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59화 (59/187)

59화

영화 채널을 틀어 놓고 소파에 앉아 옹이를 쓰다듬던 시우의 시선이 시계로 향했다.

7시 10분.

휴대전화를 들고 이제는 익숙해진 단축 번호를 눌렀다.

늘 듣는 통화음이 아닌 전화가 꺼져 있다는 안내 멘트에 액정을 다시 확인했다. 에반의 이름과 번호를 확인하고 종료 버튼에 손끝을 올렸다.

자신의 다리 위에서 잘 자고 있는 옹이를 옆에 내려놓고 일어난 시우는 창가로 걸어갔다. 항상 그가 먼저 연락했다. 수시로 메시지를 보내고 틈나면 전화를 건 사람도 그였다.

물끄러미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돌아오는 건 똑같은 안내 멘트다.

“……촬영이 길어지나 보네.”

아니면 배터리가 없거나.

갑자기 데이트 신청을 하고 환한 미소를 짓던 그 얼굴이 떠오르자, 얼른 머리를 흔들어 이상하게 뻗어 나가려는 생각을 끊었다. 그러고는 다시 소파로 돌아와 편히 앉았다.

촬영이 끝나면 연락하겠지. 배터리가 없다면 매니저의 휴대전화를 빌려서라도 연락을 줄 그다.

틀어만 놓고 집중해서 보지 않아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영화를 끄고 예능 채널을 틀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분명 TV를 보며 같이 웃고 있지만, 시우의 왼쪽 다리가 계속해서 들썩였다. 할 일이 없어 채팅창을 확인하던 그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이내 무표정이 된 시우는 말없이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형! 괜찮아요?”

자신을 걱정해 주는 예찬의 목소리에 작게 웃어 버렸다.

“괜찮아.”

“그러니까 에반 형이 지금…….”

“예찬아. 내 열애설 아니야. 에반이 열애설이야.”

허탈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헛웃음은 이제 제법 큰 웃음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이유가 너무 명확해져 버렸다. 예찬이 뭐라고 열심히 떠드는 소리는 들리지만, 그 뜻까지는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몇 번 돌리지 않았는데, 벌써 발 빠른 연예 뉴스에선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예찬아.”

“……형. 그러니까요.”

“축하해 줘야지. 왜 네가 흥분해.”

“이거 분명 뒷거래 있었을 거예요. 절대 아니니까 형 믿지 말라고요.”

“뭘 믿고 뭘 안 믿어? 너도 좋아하는 사람 있는 것처럼, 에반이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사귀는 게 뭐가 문제야? 나 매니저 전화 온다. 나중에 통화해.”

시우는 오지도 않은 전화를 핑계로 통화를 끝냈다. 방금까지 가벼운 흥분감에 두근거리던 심장이 멈췄다. 이제나 연락이 올까. 저제나 연락이 올까. 손에서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던 자신이 우스웠다.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런 표정을 짓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찾아오고 챙겨 주지 말았어야지.

착각했잖아. 혼자. 그러니까 나 혼자.

넌 그저 친절하고 배려심 있으며 남을 잘 챙기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연예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저를 토닥이고 이끌어 주는…….

에반과 유명한 여자 모델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TV 화면을 채웠다. 그 옆으로 어두운 밤. 같은 차에 타고 내리는 모습. 여자 모델의 집 지하 주차장에서의 모습 등. 몇 장의 사진이 더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우는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면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오늘, 아니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연락하기도 쉽지 않겠지.

속옷 한 장만 걸친 채, 집에서 입는 편안한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숍에서 멋지게 손질한 머리카락이 물에 푹 젖었다.

“미친놈.”

짓이겨 물고 있던 그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에반이 아닌 자신에게 향하는 욕.

친구와 저녁을 먹는 것에 들떴던 자신을 향한 말. 예쁘게 하고 있으라는 말에 옷을 샀다. 숍에 들러 머리만 한 것이 아니다. 촬영도 없는데, 고작 친구와 밥 한 끼 먹으려고 연하게 메이크업까지 받았다.

“한심한 놈. 밸도 없는 놈.”

뜨거운 물에 씻고 나온 시우는 언제 일어났는지 냐냥거리며 돌아다니는 옹이의 밥을 챙겼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소파에 올라가 앉아 조금 전 보다 만 영화를 다시 틀었다.

시끄럽고 화려한 액션 영화를 틀어 놓은 그의 앞에 빈 맥주캔이 점점 늘어 갔다.

무음에 무진동으로 테이블에 엎어 놓은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쌓이고 메시지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시우는 알지 못했다.

에반은 불편한 심기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는 앞에 있는 기획사 대표를 바라보았다.

“말해 보시죠. 내가 이해할 만한 상황 설명이 없으면 재미없을 겁니다.”

앞에 놓인 얼음물을 들이켠 에반은 휴대전화 단축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다 안내 멘트로 넘어가자 그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 행동을 하는 모든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기획사 대표에게 향해 있었다.

“내 행동은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말해요.”

전화를 걸고 통화 대기음을 듣고 안내 멘트로 넘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계속하며 에반은 긴 다리를 꼬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았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행동에 다들 불편함을 표현했지만, 에반은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그러니까…….”

