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잘 지냈어?”
심장이 쿵덕거리고 에반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시우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당황해 대답을 못 한 시우는 직원이 안내해 주는 대로 의자에 가서 앉았다. 숍의 한쪽에는 두세 명 정도의 소규모 인원을 위한 룸이 있었다.
진욱은 주차 후 카페에서 커피를 사 온다고 했기에 먼저 차에서 내린 시우는 직원이 안내해 주는 대로 이곳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에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작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신과 에반, 숍 직원 두 명이 전부였다. 굳이 친하지도 않은 사람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진 않았기에 시우는 백팩을 꾸물거리며 열었다.
휴대전화를 꺼 놓은 것을 물어볼까? 아니면 그날 그 일에 대해서 말을 할까?
시우의 머릿속엔 너무 많은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연상되었다. 나란히 앉아 있었기에 고개를 들면 거울에 비친 그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우는 고개를 들지 않고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오늘 프로그램 타이틀 촬영이라면서요? 시우 씨 이쁘게 하고 가야겠다.”
시우는 대답 대신 숍 직원을 향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예쁘게 하든 어떻게든 빨리하고 절 이 공간에서 나가게 해 주세요.
“아침 안 먹었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이어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부기를 뺀다고 얼굴 전체에 붙여 놓은 팩들 때문에 눈을 뜰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눈과 입술 위에도 촉촉하게 젖은 천이 덮어 씌워져 있었으니까.
“전화기는 왜 꺼져 있어? ‘Journey’ 멤버들 다 궁금해하는데.”
일부러 지금 질문하는 것일까? 시우는 지금 표정이나 눈빛, 목소리 등으로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할 수 없었다. 깊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시우는 손끝으로 자신의 무릎에 올려져 있는 책을 톡톡 두드렸다.
“그날 내가 한 말, 못 들은 걸로 해 줘.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널 혼란스럽게 할 생각은 없었어. 진심으로 사과할게.”
보이지 않았으니 그의 표정으로 감정을 읽을 수 없다. 대신 목소리만큼은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불편한 상황을 길게 끌 수 있는 성격도 못 되는 시우는 일정한 박자로 책을 두드리고 있던 손끝을 멈췄다.
먼저 숙이고 나오는 사람에게까지 날을 세울 만큼 시우는 모질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와 예전처럼 편안한 관계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팬덤을 가진 오션의 리더라든가 자신의 팬이라든가, 이런 건 머릿속에서 다 지워 버렸다.
형질이나 사회적 지위, 재력, 집안 배경 등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인간 대 인간으로 일로 엮인 관계. 그게 시우가 원하는 관계였다.
멈춰 있던 시우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표현을 할 수 없으니 손으로라도 대답을 해 주려는 것이다.
에반은 꼬물꼬물 움직이는 시우의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본 시우는 평소와 똑같았다. 가끔 텐션이 높을 땐 날아갈 듯 가볍고 붕붕 떠다녔지만, 평소의 그는 천천히 흐르는 큰 강 같았다.
자신을 보고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그 귀여운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우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기껏 쌓아 올린 탑을 무너뜨린 건 자신이었다. 수십 번 무너진다면 수백 번 쌓으면 되지.
기초화장을 시작하기 전 시우의 얼굴에 팩을 붙이고 직원들이 나가자, 에반은 아예 몸을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도 『셜록 홈스』를 읽고 있더니 오늘도 그가 가지고 온 책은 『셜록 홈스』였다.
다리 위에 다소곳이 책을 올리고 작은 두 손은 부드러운 책의 겉을 쓰다듬었다.
에반은 잠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우의 기획사는 철저히 시우 편이었다. 소속 아티스트를 보호한다는 말과 함께 아티스트가 원하지 않는 일정을 일절 잡지 않겠다는 견해를 표명해 왔다.
작았지만 부채 없이 알차게 굴러가는 기획사를 가지고 장난칠 이유는 없었다. 새로운 일정을 잡을 순 없지만 ‘Journey’와 관련된 스케줄은 모두 참석한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일주일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휴대전화를 꺼 버린 시우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밖에 그를 기다리는 기자들이 있는 걸 알기에 창가에도 얼씬하지 않았다.
가장 무난한 식사에 관한 질문에 작은 몸이 파드득 떨렸다. 불안한지 부드럽게 책을 만지던 손끝은 일정하게 책을 두드렸다. 그 작은 행동의 변화에 에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시간은 많았다. 기회도 많았다.
자신의 사과와 함께 책을 두드리던 손끝이 멈췄다. 그리고 침묵이 둘을 감쌌다.
어쩌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사과하는 것이 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 까맣고 말간 눈동자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 걸 읽었다면 어떤 행동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잔잔하게 깔린 클래식 음악이 숨 막힐 듯한 기다림의 시간을 채웠다. 그리고 멈춰 있던 시우의 손끝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표정으로 말로 의사를 전할 수 없었기에 손가락으로 대답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꼬물꼬물 움직인 검지와 엄지가 동그랗게 말렸다. 자신의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작은 몸짓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에반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났다. 겨우 그 작은 행동에 에반의 마음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에반은 손으로 제 하관을 가렸다. ‘OK’ 사인을 하고 살랑살랑 흔드는 작은 손이 가져온 파장은 가슴에서부터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아! 코코. 넌 진짜……. 미치겠다. 널 어떡하니.”
