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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48화 (48/187)

48화

“내가 어제 실수한 거 진짜 없어? 혹시 했다면 미리 말할게. 미안해.”

손끝만 닿아 있는 것에 가슴이 간질거려 시우는 손끝을 움츠려 주먹을 쥐었다.

“그런 거 없어. 자두 좋아해?”

시우가 주먹을 쥐었기에 에반의 손은 방향을 잃고 허공에 멈췄다.

“아! 그게 내가 자두를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술 마시고 가끔 먹고 싶다고 하긴 하는데.”

볼을 긁적이며 말하던 시우는 차마 뒷말을 할 수 없었다. 자두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게 술버릇 중 하나이긴 했다. 하지만 진짜 자두를 사 준 사람은 에반이 유일했다. 생각해 보면 자두를 직접 사 먹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 아침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자두를 먹은 게 언제였더라. 그런데 왜 술만 취하면 유독 자두를 찾을까?

“좋아하는 과일 수박이라며.”

“그렇긴 한데, 그 자두가 맛있긴 했어.”

사과도 했고, 이제 자두 구매처만 알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우는 얼굴을 만지던 손을 내렸다.

“에반. 쉬었으면 다음 촬영…….”

둘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흐를 때 노크와 함께 에반의 매니저가 들어오자, 시우는 이제 가 보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코코. 조금만 기다려 줘. 끝나고 자두 사러 가자.”

그만 가 보겠다는 말을 하려던 시우의 입술은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건넨 말에 느리게 닫혔다. 괜찮다고 그냥 자두 산 곳만 말해 달라고 하면 되는데, 일이 있어서 그만 가 봐야 한다고 말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그의 말에 거절의 뜻을 밝힐 수 없었다.

시우의 대답엔 관심 없는지 에반은 매니저와 함께 대기실을 나갔다. 괜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치고 있던 시우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상대는 전혀 그럴 뜻이 없었겠지만, 그 시선과 분위기에 홀린 자신의 잘못이다.

어떻게든 무시하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인정해야 했다.

대기실에 잠시 머물던 시우는 느린 걸음으로 촬영장으로 향했다. 세트장에선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이었기에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에반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조명 속에 있는 그를 보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양 팔뚝을 문질렀다.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은 부정맥이 아니고 수시로 왼쪽 가슴이 간질거리는 건 피부 트러블이 아니었다. 무시하고 부인하고 모른 척했지만, 지금 그를 보는 이 순간 시우는 더 외면할 수 없었다.

분위기 바꿔서 가자는 말과 함께 에반의 옆으로 스태프들이 붙었다. 단정한 포마드였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재킷이 사라졌다. 셔츠 단추가 두어 개 풀림과 동시에 방금까지 풍겨 오던 차갑고 지적인 이미지의 에반은 사라졌다.

조도가 낮아지고 방금까지 흐르던 클래식 음악 대신 야릇한 재즈가 세트장을 채웠다. 고풍스러운 소파에 나른하게 드러누운 채 콘셉트 이야기를 나누는 그를 더는 볼 수 없어 몸을 돌렸다.

씁쓸함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지금이라도 회귀하면 안 될까? 회귀 날이 오늘 밤이면 안 될까?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공식적인 ‘Journey’ 촬영이 두 번 남았다. 그건 피할 수 없었다.

‘에반 형이 고백 안 했죠?’

‘에반 형이 형 좋아하잖아.’

예찬이 한 말이 떠올랐다. 설마. 진짜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좀 친절하고 다정하고 남 챙기는 걸 즐기는 성격이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반이? 알파가 왜 베타인 자신을?

“에반. 멋있죠?”

제멋대로 뻗쳐 나가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던 시우는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파드득하고 몸을 떨었다.

“열여덟 살 때부터 봤으니까 한 5년 봤는데, 진짜 대단한 놈이긴 해요.”

언제 왔는지 에반의 매니저가 옆에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시우는 몸을 돌려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소파에 누워 있는 그는 무척이나 나른하고 지루해 보였다. 단추가 풀려 드러난 가슴으로 눈이 가자 얼른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랬더니 이번엔 그의 맨가슴이 떠올랐다. 단추를 채우는 것에 집중했지만, 그래도 사람 눈이 달렸으니 거기다 자신의 눈높이에 있었으니 보고 싶든 말든 그의 가슴을 봤었다.

“네.”

“방송 출연 다 거절하셨다던데 이유가 있는 겁니까?”

“천천히 가려고요. 어떤 일이든 서둘러서 좋을 건 없잖아요.”

시우의 시선은 다시 에반을 찾았다. 그는 카메라를 보며 촬영에 집중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기에 자신까지 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하긴 적당히 가려서 출연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죠.”

매니저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시우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시원하면서 싸한 향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검지를 펴 코 아래를 마구 문질렀다. 누가 향수라도 뿌렸나? 검지를 떼자 순간적으로 느껴지던 향이 사라졌다.

머쓱한 기분에 코끝을 만지며 고개를 들자, 에반의 초록 눈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고 느끼는 순간 그가 눈을 감았다. 지금껏 시선이 얽혔을 때 먼저 피한 사람은 시우였다. 하지만 이번엔 에반이 피했다. 카메라 연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본 게 아니었나?

