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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44화 (44/187)

44화

에반이 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시우를 깨우려고 했던 예찬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얼음을 와작와작 씹었다. 잠시 잠깐 졸고 일어난 시우는 천하무적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술주정을 딱히 험하다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단지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것 같았다.

“시우 형. 괜찮아요? 얼음물 좀 마실래요?”

“아무도 몰라.”

대답만 했을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기에 예찬은 그의 손에 얼음물이 든 잔을 쥐여 주었다.

“제가 다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주소나 매니저 연락처 좀 주면 안 돼요?”

“자두 먹고 싶어. 예찬이야? 응. 예찬이네. 아무도 몰라. 내가 말해도 아무도 안 들어. 안 들리나 봐.”

처음 술기운이 돌 때는 발그스름하더니 평소대로 하얀 피부로 돌아온 시우는 눈만 끔벅이다 알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주절거렸다.

“자두는 또 뭐야. 형, 말해요. 일단 내가 다 들을 테니까 우리 얼음물 좀 마시고 정신 차리면 안 될까요?”

“에반이도 알고 너도 알고 나는 전부 다 아는데, 너희는 나 몰라.”

지금까지 괜찮더니 왜 이 타이밍에 울려고 해요? 갑자기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시우의 눈가가 촉촉해지자, 예찬은 말 그대로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다.

“형, 진짜 제발 나 좀 살려 주라. 에반 형 오면 나 죽일지도 모른다고요. 뚝, 하고 내가 다 알아요. 다 아니까 제발 울지 말자. 응?”

분명 예찬도 어느 정도 취했었지만, 에반이 온다는 연락을 받은 이후 술기운이 싹 달아나 버렸다.

“네가 뭘 아는데?”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색한 채 묻는 말에 예찬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알면 되죠. 형이 나 알고, 나도 형 알고!”

잠시 멈췄던 것 같은 눈물이 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아무도 모른다고. 눈떴는데 반지하에 있는 그 기분을 아무도 몰라.”

시우는 다시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예찬은 가물거리던 시우의 눈이 감기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에반이 왔을 때, 시우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이진 않아도 되는 것이다.

“…….”

시원한, 어쩌면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이 살랑이는 루프톱에 올라온 에반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굳이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시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천을 걷고 들어가자 소파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잠든 시우가 보였다. 잠깐 그를 보던 에반은 그의 몸을 덮고 있는 예찬의 겉옷을 집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 많이 마시진 않았는데, 시우 형이 집이랑 매니저님 연락처를 말 안 해 줘요.”

“알겠어.”

그가 건네는 옷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예찬은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시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저 가 볼게요.”

“그래. 다음에 보자.”

자신의 어깨를 툭 두드려 주는 에반의 손길에 예찬 역시 그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늘 투덕거리고 장난치는 사이였기에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에반은 자신의 재킷을 벗어 시우의 몸에 덮어 주고는 건너편에 앉았다. 속 편하게 잠든 시우를 지켜보자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일주일간 연락도 안 되고 그렇게 애태우더니. 혹시나 추울까 깨워서 집에 데려다줘야 했지만 잠든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서 반달 모양의 예쁜 눈썹과 꼭 감긴 눈, 코, 입술까지 시우의 모든 곳에 에반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계속해서 그렇게 잘 것 같던 시우가 비척거리며 일어나자, 에반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신을 보고 놀랄까 봐 몸을 조금 뒤로 물러앉았다.

눈 뜨는 것이 힘든지 슬쩍 뜨였던 눈이 다시 감겼다. 그리고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는 그의 눈동자는 에반을 향했다. 취기에 젖어 풀린 눈으로 한참을 보더니 시우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와. 재밌다.”

흔들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 앉더니 입술을 오물거린 시우는 아주 느릿하게 손뼉 치며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예찬이가 잘생겨져써. 와, 나 술 취했나 봐.”

“취한 건 아시나 봐요. 김시우 씨.”

물을 찾는 것인지 술을 찾는 것인지 허공을 휘적거리는 시우의 손짓에 에반은 술잔을 치우고 물컵을 쥐여 주었다.

“자두 먹자!”

뜬금없이 자두를 찾았기에 에반의 시선이 절로 테이블로 향했다.

“꼭 너 같은 거 먹고 싶다고 하지?”

과일은 보였지만 자두는 없었다. 하긴 술안주로 과일을 주문해도 자두가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지. 시우의 술버릇에 관한 건 알려진 것이 없었기에 에반은 대답해 주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지금 자두를 살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예찬아.”

“왜.”

“나는 누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잘생겨져써?”

시우가 자신을 뭐라고 부르든 누구라고 생각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두 파는 곳을 찾는 것에 열중하던 에반은 갑자기 자신의 볼을 잡는 작은 손에 딱 굳었다.

“이상하다. 예차니가 에바니로 보이네.”

“누구면 좋겠는데?”

언제 자신의 옆자리로 온 것일까?

자신의 얼굴을 마음대로 만지는 시우의 손길을 피하지 못한 채, 어떤 한 대답을 기대하며 에반은 질문을 던졌다.