에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움직이는 소리에 시우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지만, 자신의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커피 드세요.”
두어 발자국 옆 숍의 의자에 앉아 있는 시우에게 다가가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거리는 진욱의 등장으로 태평양보다 넓어졌다.
“시우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에반 씨는 아이스아메리카노 괜찮으세요? 조각 케이크도 있어요.”
진욱의 등장을 시작으로 잠시 자리를 비웠던 스태프들이 들어왔기에 시우와 에반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시우는 얼굴에 올리고 있던 팩이 사라지자, 눈동자만 데굴 굴려 거울에 비친 에반을 훔쳐보았다. 얼핏 거울 안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눈동자를 반대로 굴렸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천천히 마셨다.
일단 그의 사과를 받아 준다고 표현했으니, 더 어색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 남은 촬영 동안 그와 엉뚱하게 엮이지 않기만을 바랐다.
* * *
“오! 시우 형이다.”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촬영에 방해되지 않도록 뒤에서 인사하던 시우는 갑자기 자신을 덮치는 커다란 그림자에 몸을 굳혔다.
“잘 지냈어?”
뒤에서 덥석 안고는 휙 들어 양옆으로 짤짤 흔드는 통에 제대로 말을 못 한 시우는 예찬이 내려 주고 나서야 겨우 대답했다.
“형 완전 잠수. 아무도 연락 안 되고, 내가 기획사에까지 연락했는데! 컥.”
시우를 내려다보며 투덜거리던 예찬은 갑자기 목덜미가 잡혀 끌려가며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촬영 끝났으면 좀 쉬든지.”
무표정의 에반은 예찬이 시우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고 나서야 잡고 있던 옷을 놓아주었다.
“아. 형은 맨날 나한테만! 시우 형. 오늘 촬영 끝나고 뭐 해요?”
에반에게 언제 그렇게 끌려갔냐는 듯 다시 시우 옆으로 다가온 예찬은 시우의 한 손을 끌어 잡고 상체를 약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에반은 누군가와 짧은 대화 후 어디론가 가는 게 보였다.
“촬영 끝나고? 뭐 없는데.”
예찬의 말에 성실하게 대답한 시우는 초록색 크로마키 배경 천 앞에서 촬영하던 안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덩달아 잡히지 않은 손을 흔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눈인사하고, 멀리서 알은척하는 안에게도 인사하고, 바로 앞에서 알짱거리는 예찬이까지…… 시우는 정신이 없었다.
“시우 왔어? 안이 촬영 끝나고 단체 촬영이니까, 대기실 가서 옷 갈아입고 와.”
시우의 옆을 지나치던 메인 작가가 그를 보고 인사와 함께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자, 시우는 군말 없이 대기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형! 나랑 밥 먹으러 가요. 형, 뭐 좋아해요?”
이 복잡하고 정신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예찬만이 톡톡 튀며 시우의 옆을 지켰다. 진욱 형은 또 어디 갔는지.
“나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뭐예요? 소고기 괜찮죠? 여기 근처에 진짜 맛있는 한우 전문점 있어요.”
대기실까지 따라 들어온 예찬을 보고 시우는 머리를 잘게 흔들었다. 이번 촬영은 협찬받은 회사의 옷을 입는다는 연락이 있었기에 편하게 사복을 입고 왔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을 뒤적거려 자신의 이름이 붙은 걸 확인한 시우는 옷을 꺼내 옆에 있는 소파에 툭툭 던졌다.
예찬과 밥 한 끼 같이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쉽게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짜 아무랑도 연락 안 했어요? 에반 형이랑도?”
“촬영 갔다 와서 긴장이 풀렸는지 몸살 나서 푹 쉬었어. 매니저 형이 먹을 거 사다 주고 그랬잖아.”
“어쩐지. 나 라디오 나갔다가 형한테 전화했는데, 형 전화 안 받아서 완전 쪽팔렸잖아요. 우리 채팅방에 형 나오지 않아서 다들 무슨 일 있나? 어쩌나 그랬는데.”
“그랬어? 미안해. 그런 줄은 몰랐네. 라디오 출현했으면 다른 애들한테 하지, 왜 나한테 전화했어.”
시우는 입고 있던 니트를 벗어 소파에 두고 갈아입어야 하는 티셔츠를 집었다.
“그냥 라디오에서 우리 찍은 거 묻고 그러다가 형 이야기 나오고, 다들 궁금해하니까 전화 걸었……. 우와! 형, 진짜 몸…… 그때도 느꼈는데 진짜 예쁘다.”
누가 옆에 있다고 옷을 못 갈아입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은 남자끼리 뭐가 그렇다고, 소파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예찬을 보며 시우는 피식 웃었다.
넌 이쁘다고 말해 주는구나. 누구는 아주 신경질 냈었는데.
“예쁘긴. 나도 진짜 너만큼 키 크고 체격 좋았으면 좋겠다.”
“아니야. 형 완전 말랐는데, 그래도 잔 근육 이쁘게 있잖아요. 완전 허리 한 줌이다, 한 줌이야. 먹고 살 좀 찌웁시다, 우리. 그러니까 끝나고 소고기?”
“기승전 밥이야?”
티셔츠를 입은 시우는 벨트에 손을 가져갔다.
“코코. 제발 조심 좀 하면 안 돼?”
벨트를 풀던 시우는 낮다 못해 협박처럼 어둡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