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투덕거리는 것도 잠시 결국 운전에 양보가 없는 에반이 운전대를 잡았다.
“내 차인데 이제 네 차 같다.”
에반이 능숙하게 좌석을 조절하고 앉는 걸 본 시우는 챙겨 온 과자 봉지를 뜯었다. 추억의 과자가 있을 줄이야. 이때만큼은 과자를 마구 쓸어 담은 시우였다. 차가 출발하든 어쩌든 쫀드기를 먹기 좋게 찢은 시우의 광대뼈가 행복으로 한껏 솟았다.
한 가닥을 입에 문 시우가 에반의 입에도 하나 가져가자 기다렸다는 듯 에반이 받아먹었다.
“아. 이거 불에 살짝 구워 먹어야 진짜 맛난데. 일단 불이 없으니까 지금은 이렇게 먹고 집에 가서 구워 먹자.”
“이게 맛있는 거야?”
“이건 맛도 맛이지만 추억으로 먹는 거지.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이 쫀드기. 한동안 못 구하다 요즘 추억의 군것질 이러면서 다시 나왔잖아.”
한참 떠들며 먹던 시우는 대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너 학교 어디서 나왔어?”
“영국.”
“아, 그래.”
해외파와 무슨 말을 하리오. 쫀드기를 하나 더 건넸지만, 에반은 이걸 무슨 맛으로 먹냐고 했고, 시우는 집으로 가는 동안 남은 쫀드기를 전부 먹었다.
“고양이. 또 보네.”
에반과 같이 집에 들어선 시우는 자신이 아닌 에반의 바지 자락에 매달리는 옹이와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를 잠시 보았다. 생각해 보니 정식으로 그를 자신의 집에 들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제가 술 취해 뻗었을 때, 그는 두 번이나 이 집을 왔다 갔다.
그사이에 옹이랑도 친해진 거니?
“옹이. 오빠한테 인사해. 엄청 유명하고 잘나가는 오빠니까, 잘 보이면 츄르를 한가득 안겨 줄지도 몰라.”
장 봐 온 것을 식탁에 두고 말하지 않아도 욕실로 들어가 손을 씻고 나온 에반은 한 손으로 옹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장난을 쳤다.
“이름이 옹이였어?”
“성이 야, 이름이 옹이.”
시우가 분주하게 움직여 식자재를 정리할 동안 에반은 옹이와 카메라 앞에서 뭐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에반과 내기도 했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 걸 보여 주기로 했기에 필요한 장비들은 이미 집에 다 구비해 놓았다.
6인용 넓은 식탁에 휴대용 가스버너 두 개와 음식 재료가 가득한 접시, 도마 등을 세팅했다. 이래서 처음부터 두 개씩 준 것인가? 처음 진욱 형이 가스버너를 두 개 주기에 한 소리 했던 시우였다. 그때 형이 한 말은 받아 왔으니 그냥 집에 두라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마트에서 장 보면서 내기를 제안한 것도 조금은 짜여 있는 각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니까 덥다. 나 옷 갈아입고 올게.”
초가을의 날씨는 제멋대로였다. 더운 와중에 불 앞에서 요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우는 여전히 옹이와 놀고 있는 그를 두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카디건과 셔츠를 벗고 헐렁한 반소매 티셔츠에 폭이 넉넉한 반바지를 입은 시우는 자신의 옷장을 둘러보았다. 니트를 입은 에반도 더울 것 같지만 마땅히 그에게 맞을 만한 옷이 없었다.
“에반. 너도 옷 갈아입으라고 하고 싶은데, 너한테 맞을 만한 게 없네.”
에어컨을 틀어 놓긴 했지만, 저만 시원하게 입은 것 같아 시우는 머쓱함에 먼저 말을 꺼냈다.
시우의 말에 대한 대답으로 에반은 말보다 행동을 선택했다.
안고 있던 옹이를 옆에 내려놓음과 동시에.
