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스태프들이 한번 모였다가 흩어질 때마다 에반은 점차 흐트러졌다.
“역시 벗을수록 좋네.”
사진 작가님의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에 반해 시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벗어.’
검은색 후드 티셔츠가 제 손 아래에서 이리저리 나부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이 손으로 더듬었다. 손바닥을 보던 시선이 다시 에반에게로 향했다. 단추가 모두 풀린 흰 셔츠. 그 아래로 잘 발달한 근육이 도드라진 상체가 보였다.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장면이 서서히 깨어났다. 에반의 코를 보고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 저 잘난 코에 헤딩을 했던 거 같은데. 거기다 옷을 잡아당겼고.
“미쳤네.”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아무 일이 없었다고? 루프톱에서 남의 옷을 마구 벗기려 들고 몸을 더듬었는데, 그게 아무 일이 아니라고? 성추행으로 신고해도 할 말이 없었다.
‘예차니가 잘생겨져써.’
홧홧하게 달아오른 두 볼을 손으로 감쌌다. 분명히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고, 그러겠다고 했기에 도망갈 수도 없다. 무엇보다 에반은 아직 자두 판매처를 알려 주지 않았다.
숨겨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다.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과 지난밤의 추태.
* * *
“자두.”
“맞네. 내가 자두에 졌네.”
진한 화장을 지우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자신에게 걸어오는 그를 보고 시우는 자두라는 단어를 먼저 말하고 말았다. 멋있었다거나 힘들지 않냐는 말보다 그 말이 먼저 나갈 줄이야.
지긴 뭘 져. 말이 헛나간 것인데.
최대한 태연하게 모른 척 평소처럼 그렇게 그를 대해야 했다.
김시우의 쇼타임이 시작됐다.
“그게 아니고, 멋있더라.”
“솔직히 말해 봐. 자두 때문에 온 거야? 아니면 내가 궁금해서 온 거야? 그것도 아니면 어제 무슨 실수 했는지 걱정돼서 온 거야?”
“셋 다.”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시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차 키를 만지작거렸다.
“의외인데?”
“뭐가?”
시우는 운전석으로 가려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 당기는 에반의 힘에 끌려 뒷걸음질 쳤다.
“내가 궁금해서 왔다는 게. 운전은 내가.”
“이거 내 차인데?”
촬영이 끝나자 에반은 매니저를 먼저 보내려 했고, 그는 에반이 아닌 시우를 봤다. 조금 전에 나눈 대화에 대한 약속을 지키라는 무언의 압박이었고, 시우는 대충 다른 곳을 보며 슬쩍 고개만 까딱였었다.
“뭐 먹고 싶어?”
운전석으로 가던 시우의 방향을 조수석 쪽으로 향하게 하며 여유롭게 말을 돌리는 그 모습에 시우의 귀가 붉어졌다.
“야. 촬영해서 피곤한 건 너잖아. 곱게 모실 테니까 눈 좀 붙여.”
손을 들어 귓바퀴를 꾹꾹 누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네. 잘나셨어요.”
운전석으로 가려던 시우는 차 앞에 서 있는 에반 때문에 그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팔짱을 끼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모습에 옆으로 돌아서 운전석으로 가려다 그의 한 팔에 허리가 감겨 버렸다.
“뭐 하냐?”
“자두 먹고 싶지 않아?”
기승전 자두냐? 어쨌거나 자두로 인질이 된 건 시우였기에 그와 실랑이하는 것보다 조수석으로 가는 걸 선택했다.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 팔뚝을 잡았지만, 오히려 그의 힘에 이끌려 품에 안기고 말았다.
꼭 끌어안은 에반이 시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나 자두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시우는 어색함에 말을 꺼냈다. 갑자기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무서웠다. 떨릴 줄 알았던 목소리가 평소와 똑같이 흘러나갔다.
“내가 자두를 좋아해.”
“그런데 이거 좀 놓지? 누가 보면 오해한다.”
“오해해 달라고 이러는 건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을 감싸고 있던 팔의 힘을 풀어 주자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운전석이 아닌 조수석으로 향했다.
쓸데없는 것으로 그와 실랑이하기엔 감정 소모가 너무 컸다.
운전석 좌석을 조절하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에반을 보다 시우는 반대쪽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에반이었다.
바로 옆에 그 사람을 둔 채 시우는 생각에 잠겼다.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내 팬이 됐어?”
생각을 거슬러 시우는 그가 제일 먼저 했던 말부터 꺼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어. 왜냐고 물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대답도 없고. 오션 멤버 중 한 명이 TV를 틀어 놨고, 음악 방송에 네가 나왔어. 그게 전부야.”
오른손으로 핸들을 잡고 차창을 연 에반은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할 말이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왜 이유가 필요할까? 그냥 좋은 것인데. 자신의 질문은 너무 어리석었다. 지금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것과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그 무게는 다를 것이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단어로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서로 좋아한다고 말해도 그 뜻은 충분히 다를 수 있다.
“왜? 이제 나 좀 좋아해 주려고?”
에반의 질문에 숨기지 못한 표정을 들킬까 여전히 반대편을 보는 시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응. 널 좋아해 보려……. 윽.”
