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아……. 본방은 80분, 비하인드는 10~15분 분량이에요?”
“하고 싶은 말 없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흩어지자 다시금 에반의 팔이 시우의 어깨로 올라왔다. 하고 싶은 말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억지로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는다면 지금 찍은 부분이 편집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지 않는 대신 손끝으로 제 어깨에 있는 그의 손끝을 톡톡 두드렸다. 이거나 내리세요. 제가 나서지 않아도 필요한 분량은 채워졌다. 뽀뽀 사건으로 한바탕 휩쓸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자두는 다 먹었어?”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작게 속삭이는 소리는 크게 잡힐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우는 또 고개만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시우 씨. 우리 본방 날짜가 어떻게 된다고요?”
슬슬 막바지로 향하는 녹화 도중 갑자기 자신을 향해 들어온 질문에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10월 16일 금요일 저녁 9시 50분. ‘Journey’ 첫 방송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시우는 작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짤짤 흔들면서 작가님이 들고 있는 스케치북의 멘트를 읽었다.
시우의 멘트를 마지막으로 코멘터리 촬영이 끝나자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연출진에게 인사를 끝낸 멤버들은 그리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꺼냈다.
단체 채팅방에서도 그렇게 떠들더니,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다고.
루카의 콘서트는 코앞으로 다가왔고, 현수와 에반, 시우를 제외하고는 1년에 두 번 명절에 방영하는, 유명 아이돌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 준비에 바빴다.
“이거 봐요. 나 손 다 터졌어. 양궁 그게 뭐라고.”
카메라가 꺼지자 더 활발하게 이야기가 오갔다. 루이는 손끝이 부르튼 자신의 손가락을 가리켰고, 예찬은 볼링 치느라 팔 빠지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들을 보는 시우의 입가엔 은은하게 미소가 걸렸다.
난 군 입대가 얼마 안 남았네.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은 군인으로 보낼지도 모른다.
“시우 형은 진짜 방송 안 해요? 지금 엄청 푸시 들어가는 것 같던데. 현수 형 라디오도 안 나갈 거예요?”
안의 질문에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욱 형은 지금이라도 빨리 방송 나가자고 난리였고, 태훈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우는 휴대전화 번호를 바꿨다. 이제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소속사와 ‘Journey’ 멤버가 전부였다.
어차피 대인 관계가 그리 넓지 않았기에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인간관계에 미련 따윈 없어서 더 편했다.
“코코.”
남아도는 것이 시간인 시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어깨를 두드리는 에반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서 걷는 그의 넓은 등을 보자 가슴이 간질거렸다. 어쩌자고 이러는 것인지. 알파를 좋아하는 베타라. 차마 묻지 못했지만, 아마도 에반이 이렇게나 편하게 자신을 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제 형질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스케줄 가는구나.”
“스케줄 좀 잡아. 같이 나가면 좋잖아.”
카페 바로 앞에 주차된 에반의 밴을 보며 시우는 카페 계단 중간쯤에 선 채 팔짱을 꼈다. 같이 촬영했는데 누가 누굴 배웅하는 것도 같지? 같이 스케줄을 나가자는 에반의 말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몇 계단 위에 서 있는 지금에서야 그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얘는 항상 이렇게 나를 내려다볼 텐데 어떤 기분일까?
에반은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뒤에 있는 매니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때 말해 줄 걸 그랬나? 내가 아니라 그쪽 연예인 관리나 잘하라고.
“손.”
강아지에게 손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우는 한쪽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채 앞으로 내밀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오고 재밌게도 손바닥 위엔 또 한 알의 자두가 놓였다. 지금 자두로 꼬시는 거야? 그러기엔 이미 다 넘어갔는데.
저도 모르게 시우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쓸데없이 간질거리는 가슴이 두리둥실 커져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또 한 알?”
“저녁에 뭐 해?”
그날 그렇게 초밥을 먹고 헤어진 후, 10여 일 만에 만났다. 그사이 단체 채팅방에서 가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시우도 에반도 채팅방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둘이 따로 연락한 것도 없었다.
“나야 뭐 없지.”
에반의 질문에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시우는 작은 자두를 살짝 쥐었다 놓았다. 자두, 이게 뭐라고.
“술…….”
“에반! 오늘 스케줄 언제 끝나?”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시우가 어깨를 움츠렸다.
“뭐냐. 이거 무슨 분위기냐?”
카페 계단 중간에 서 있는 시우와 문 열린 밴 앞에 서 있는 에반을 번갈아 보던 루카는 머리를 긁적였다. 한쪽 볼이 유독 튀어나온 시우가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넌 여기서 뭐 먹어?”
“왜요?”
뭘 그렇게 열심히 먹는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말 못 하는 시우 대신 에반이 말했다.
에반 매니저의 강렬한 시선을 받던 시우는 슬쩍 계단을 더 올라가 루카 쪽으로 갔다. 왜 그랬는지 루카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자두를 한입에 넣어 버린 것이다. 뭐지. 그냥 보여도 되는 건데 왜 입에 넣었을까?
“에반이도 스케줄 끝나는 대로 합류하는 거지? 현수 형도 라디오 끝나고 오니까. 그때까지 시우는 우리랑 저녁부터 먹자. 오늘은 뭐 먹지?”
