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Journey’ 멤버와 함께한 술자리가 남긴 것은 지독한 숙취와 자두였다. 양말과 벨트만 벗겨진 자신의 복장을 본 시우는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식탁 위에 올려진 메모 한 장이었다.
오늘도 그가 좋아하는 해장국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 뒀다는 메모. 그리고 혼자 취해 버려서 자두는 없다는 것을 보며 시우는 웃고 있었다.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으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소용없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고양이 귀엽더라.]
[이름이 옹이야. 다음에 소개해 줄게.]
시답잖은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우의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 * *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난 시우는 비틀거리면서 침대에서 내려가 기획사에서 준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가리기 위해 후드를 뒤집어쓰고 카메라를 켰다. 오늘은 미리 계획했던 브이로그를 찍는 날이었다.
“안녕.”
침대 옆에 뒀던 생수병을 열고 한 모금 마시고 말을 꺼냈지만, 막 자다 일어나 잠긴 목소리가 어색해 푸스스 웃었다.
“이게. 제가 방송을 안 나가다 보니까,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다고 해서. 오늘은 브이로그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제 오늘 하루 일정을 최대한 열심히 찍어 볼게요. 아, 진짜 어색해.”
침대 옆 카펫이 깔린 바닥에 앉은 자신이 잘 보이게 카메라를 고정한 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조금 흔들었다.
그러고는 늘 하던 대로 천천히 몸을 풀었다.
“아침에 스트레칭을 해 주면…… 아이고, 좋아요.”
다리를 쫙 벌리고 몸을 늘이는 시우의 입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여과 없이 나왔다.
“이렇게 목도 좀 돌려 주고. 앞으로 으쌰. 주욱…….”
평소 같았으면 조용히 스트레칭을 했겠지만, 아무 소리도 들어가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아 시우는 중간중간 자세 설명을 했다. 10분이면 끝날 스트레칭을 하는 데 15분이 걸렸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있는 그의 옆으로 옹이가 걸어왔다.
“옹이야. 저기 카메라 보고 인사해. 옹이는 제 고양이가 아니고, 제 누나가 키우는 고양이인데 제가 잠시 데리고 있어요.”
누워 있는 시우의 얼굴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몸을 그의 얼굴에 비비적거리는 옹이를 두 손으로 감싼 시우는 작은 몸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 아기라 이렇게 작아요. 그래서 돌아다닐 때 밟을까 봐 조심해야 해요.”
옹이의 작은 앞발이 시우의 얼굴을 밀어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시우는 옹이의 몸에 한참 뽀뽀를 퍼부었다.
“오늘 일정은 딱히 없는데. 일단 옹이 밥도 주고, 옹이 화장실 청소도 해 주고. 커피 한잔 마셔야겠죠? 그리고 장 보고 아점을 만들어 먹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씻어야 하는데 꼼짝하기 싫어요.”
여전히 바닥을 뒹굴거리던 시우는 옹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자유를 얻은 옹이가 깡충거리며 달아나는 걸 보고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완전 토끼 같죠. 그런데 이름이 옹이인 이유는 누나가 쟨 야옹이라고. 그래서 성은 야, 이름이 옹이예요.”
자리에서 일어난 시우는 소속사가 시킨 대로 착실하게 카메라를 챙겨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그러고는 부지런히 옹이 밥을 챙겨 주고, 화장실 청소를 했다.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한 번씩 카메라 앞에 손을 흔들거나 얼굴을 들이대는 장난도 멈추지 않았다.
“씻고 나왔어요. 전에 어떤 코코맘님께서 물어봐 주셨는데, 샴푸는 뭐 쓰냐고. 그냥 있는 거 써요. 무난한 거. 요즘엔 베이비파우더 향이 좋아서, 씻고 나와서 이렇게 머리 털면 향기가…….”
따뜻한 물에 막 씻고 나와 발그스름한 볼을 한 채 시우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마지막으로 선크림을 발랐다.
“선크림. 여러분도 피부를 위해서 꼭 바르세요. 저보고 하얗다고 해 주시는데, 이게 다 선크림 덕분이에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시우는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장바구니를 챙겼다. 제가 걸을 때마다 따라오며 장난을 치는 옹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집 밖으로 나섰다.
라이브는 종종 했지만, 브이로그는 처음이라 어색하면서도 재밌었다. 일단 뭐든 많이 찍어야 할 것 같아 괜히 조바심이 일었다.
차에 카메라를 고정한 시우는 음악도 선별해서 틀었다.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볼 건데, 메뉴는 뭐가 좋을까요?”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를 흥얼거리다 신호에 걸리자 시우는 손을 뻗어 카메라 각도를 조금 조절했다. 최대한 평범한 생활을 보여 달라고 했다. 최근 시우의 생활이라고는 온종일 집에서 나른하게 지내는 것이 전부였다.
뭘 찍어야 하냐고 징징거렸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장이나 보고 밥이나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스테이크? 스파게티? 이런 쪽으로 갈까요? 지글지글 된장찌개에 고등어구이가 좋을까요? 한식이냐 양식이냐. 이건 늘 세기의 고민이죠. 아니면 쿠키 같은 거 구워서 커피랑 같이? 생각하기 나름이긴 한데 빵이나 쿠키 만드는 게 생각보다 쉽더라고요.”
메뉴에 관한 얘기를 하며 근처 대형 마트에 주차한 시우는 볼캡을 눌러쓰고 마스크도 챙겼다. 예전에는 편하게 돌아다녔지만, 요즘은 필수로 챙기는 것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번거롭네요. 그래도 전 할 수 있습니다.”