“고백할 거지?”

“뭐?”

둘이서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나눴길래! 에반은 밑도 끝도 없는 그의 말에 아직도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목을 잡았다. 그랬더니 살짝 손목을 빼낸 시우가 오히려 에반의 두 손을 맞잡았다.

“꼭 고백해.”

풀린 눈을 부릅뜬 시우는 큰 손을 겨우 잡고 짤짤 흔들면서 고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랑해.”

기계에 입력된 단어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 단어가 에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에효. 바보 멍청아.”

아주 잠깐 부릅뜨긴 했지만 이내 한없이 무거운 눈꺼풀이 까무룩 내려앉았다. 부드럽게 사르륵 옆으로 넘어가는 시우의 어깨에 팔을 둘러 품으로 당긴 에반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가 멍청이고 누가 바보인데.

“내가 많이 생각했는데, 하― 왜 넌 몸도 좋아?”

방금 잠든 거 아니었나?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그랬는데,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처음에 작은 손이 가슴을 밀어내기에 일어나려고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어깨에 둘렀던 팔에 힘을 빼고 그가 원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작은 손을 꼬물거리면서 에반의 가슴을 더듬는 게 아닌가.

“왜 난 알파 아닐까?”

한 손을 에반의 가슴에 얹어 놓고는 다른 손으로 제 가슴을 팡팡 치는 행동에 에반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붉게 달아오른 귀를 어쩔 수도 없었고,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도 제어할 수 없었다.

가슴 근육에서 어깨, 팔뚝까지 시우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가끔 한숨을 쉬면서 이럴 일인가? 다른 곳도 아니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루프톱에서?

지금 에반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술 취한 시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고, 이 모든 행동이 다 주사인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에반의 옆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시우의 손이 에반의 후드 티셔츠 목선 부분을 확 잡아당겼다. 오버핏의 후드가 단번에 시우의 손길에 확 딸려 가며 에반의 한쪽 빗장뼈와 어깨가 드러났다.

“안 보이자나.”

옆으로 당긴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번엔 양손으로 목선을 잡고 앞쪽으로 당겼다. 그러고는 그 작은 머리가 앞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에반의 코에 장렬하게 부딪쳤다.

“아…….”

갑작스러운 통증에 한 손으로 코를 감싸 쥔 에반과 다르게 시우는 앞으로 늘어난 목선 안을 구경하기 바빴다.

“벗어.”

취기로 풀린 동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우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지금 그가 선택한 단어는 너무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코코.”

에반은 깊게 한숨을 쉬며 여전히 자신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대는 시우의 손 위에 자신을 손을 겹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손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어찌나 세게 잡고 있는지 쉽게 놓게 할 수도 없었다.

“이걸 놔줘야.”

“벗으라고.”

“코코. 말 들어. 계속 말 안 들으면 뽀뽀해 버린다.”

술 취한 애를 데리고 뭘 하는지, 이리저리 어르고 달래도 안 되자 에반은 허탈한 마음에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코앞에서 아른거리는 그 얼굴, 그 입술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달큼한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방싯거리기까지 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실랑이하는 대화는 어떻고.

“뽀뽀하면 벗을 거야?”

“미치겠다. 김시우. 확 잡아먹어 버리기 전에 놔.”

“나 먹는 거 아니야.”

“너 지금 술 취한 거 아니지?”

나른한 목소리와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이 한 박자씩 늦었지만, 나름 논리를 가지고 대꾸하는 시우였기에 에반은 모든 걸 포기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가 당겼다가 도대체 뭘 하려고 옷을 벗기려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앞에서 시우는 나름 혼자 심각했다.

“왜 벗으라는 건데?”

“구경하게.”

“하. 진짜 널 내가 어떻게 이겨. 그러지 말고 코코, 우리 자두 먹으러 가자.”

놔 달라는 에반과 벗으라는 시우의 실랑이는 자두로 극적 타협을 할 수 있었다. 자두라는 말과 동시에 손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이 사르륵 빠져나갔다.

시우가 또 어떤 행동을 할지 몰랐기에 에반은 서둘렀다. 혹시 하는 마음에 챙겨 온 캡 모자를 그에게 씌우고 자신의 재킷을 제대로 입혔다.

“이것도 할 짓이 아니네.”

늘어난 건지 너덜거리는 후드를 추슬러 입고 마스크를 착용한 에반은 그 짧은 시간 옆으로 쓰러져 잠든 시우를 보곤 피식 웃었다.

“일단 집에 가자. 알겠지?”

마음 같아서는 편하게 안아 들고 나가고 싶었지만, 에반은 시우를 일으켜 세웠다. 굳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 필요가 없었다.

“어? 예차니가 잘생겨져써.”

“예찬이보다 잘생겼다고 해 줘서 고맙네.”

까무룩 잠들었다가 일어날 때마다 시우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한쪽 옆구리에 끼다시피 해서 부축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도, 에반의 차 조수석에 탈 때도.

시우의 집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깨웠을 때도 시우는 에반을 예찬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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