최 대표의 말을 다 들은 에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연습 된 표정. 사람 좋아 보이는, 모든 이의 호감을 이끌어 낸 그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엔 거친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래, 그러니까 잘난 돈 때문이라는 거군. 그렇게 돈을 벌어 줬으면 됐지. 돈을 벌게 해 줬으면 됐지. 열애설로 끼워 붙인 모델의 스캔들을 덮으려고 자신과 이어 붙였다고?

“내일 기자회견 준비하죠.”

말도 안 되는 설명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 에반의 입에서 그들이 원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열애설을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를 원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그들의 바람이었다.

열애설의 대상인 유리는 그도 아는 사람이었다.

같은 기획사에 있는 여자 오메가 모델.

시우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에반조차 알 만큼 요즘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것은 그녀의 이름과 외모가 전부였다.

지금 그들이 열애설의 증거로 내미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음식점에서 단둘이 있는 것처럼 찍혔지만, 그날은 기획사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둘만 있던 것이 아니라 그 음식점 전체를 빌려서 회식을 했기에 그날 음식점에 있던 모든 사람이 회사 관계자였다.

같은 차에 타고 내리는 사진이 찍힌 것도 그날이었다. 회사에서 바로 음식점으로 움직였기에 그녀와 같은 차를 타고 갔다. 식사가 끝난 뒤, 같은 차에 탄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 차는 회사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에반은 자신의 차로 옮겨 타고 귀가했다.

어쨌거나 회사에 큰 돈벌이가 되는 유리의 스태프 폭행 스캔들을 덮기 위해서 자신과 이어 붙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기획사 대표는 제게 6개월만 인정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6개월만 유지하다가 헤어졌다고 작게 밝히면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래, 그래. 기자회견 준비할 테니까 잘 만나고 있다, 내일 그렇게만 말해 주면…….”

“폭행 스캔들을 덮을 만한 것이 나와의 열애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건데. 왜 제게 미리 상의하지 않고 이런 일을 벌이셨을까?”

시우에게 제발 연락 좀 받으라는 메시지를 보낸 에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을 받지 않으니 직접 찾아가야 했다. 그가 순순히 문을 열어 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기자들이 하도 설쳐 대는 바람에……. 이해해 줘서 고마워.”

“고맙긴요. 스캔들은 스캔들로 덮는 건데. 그런데 최 대표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게 좀 안타깝지.”

능글맞은 최 대표의 말에 에반의 입에서 계속해 반말이 흘러나왔다.

“에반.”

자신의 반말이 거슬리는지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기획사 이사에게로 에반의 시선이 옮겨 갔다. 기획사 대표에 이사들까지 작정하고 모인 사람들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당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

제게 이를 드러내고 경계심을 내보이던 이의 옆에 겨우 설 수 있게 됐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의 곁에 힘겹게 자리를 잡았는데, 그것을 통째로 흔들어 버렸다.

“기자회견 할 거면 해외 기자들도 부르고 좀 크게 준비해요. 오션의 에반 첫 스캔들인데 거하게 다뤄 줘야지.”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문으로 걸어가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갑자기 욕설을 내뱉는 대표를 이사 몇이 말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늙은이들은 지금 자신에게 버릇없다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에게 이런저런 일 시키려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하잖아. 왜? 당신들이 날 키웠다고 말하려고? 개소리.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험한 말도 하지 맙시다. 내일 오전 10시 기자회견 준비나 제대로 해. 지금 나보고 그거 해 달라고 비는 거잖아, 당신들.”

그대로 회의실을 벗어난 에반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단축 번호를 누르고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통화가 되지 않자, 다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앱을 열었다.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읽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나간 건지 알아?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걸 기다리는 사이 따라 나온 매니저가 건넨 말에 에반의 얼굴이 더 차갑게 굳었다.

“지금 기자들 몰려서 나가기도 힘드니까. 감정 가라앉히고 천천히…….”

“명예훼손, 유언비어 유포 등으로 법정 공방까지 할 생각이면 계속해 보시죠.”

채팅창에 아무런 말도 써 넣지 못한 에반의 손끝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계속해서 시우에게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내느라 타인들의 연락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그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을 확인한 에반은 서슴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에반, 너…….”

“지금 여기로 올 수 있어요?”

“어딘데.”

“기획사.”

통화하며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엘리베이터 옆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몰려 있는 취재진을 보는 그의 입꼬리가 삐뚜름해졌다.

“형. 나 지금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 쉽게 못 나갈 것 같거든요. 형이 와서 좀 데리고 나가 줘요.”

자신의 차나 활동할 때 쓰는 밴은 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차를 타고 나갔다는 바로 취재진에게 휩싸일 것이 분명했다.

“지금 갈게. 가까우니까 10~15분 정도.”

“보고 있다가 도착하면 바로 나갈 테니 굳이 연락하지 마세요. 지금 휴대전화 꺼야 할 것 같아서.”

통화를 끝낸 에반은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통화 내용까지 모두 듣고 있는 매니저를 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고 친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니까 그런 눈으로 볼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머리 한번 잘 굴려 봐요. 에반 vs. 유리, 누굴 얻는 것이 회사에 이득이 될지.”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에반은 매니저는 두고 혼자 올라탔다.

그리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열애설이라든가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 오션 해체 및 은퇴 같은 것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연락이 되지 않는 시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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