한 손으로 카트를 밀고 다른 손으로 카메라를 든 시우는 제 얼굴이 잘 나오도록 카메라를 조절했다.
“사람이 많이 없네요. 솔직히 이런 대형 마트는 저녁에 와야죠. 그날 팔고 남은 신선 제품들 싸게 팔잖아요. 그런 거 진짜 좋아해요.”
카트를 밀고 가던 시우는 계란을 카트에 넣었다.
“메뉴는 아직 안 정했는데, 계란은 냉장고에 늘 있어야 하는 거니까. 브이로그 저 혼자 찍으니까 좀 심심한가요? 친구라도 한 명 초대할 걸 그랬나? 혼자 뭘 해 먹으려고 하니까 재료 사는 게 걱정이에요. 가격을 보면 묶음이 좋은데, 저처럼 혼자 사는 사람은 비싸도 한두 개 사는 게 좋잖아요.”
당근도 한 개, 감자는 두 개, 양파도 두 개. 일단 가장 기본적인 식재료가 되는 것들을 차곡차곡 카트에 담으며 시우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냥 삼겹살이나 구워 먹을까? 요리에 먹방까지 이어질 것 같았다.
“진짜 뭐 먹을까요? 이게 라이브면 바로바로 대답들 해 주실 텐데. 브이로그는 좀 외롭네요. 뭘 만들어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나려나요.”
“떡볶이에 어묵탕은 어때?”
혼자 중얼거리던 시우는 갑자기 들린 에반의 목소리에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바로 옆에 서서 제가 밀고 있던 카트를 끌고 가는 모습에 눈을 깜박였다. 이거 지금 뭐지?
“에반?”
“왜? 내가 와서 놀랐어? 안녕하세요. 에반입니다. 오늘 시우가 브이로그 촬영한다고 해서 저도 왔어요. 지금부터는 저도 같이 출연 좀 하겠습니다.”
갑자기 그가 나타난 것도 놀랍긴 한데.
시우는 앞서가는 그를 따라가며 자신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찢어진 청바지에 흰색 셔츠. 그 위에 군청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가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청바지에 군청색 니트가 그의 오늘 의상이었다.
지금 이곳에 에반이 나타난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저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분명 두 기획사는 입을 맞췄고, 이 일정을 그도 동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묘한 의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입고 나온 건데.
“떡볶이에 어묵탕이 싫은 거야?”
자신이 따라오지 않은 것을 알았는지 멈춰 선 그가 돌아보았다.
“아니. 난 뭐든 상관없어.”
그의 옆으로 가며 시우는 옆에 있던 파도 집어 들었다. 떡볶이엔 파랑 무가 많이 들어가면 맛있으니까.
“에반이 갑자기 나타났네요. 전 정말 들은 게 없어요.”
“내가 갑자기 나타나는 깜짝 이벤트?”
“알겠어. 그런데 그건 왜 사는 거야?”
시우는 그가 들고 있는 쥐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맥주도 살까? 브이로그에 음주는 안 되나?”
갑자기 맥주를 찾으며 은근슬쩍 넘어가는 행동에 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옆으로 가 카메라를 확인하고 소리 내 웃었다.
“아. 에반이 어깨랑 목만 나오고 있었네요. 둘 다 나올 수 있게 이렇게 조절하면. 아, 제 얼굴이 잘리고. 그럼 카메라 위치를 좀 바꿉시다.”
키 차이가 나는 둘이었기에 시우는 카메라 위치를 옮기는 선택을 했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러시나. 어묵 찾아 왔더니 카트에 과자가 한가득이에요.”
“사 놓으면 먹잖아.”
“집에 맥주도 있고 소주도 있고 과자도 있어.”
과자가 너무 많은 것 같아 덜어 놓으려던 시우의 손목이 에반의 손에 잡혔다.
“그거 맛있는데.”
시우는 자신이 들고 있는 과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거 진짜 누가 다 먹어. 하지만 에반의 얼굴을 보고는 차마 과자를 내려놓지 못하고 다시 카트에 담았다. 그리고 기분이 좋은지 휘파람을 부는 그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차돌은 왜 사?”
정육 코너에서 고기를 고르던 시우는 위에서 들리는 말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차돌떡볶이. 이미 많이 아시겠지만, 에반이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요리 진짜 못한대요.”
시우는 카메라에 대고 일부러 소곤거리며 말했다.
“아니거든. 저 요리할 수 있어요! 안 해서 그런 거지 못하는 거 아닙니다.”
“거짓말.”
“와! 코코. 너 지금 나 무시한 거야?”
“무시가 아니고. 네가 분명히 말했잖아. 요리 못한다고.”
투덕거리면서도 시우는 지나가며 눈에 보이는 재료들을 카트에 넣었다.
“할 수 있거든!”
“좋아. 떡볶이는 내가 할 테니까 어묵탕은 네가 할래? 인간적으로 내가 냉동실에 얼려 놓은 채소 육수 꺼내 준다. 이거 주면 다 준 거다 진짜.”
“내기 콜?”
그거 못한다고 했다고 발끈한 에반의 행동에 시우는 손으로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어떤 내기를 하든 요리와 관련된 것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딱밤?”
“딱밤? 아! 나 손이 커서.”
딱밤이라는 말에 에반이 자신의 손을 들어 보이자, 시우는 장난스럽게 그 손에 하이 파이브를 했다. 손 크기가 뭐가 중요하고 딱밤 세기가 뭐가 중요해. 어차피 자신이 이길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