“야!”
갑자기 니트를 확 끌어 올려 벗는 모습에 놀란 시우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 같은 단어가 튀어 나갔다.
“왜?”
아…….
니트 안에 티셔츠 입고 있었으면 말을 해 주지. 갑자기 그렇게 확 벗으면 오해하잖아.
“내 옷 좀 갖다 놓을까?”
흐트러진 머리를 만지는 에반을 보며 시우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진심으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얼떨결에 같이 딸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복근과, 겨우 옷 벗는 데 열일하는 팔근육을 본 것이다.
“내 집에 왜 네 옷을 갖다 놔?”
“놀러 오면 갈아입게.”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화에 그럴까? 라는 생각까지 하던 시우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왜 네가 굳이 우리 집에 놀러 와?
“뭐야? 그럼 내 옷도 네 집에 둬야 해?”
“아니. 넌 내 거 입으면 되지.”
“집에서 그렇게 입어?”
에반의 말에 시우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뭐 문제 있나? 다들 편안한 옷 입고 있는 거 아닌가? 허벅지 중간은 내려오는 티셔츠를 한번 잡아당겼다 놓았다. 반바지가 좀 짧나? 그렇게 짧은 것 같진 않은데.
이런 대화가 아무렇지 않은지 다시 옹이를 안고 장난치는 에반을 보는 시우의 귀가 붉어졌다.
“옹이랑 그만 놀고 준비 끝났으면 이제 만들어 볼까?”
말을 돌리기에 이보다 좋은 건 없었다. 손끝으로 옹이와 노는 그의 손에서 옹이를 빼내 동물 침대에 내려놓았다.
“옹이는 오늘 많이 놀았으니까 좀 자자. 어린 아가들은 코 자야 쑥쑥 커요. 그런데 너 진짜 어묵탕 할 수 있겠어? 아니면 내가 다 할 테니까, 그냥 옹이랑 놀래?”
둘의 모습이 잘 나올 만한 곳으로 카메라를 옮긴 시우는 불안한 눈빛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옹이랑 놀면서 검색도 했어.”
“이거 육수 끓으면 간장으로 간하고, 어묵은 어차피 나도 쓰니까 데쳐 줄게.”
어묵을 데쳐 낼 냄비를 올린 시우는 괜한 내기를 한 게 아닌가 싶었다.
“파, 무, 양파, 다진 마늘, 청양고추 준비하면 되는 거잖아.”
요리법을 보긴 한 것인지 시우가 한쪽에 모아 놓은 재료 접시에서 필요한 것을 정확히 가져가는 걸 보곤 시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20분 컷 어때?”
꽤 능숙해 보이는 모습에 시우의 얼굴에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난 괜찮은 것 같소만. 자네 정말 괜찮겠나?”
시우의 도발에 에반이 진지하게 자신의 어깨를 잡으며 말하자 시우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큰 욕심 없이 이렇게 친구로 옆에 있는 것도 좋았다. 어설프게 감정이 섞이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바엔 차라리 이렇게 친구로.
“내가 손이 작다고 무시하는 거 같은데, 제법 손이 맵거든요. 에반 씨가 타이머 누르세요.”
“내기 종목이 좀 잘못된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 이거 누가 평가할 거야? 우리가 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아?”
타이머를 조작한 에반은 카메라에 타이머가 잘 보이게 하고는 시작 버튼을 눌렀다.
“양심을 속이지는 맙시다.”
시우는 떡볶이용 육수를 내기 위해 다시마와 건새우를 넣은 냄비를 불에 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채 썬 무를 넣었다.
“매운 거 잘 드십니까?”
“음. 아니.”
양념을 만들기 위해 고추장을 한 스푼 크게 떴지만, 에반의 대답에 조금 양을 줄였다.
물이 끓자 둘이 쓸 어묵을 살짝 데쳐 낸 후 자신이 쓸 만큼을 덜고 남은 것을 에반의 앞에 두었다.
