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에반은 주차를 마치고 핸들에 엎드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잠든 시우를 바라보았다. 창가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채 잠든 모습에 에반은 더 보지 못하고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나른하게 감긴 두 눈과 새근거리는 숨소리, 살짝 벌어진 입술까지 너무나도 무방비했다.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편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았지만, 그래서 더 답답해졌다. 그래서는 안 되잖아.
핸들에 얼굴을 묻은 지 몇 초나 지났을까. 유혹을 이기지 못한 에반의 시선이 다시 시우에게 닿았다. 머리를 받치고 있던 한 손이 어느 순간 시우에게로 향했다. 팔을 쭉 뻗기만 하면 닿는 거리에 그가 있다.
자신의 손을 살짝 움직이면 시우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움직이면 다시 손에 그 얼굴이 가렸다. 그렇게 허공을 멈춘 에반의 손은 시우에게 닿지 못했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휴대전화였다.
“에반입니다. 시우 집 비밀번호가 필요해서요.”
잠든 시우를 깨우는 것보다 그의 매니저에게 연락하는 걸 선택한 에반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 두서없이 말이 쏟아지는 걸 가만히 들었다.
비밀번호는 왜 필요하냐? 시우는 어디 있냐? 무슨 일이냐? 내가 가겠다. 이런 말들의 나열이었다.
“술 취해서 지금 제 차에서 자고 있고, 지금 지하 주차장입니다.”
당장 시우를 바꾸라는 말에 에반은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그럴 거면 전화하지 않았겠지. 깨우기 싫어서 전화한 것인데.
“번호 말씀해 주시죠. 못 믿겠으면 내일 당장 바꾸면 될 거 아닙니까.”
얼마나 취했냐, 상태가 어떻냐는 말을 계속하는 매니저의 말을 결국 자르고 말았다.
“걔가 원래 밖에서는 취할 만큼 안 마시거든요. 혹시 난 너를 아는데 넌 나를 몰라라든가, 반지하에서 눈뜨는 기분을 알아? 이런 말도 했어요?”
그냥 간단하게 비밀번호만 알려 주면 될 일을 시우의 매니저는 진심으로 말이 많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솔직히 에반이 지금까지 들은 건 ‘예찬이가 잘생겨졌어.’와 ‘자두’, ‘벗어’ 이 세 개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대충 에둘러 대답했다.
“아이고, 진짜 취했나 보네요. 중간중간 자다 깨서 그러면 진짜 취한 거라…….”
그제야 비밀번호를 말해 주는 걸 들은 에반은 손으로 얼굴을 훑었다. 매니저가 불러 준 여섯 자리 번호를 들은 에반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시우의 팬인 그는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여섯 자리 번호는 시우의 마지막 방송 날짜였다.
잘 부탁한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낸 에반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아주 짧은 시간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 버리는 그는 천하태평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코코.”
“김시우.”
몇 번 이름을 불렀지만, 미동도 없는 시우를 움직이게 하는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냥 업고 가거나 안아 들고 가는 것이 훨씬 편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눈 때문에 에반은 깊이 잠든 시우를 부축하는 걸 선택했다.
자신에게 완전히 기대 눈을 감은 채 그래도 억지로나마 걷는 걸 보니 뭐라고 할지. 지금부터라도 어디서 술 먹는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따라붙고 싶은 심정이다. 조금이라도 멈추면 주저앉으려는 시우를 어르고 달래 그의 집으로 들어간 순간, 에반은 급히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야옹.”
시우를 침대에 눕히고 신발과 양말, 벨트만 풀어 주고 나와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을 따라 마시던 에반의 행동이 굳었다.
조명을 켜지 않아 밖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빛만이 감도는 집 안에서 들린 고양이 소리와 자신의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촉감.
그 촉감은 그것에서 끝나지 않고 아예 자신의 발등 위에 철퍼덕 누운 채 공격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솜방망이질로 에반의 바짓자락을 잡아 왔다.
“네가 있는 건 몰랐네.”
한 손에 물컵을 든 채, 살짝 상체를 굽혀 다른 손으로 고양이를 들었다. 에반의 손바닥에 가득 들어오는 고양이는 아직 성체가 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코코가 안 와서 혼자 심심했어?”
물을 마시고 고양이를 제대로 안아 든 에반은 천천히 집을 돌아다녔다.
강아지가 아닌 고양이가 있는 것부터 해서 모든 것이 딱 그였다. 이 집 자체가 시우였다.
슬리퍼에서 벽에 걸린 그림, 그가 쓰는 수저까지 디자이너가 선택한 것으로 통일감 있게 꾸며진 자신의 집과는 완전히 달랐다. 무언가 두서없는, 조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원목 가구를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뜬금없이 놓여 있는 새빨간 철제 캐비닛이라든지 토끼 모양의 실내화를 보는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행이 취미라더니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 온 소품들이 제각기 개성을 자랑했다.
얌전히 자신의 품에 안긴 채, 흔들거리는 후드 티셔츠 끈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골골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네 주인도 이렇게 날 좋아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느린 걸음으로 집을 구경하고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에반은 시우가 잠든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자를 침대 옆에 두고 앉았지만, 고양이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속 편한 사람이 시우가 아닐까?
어린아이처럼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그를 넋 놓고 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의 매니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난 널 알아도 넌 날 모른다.
반지하 방에서 눈뜨는 기분.
설마 그도 시간의 틈에 갇힌 것일까?
