다. 무단횡단을 했고, 익히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건물로 들어갔다.
때마침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지만, 급한 자신의 마음과는 다르게 느리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숫자에 에반은 거칠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시우가 문제가 아니라 제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확실하게 알아야 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책에서만 보던 감정 동화가 이런 것일지 몰랐다. 놀이공원에서 일어났던 것은 정말 찰나의 시간이었다.
몇 초 되지 않는 시간이었기에 처음엔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손이 떨려 도어록의 비밀번호가 제대로 눌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곧장 그의 서재 앞에 선 에반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코코, 너…….”
사라졌다. 지독하게 얽혔던 감정 동화가 사라졌다.
“이거 뭐야?”
“그러니까 그게…….”
“넌 아는 거지?”
질문이 아니었다. 확신하고 묻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몇 걸음만 걸어 들어가면 시우에게 닿을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쳤다.”
시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으로 뛰어가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정신이 없어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자신은 라이브 방송을 하던 중이었다. 한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다른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슨 대화를 했지?
“너 때문이야! 다. 이거 전부 너 때문이야! 네가…… 네가…….”
입술이 덜덜 떨렸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뒤죽박죽된 머릿속에서는 흉포하게 날뛰는 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무슨 말이든 서로 튀어 나가려고 난리였다.
널 만나서 그런 거야. 내 회귀가 멈춘 게 너 때문인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더 불행이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네 옆에 있어야 하는 존재라서. 그러니까 이런 마음을 갖게 한 것도, 모든 것이,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다 너 때문이야.
네 열애설이 나오지만 않았어도. 아니 라이브 채팅창에 그런 메시지만 남기지 않았어도.
비만 아니었어도. 빌어먹을 비 때문이다.
에반이 아니라 비 때문이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그 습한 차가움이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 다 나 때문이야.”
“나한테 왜 그래!”
“너 아니면 안 되니까.”
에반의 말이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