루카는 기다렸다는 듯 가까이 다가온 시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알겠다며 대충 대답하고는 밴을 타고 가는 에반의 뒷모습을 멀뚱히 볼 뿐 시우는 손을 흔들지 못했다. 그저 입 안에 든 자두를 꼭꼭 씹어 먹고 남은 씨앗을 혀끝으로 굴렸다. 자두 한 알 주려고 부른 건가? 진짜 이럴 거면 어디 파는지 가르쳐 주지.
* * *
“형. 술은 그만.”
시우는 옆에서 구시렁거리는 예찬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루카가 주는 잔을 받았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촬영이 끝났기에 현수와 에반을 제외하고 단체로 장어를 먹으러 왔다.
장어에 어떻게 술이 빠질 수 있냐는 루카의 말에 순식간에 테이블 위엔 술병이 놓였다.
“왜?”
그래도 지금은 폭탄 아니고 소주인데? 그러니 그때만큼 훅 취할 일도 없었다. 장어 많이 먹으려고 일부러 폭탄 안 먹는데, 왜 이것도 못 먹게 하나?
“아니. 나는 적당히 먹자는 거지. 지금은 다들 반주 아녔어요?”
예찬의 말에 루카는 아예 유리잔에 소주를 부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먹어. 먹고 죽는 거지 뭘 가려? 허허. 우리 예찬이가 술이 약한가?”
“아니. 나 겁나 센데요? 짱 센데요? 우리 그룹에서 젤 센데?”
단순한 예찬은 루카의 도발에 후루룩 넘어가 단번에 들고 있는 잔을 비워 냈다. 그러자 시우는 제 앞에 놓인 소주잔을 홀짝 비웠다. 그리고 노릇하게 잘 구워진 장어 한 점을 꼭꼭 씹었다.
“아, 진짜 예찬이 단순해. 그런다고 그걸 홀랑 먹어? 이거 분명히 현수 형이랑 에반 형 오기 전에 취하겠구만.”
안은 시우의 잔을 채우고는 그가 채워 주는 잔을 받았다.
“그래도 다들 적당히 먹자고요. 2차 안 가? 2차 가기 전에 취하면 안 되죠.”
아직 취하지 않은 예찬은 시우의 앞에 있는 잔을 슬쩍 밀어 버리고 물을 그의 앞에 놓았다. 절대 절대 시우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건 순전히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한 발악이었다.
[어디야?]
[단체로 장어 먹으러 왔어요.]
[술은?]
[그냥 반주?]
[시우. 안 취하게 잘 봐라.]
그랬다. 다들 모르겠지만, 예찬은 에반에게 지령을 받은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다른 멤버들은 부어라 마셔라, 장어가 맛있니, 술이 다니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애써 소주잔을 치웠지만, 시우는 예찬을 이상하다는 듯 보고 또 잔에 든 소주를 호로록 마셨다.
“여기 진짜 맛있다. 예찬이가 맛집을 많이 아네. 자자, 빨리 다들 모여 봐요. 더 술 취하기 전에 정상적인 모습으로 사진 좀 찍자고요.”
안은 휴대전화를 꺼내 앞에서 맛있게 익은 장어부터 찍었다.
“안 그래도 우리 팬들이 나 외도 중이라고 뭐라 하시던데. 맨날 ‘Journey’랑 논다고.”
예찬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른 머리를 툭툭 만져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난 루이도 버리고 ‘Journey’랑 소고기 먹었다고 한 소리 들었는데. 오늘은 루이도 왔으니 덜 혼나려나?”
“자자. 빨리 술병 옆으로 치우고 음료수 들어.”
다들 술 마시는 거 알 텐데, 그래도 공개적으로 올라가는 건 적당히 걸러야 한다며 루카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덩달아 눈에 보이는 술병들을 치우고 루카가 시키는 대로 음료수가 든 잔을 들었다.
“찍어요. 하나. 둘. 셋.”
한 번만 찍는 것도 아니고 여러 컷으로 사진을 찍었다. 때마침 들어온 음식점 직원분에게 부탁해서 찍은 사진이 ‘Journey’ 단체 채팅방에 공유되었다.
“에반이 형. 언제 SNS 올렸대?”
사진을 찍었으면 바로 올려야 된다며 휴대전화를 꺼내 보던 루이의 말에 시우도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다른 멤버들이 올리더라도 자신은 올릴 생각이 없었다.
손끝을 몇 번 움직이는 것으로 에반의 SNS를 볼 수 있었다.
녹음실에서 헤드셋을 끼고 있는 사진이었다.
또 검은색 볼캡이다. 어찌나 검은색을 좋아하는지. 볼캡을 눌러써서 이마와 눈썹은 보이지 않았다.
그 아래 한 줄의 멘트가 있었다.
[오랜만의 녹음. 오늘 에코 정말 좋다.]
그의 SNS를 보던 시우는 하트만 누르고 나왔다. 녹음 중이면 늦게 올 것 같았다. 갑자기 입 안이 씁쓸해져 옆에 있는 소주를 냉큼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의 입 안이 쓴 이유는 소주를 마셔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