갑작스러운 급제동에 시우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에반이 재빨리 팔을 내밀어 막아 주었다.
“뭐라고?”
핸들을 틀어 차를 갓길에 세운 에반이 몸을 돌려 시우를 보았다.
“뭐야?”
겨우 몸을 추스른 시우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에반의 행동에 더 당황했다. 그냥 평소처럼 편안하게 농담 따 먹기 같은 대화 중이었다. 이런 가벼운 대화는 누구와도 쉽게 나누는 그런 것이었다.
“날 좋아한다며.”
솔직히 어젯밤 일을 떠올리고 에반을 보는 것이 무척이나 껄끄럽고 난감할 줄 알았다. 속이려고 마음을 먹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평소와 똑같은 그의 행동 때문이었는지 생각보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래. 너 좋아해. 이 세상에 널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뭐 악플러나 그런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거고. 대부분 다 널 좋아해. 그리고 이건 확실히 하자. 나 너 싫어한 적 없어.”
시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건 맞잖아. 확실하잖아. 난 지금 네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야.
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잠시 시우를 바라보던 에반은 기어를 바꿔 차를 출발시켰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시우는 라디오를 켰다. 가끔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지금처럼.
“어. 현수 형 라디오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시우는 볼륨을 더 키웠다.
[그럼. 지금 전화 연결해 보겠습니다.]
라디오 디제이인 현수의 말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예찬이 라디오에 출연해서 자신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울린 건 자신의 휴대전화가 아닌 에반의 휴대전화였다.
“받아 줘.”
에반의 휴대전화를 받아 든 시우의 동공이 흔들렸다. 누구 전화인 줄 알고 내가 받아? 지금 뜬 번호는 입력되지 않은 번호였다.
“네. 여보세요.”
계속 울리는 전화를 외면하지 못한 시우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어? 시우 형?]
수화기와 라디오에서 동시에 예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에반이 피식 웃으며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아. 어.”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시우 씨. ‘오늘 밤에’ 최현수입니다. 인사 좀 해 주세요.]
장난기가 가득 묻어나는 현수의 말에 시우는 떨리는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이게 지금 재밌는 상황이야? 왜 웃고 있어? 그러면서 그는 슬쩍 오른손을 들어 어서 말하라는 제스처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시우입니다. 이렇게 전화 연결을 하게 되어서 영광이네요.”
방송 사고를 낼 순 없으니 시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을 했다.
[지금 제가 에반 씨에게 전화했는데, 시우 씨가 받는 걸 보니 같이 있나 봐요.]
당연히 같이 있으니 전화를 받은 게 아니겠니? 시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든 에반과 엮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었다.
“네. 지금 에반이가 운전 중이라 제가 대신 받았어요. 차 세우고 에반에게 전화 넘겨드릴…….”
[시우 형! 그러지 말고 스피커폰으로 해 주세요. 저 예찬이에요.]
예찬의 말에 시우는 얼른 스피커폰으로 바꾸고는 에반과 자신의 중간쯤으로 휴대전화를 고쳐 잡았다. 예찬이 현수의 라디오에 나갔고, 이야기 중 에반에게 전화 연결을 했다는 설명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오션의 에반입니다.”
[어. 지금 두 분만 계신 건가요? 다른 분은 없으신가요? 지금 뭐 하고 계신가요? 신중하게 대답하셔야 합니다. 제 입방정 하나에 모두 보내 버릴 수 있어요.]
예찬이 웃으며 하는 말에 시우는 불안함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에 손을 댔다.
“네. 시우가 자두 먹고 싶다고 해서 가던 중입니다.”
정말 뜬금없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갑자기 자두 이야기가 왜 나와?
[네? 갑자기 자두요?]
[형, 형. 아니에요. 시우 형. 어제부터 자두 먹고 싶다고 하긴 했어요.]
갑자기 튀어나온 자두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황하는 현수의 목소리 뒤로 예찬이 웃으면서 말했다.
[잠시만요. 이거 정리 좀 하고 갑시다. 예찬 씨, 어제 시우 씨랑 같이 있었습니까? 거기다 에반 씨와 시우 씨는 ‘Journey’ 촬영 때도 그렇게 둘이 붙어 지내더니 돌아와서도 그런 겁니까? 그래서 이 저녁에 자두만 사러 가는 겁니까? 저는요? 에반 씨, 저도 자두 좋아합니다.]
“현수 씨도 지금 오시면 저녁도 사 드리고 자두도 사 드립니다.”
[에반 형! 저 갈래요! 저 방송 끝나자마자 갈래요!]
현수의 말에 웃으며 답하는 에반을 보며 시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고 무사히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예찬 씨. 지금 저를 버리고 가신다는 겁니까? 저녁 먹고, 자두를 같이 사러 가는 데이트 코스에 끼어들고 싶어요? 갑자기 채팅창에 글이 막 올라오고 있는데요. 에코? 에반, 코코 묶어서 에코군요. 시우 별명이 코코입니다. 참고해 주시고. 그래서 저녁 메뉴는 어떻게 되시죠?]
“시우야. 뭐 먹을래?”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냥 대충 전화 끊자.
시우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에반을 노려보며 어서 끊으라는 눈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