“시우 씨는 언제부터 요리를 잘했습니까?”
방금까지 편하게 말을 놓았다가 둘은 어느 순간부터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썼다.
“태어날 때부터 잘했습니다.”
뻔뻔하게 대답하며 아침에 막 뽑은 듯 말랑말랑 쫀득한 떡볶이 떡을 줄대로 뜯었다.
“나 그거 줘.”
“뭐? 이거?”
갑자기 무언가를 달라는 말에 시우가 떼고 있던 떡을 들어 보이자, 고개를 끄덕한 에반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리고 떼어 놓은 작은 조각을 냉큼 입으로 받아 갔다.
“꿀이라도 찍어 먹어야 맛있지, 그냥 먹으면 맛없잖아.”
“네가 준 건데 뭐든 맛있지.”
“여러분, 에반이가 이렇게 능청맞습니다.”
하나 더 달라는 말에 에반의 입에 떡을 물려 준 시우는 갑자기 울리는 인터폰을 바라보았다. 올 사람이 없는데, 성질이 급한 사람인지 계속 울려 대는 벨 소리에 그 앞으로 다가갔다.
“예찬이다!”
“열지 마!”
예찬인 것을 확인하고 반가운 마음에 문 열림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열어 주지 말라는 에반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미 열어 준 문을 어떡하라고!
“시우 형! 에반 형!”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우렁찬 예찬의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저 진짜로 오늘 브이로그 저 혼자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소속사가 저 속였어요. 에반이 오는 것도 몰랐고, 예찬이 오는 것도 몰랐어요.”
급하게 손을 닦은 시우는 현관으로 뛰어갔다.
“형들 심심할까 봐 놀아 주러 왔지.”
그런데 웬 꽃다발? 예찬이 내미는 꽃다발을 받아 든 시우는 고개를 숙여 향기를 맡았다. 꽃 선물 받아 본 건 졸업식 때가 전부였다. 부케같이 동그란 모양에 색색의 장미가 화려함을 뽐냈다. 이런 거 왜 선물하고 왜 받나 했는데, 막상 받고 보니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뭐야?”
“예찬이가 꽃 줬어. 이쁘지?”
“오! 고양이가 있었어요?”
에반에게 꽃다발을 자랑한 시우는 꽂아 놓을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에 반해 집으로 들어온 예찬은 바삐 돌아다니는 옹이를 졸졸 따라다녔다.
“옹이야, 옹이. 그 오빠랑도 친해져야 해.”
꽃병이 없는 관계로 한참을 집 안을 뒤적거린 시우는 빈 페트병을 들고 나왔다. 페트병을 가위로 잘라 아쉬운 대로 물을 조금 채웠다.
급하게 꽃병을 만들고 꽃다발을 꽂은 시우의 입에서 즐거운 흥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좋아?”
“좋아. 예쁘잖아.”
햇빛이 잘 드는 테이블 위에 꽃병을 둔 시우는 손을 씻고 칼을 잡았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갑자기 예찬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시간을 낭비했기에 빠르게 손을 놀렸다.
“야. 너 왜 왔냐?”
“저요? 시우 형 브이로그 한대서 분량 채워 주러 왔죠. 그런데 형도 있을 줄은 몰랐지.”
툭 내뱉은 에반의 말에 예찬은 손끝으로 옹이랑 놀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 맞다. 그럼 예찬이가 평가하자. 누구 게 더 맛있는지.”
공평한 판결을 위해 시우는 일부러 내기는 말하지 않았다.
“이미 편파 판정 날 거 같은데.”
에반은 팔팔 끓는 육수에 어묵을 던지듯 넣고 썰어 놓은 채소까지 한 번에 다 넣었다. 그리고 그가 간장과 숟가락을 들었을 때, 시우는 애써 그걸 보지 않으려 했다. 망치면 자신의 가슴이 더 아플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