똑같은 일이 똑같이 반복될까?
열여덟 살. 자신의 방에서 눈뜨는 기분은 그가 말한 반지하 방에서 눈뜨는 기분과 같을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혹시 다시 돌아가더라도 자신이 바로 알아보는 것처럼 그도 자신을 알아봐 줬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미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거기에 하나를 더 더한다는 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만약 같이 무한 회귀 중이라면 자신에겐 어떤 영향이 올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언제쯤 알아줄까?”
갸르릉거리는 고양이를 쓰다듬다 높이 들어 시선을 맞췄다. 밤이라 커다래진 까만 동공이 반짝였다.
“알아는 줄까? 언젠가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고양이를 데리고 뭣 하는 짓인지.
내일도 이른 아침부터 스케줄이 있었다.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서너 시간 자고 나가야 했다. 떠나야 하는 걸 아는데. 한참을 더 미적거린 에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제 곁을 떠나지 않았다.
조금 뒤척이긴 했지만 깊은 잠에 빠진 시우를 등지고 돌아섰던 에반은 다시 몸을 돌렸다. 제멋대로 함부로 손이 움직일까 에반은 뒷짐을 지었다. 그리고 상체만 조심스럽게 숙였다. 앞머리가 흐트러진 이마의 빈 곳, 그 어딘가에 아주 짧게 에반의 입술이 내려앉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이건 오늘 널 여기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 값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한 에반의 입꼬리는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 * *
“옹아……. 형. 죽는다.”
시우는 깨질 것 같은 머리와 뒤집혀 미쳐 버릴 것 같은 배를 부여잡고 이불 속에서 웅얼거렸다. 어디에 있었는지 ‘야옹’ 소리와 함께 옹이의 기척이 근처에서 들리자, 시우는 침대 아래로 손을 늘어뜨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옹이가 손 위로 올라오기에 들어 침대에 내려놓았다. 분주하게 자신의 침대 위를 뛰어다니는 그 작은 울림에도 속이 울렁거리자, 시우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았다.
예찬이와 루프톱에서 술을 마셨고, 걔가 누굴 짝사랑한댔는데. 대충 기억을 떠올리던 시우는 목을 긁적이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벗겨 놓은 양말과 벨트를 보니 결국 술에 진탕 취한 자신을 진욱 형이 픽업 온 것 같았다.
웬만해선 밖에서 술 먹다 이렇게 취하는 일이 없는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루프톱의 그 분위기에 취한 것 같았다. 더군다나 원래 남의 연애 이야기가 젤 재미있지 않은가? 혼자 짝사랑한다더니 가만히 듣고 보면 쌍방 삽질 같기도 했다.
“잘생기고 능력 있는 놈이 뭐가 고민이야. 고백하고 차이면 잊고 그러고 사는 거지. 무한 회귀 중이라는 이런 게 진짜 비밀이지. 아니면 혹시 정체를 숨기고 있는 외계인이라거나 그런 거.”
계속 발치에서 알짱거리는 옹이를 밟지 않게 신경 쓰며 거실로 나간 시우는 혼자 중얼거리며 머리를 헤집었다. 아, 진짜 소맥은 마실 때 좋은데 뒤끝이 너무 구려.
옹이는 시우의 고양이가 아니었다. 회귀할 것이 뻔한데 어떻게 무책임하게 동물을 키운단 말인가? 절대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는 시우의 뜻을 가볍게 무시해 버린 누나가 입양한 고양이였다. 그리고 지금은 누나가 여행 간다며 며칠 맡겨 놓은 것이다.
“어제 진욱 형 왔다 갔어? 진욱 형은 왔으면 옹이 밥도 챙겨 주고 가지.”
어린 녀석이 어찌나 사람을 좋아하는지 계속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걸 피하며 옹이 밥부터 챙겼다. 그리고 무심코 식탁에 시선을 준 시우는 멍하니 그 위를 바라보았다.
자두.
딱 한 개의 자두가 작은 접시에 담겨 식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직 높은 곳에 마음대로 올라가지 못하는 옹이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옹이 배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식탁 앞으로 다가간 시우는 접시 아래 깔려 있는 종이를 빼냈다.
흘림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단정한 글씨체였다. 누군지 몰라도 필체는 좋은데, 문제는 진욱 형은 악필이라는 것이다.
누구지?
[냉장고에 콩나물해장국 있으니까 거르지 말고 챙겨 먹어. 자두는 더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종이를 확인한 시우는 냉장고를 열었다.
콩나물해장국이 있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욱 형이 그의 냉장고를 채워 놓는 건 익숙한 것이니까. 하지만 포장지에 적혀 있는 상표가 문제였다. 근처에 있는 유명한 체인점 상표가 아니다. 하얀 봉지 안의 일회용 용기에 담겨 있는 해장국과 깍두기. 그리고 즉석밥.
시우는 서둘러 깍두기 뚜껑부터 열었다. 좋아하는 깍두기 특유의 냄새를 맡은 시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여기서 차로 30분은 가야 하는 곳이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유명한 곳도 아니다. 할머님들이 하시는 아주 작은 곳.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해장용으로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수시로 생각나면 가서 먹는 곳. 그리고 할머님들은 밥은 포장해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사서 넣었을 즉석밥.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식탁 위에 펼쳐진 것을 보던 시우의 시선이 마지막에 닿은 곳은 자두였다. 늦은 밤 자두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왜 딱 하나만 뒀을까?
무언가 생각날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