“시우 씨. 아닌 거 아시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어색하게 시우는 옆에 있는 매니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촬영장을 보고 있었다.

“에반이 성격이 그래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죠. 그게 뭐가 됐든. 그런데 아니라고요. 시우 씨도 아시잖아요.”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는지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보내면서 하는 말은 무거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지금껏 외면하고 무시하고 내버려 뒀던 감정을 방금 직시했다. 이제 알아주고 보듬어 주려 했다. 그런데 아니란다. 아닌 건 알고 있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확실하게 듣자 아팠다.

“네. 알아요.”

“흔한 일이죠. 누구나 에반을 보면 그런 감정을 가지니까. 그러니 저런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거고. 왜 이런 말을 하냐고요? 쟤 옆에서 5년을 있었는데 모를 수가 없지. 아닌 건 아니라고. 어차피 휴지 조각이 될 그런 거 키우지 말라고 미리 말하는 겁니다.”

입에 고인 침을 겨우 삼켰다.

태연하게 행동해야 했다. 지금 그의 매니저는 그러길 원했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는지 그는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고 다시 촬영장을 보았다.

“이런 말 하려고 절 이곳까지 부른 겁니까?”

숨을 크게 들이쉰 시우의 눈은 여전히 에반을 쫓았다.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은 그는 또 이쪽을 보고 있었다. 순간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세트장 이탈이었다. 시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에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우의 앞에 있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만지고 있던 시우의 손을 그가 낚아챘다.

“무슨 일이야?”

말은 시우에게 거는 것 같았지만, 시선은 매니저에게 향해 있었다.

“에반?”

시우는 그의 손에 잡힌 손을 빼내려 하며 다른 손으로 에반을 툭 쳤다. 촬영 잘하다가 이게 무슨 일이야?

“얘 갑자기 왜 이러냐고.”

여전히 그는 자신이 아닌 매니저를 보고 있었다. 분명 지난번 밴에서 자신에게 정색하고 차갑게 말하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매니저에게 하는 목소리와 어조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명훈 형이 뭐라고 한 거지?”

매니저에게 향했던 시선이 시우에게로 왔다. 얼떨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 있을까? 분명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는데,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그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 왜 그래?”

이상한 행동은 제가 하면서 이유를 자신에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한단 말인가? 시우는 아무 일 없었다고 어서 촬영하러 가라는 말을 하며 다시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를 살짝 밀쳤다.

“코코, 그러지 마. 놀랐잖아. 최대한 빨리 촬영 끝낼 테니까 지겨워도 조금만 참아 줘.”

자신이 뭘 했다고 그가 놀랐는지 모르겠지만 더는 다그치지 않고 세트장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지금 흐르는 음악이라든지 사람들의 작은 말소리, 카메라의 셔터 소리 등. 분명 방금 자신과 매니저가 나눈 대화를 그가 들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걱정하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던 매니저가 혀를 차며 돌아서자 시우는 얼른 말을 건넸다. 그가 그리 말하지 않았어도 이 감정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축복받지 못한 감정이 안타까워서 조용히 보듬어 주고 싶었다. 처음으로 타인을 향해 특별한 감정을 품었다.

예찬이 물었다. 그가 자신에게 고백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그때 시우는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웃을 거라고. 비웃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서 기분 좋게 미소를 지어 주고 나서 고맙다고 말할 거라고.

‘대박. 그게 무슨 말이야. 고백했는데 고맙다고 대답한다고요? 와. 그래 놓고 나보고 고백하래.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고마워. 이러면 나 어떡해요?’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시우는 손을 들어 눌러쓴 모자를 살짝 올리고 눈썹을 긁적였다.

생각이 날 것 같으면서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확실하게 대답했는데.

뭐라고 대답했더라, 한참을 고민하던 시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예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어? 고백했는데 상대가 고맙다고 말하면 어떡하냐고 네가 물었을 때]

잠시 후 예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반지하 방에서 눈뜨는 기분 아냐고 하던데요;;;]

자신에게 뭘 그런 진지한 대답을 기대했을까? 평소도 아니고 술 취한 자신에게. 허탈함이 밀려왔다. 일단 혹시 에반이 자신에게 고백하면 고맙다는 말은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모든 고민엔 그가 고백한다면, 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고백 안 하면 말고.

또 콘셉트가 바뀌는지 스태프들이 세트장 안을 누비고 있었고, 에반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면서 의자를 가져다줬기에 시우는 감사함을 전하고 의자에 앉았다.

남은 촬영 동안 에반은 시우를 보지 않았다. 그는 무섭도록 촬영에 집중했다. 그리고 시우는 턱을 괸 채,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걱정하기보다 그냥 시간이, 이 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제멋대로 튀면서 정체를 드러내는 감정도 내버려 둘 생각이다. 무한 회귀 중에 이런 감정 하나 품고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또 돌아간대도 그는 오션의 멤버로 데뷔할 테고, 그럼 이번엔 내가 덕질이라는 걸 해 볼까? 정 보고 싶으면 공방 가서 보고, 운 좋으면 팬 사인회에서 손 한번 잡아 보고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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