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시우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태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욱의 말을 들었기에 이 늦은 시각 자신을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맥주 마실래요?”
몸을 비켜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자리를 내주고 먼저 집으로 들어가며 말을 꺼냈다.
“냉장고가 텅텅 비었다더니 맥주는 있나 보지?”
“소주도 있긴 해요. 저 소맥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 그럼 맛있게 한잔 말아 봐.”
“마땅한 안주가 없는데, 라면 부숴 드실래요? 저 가끔 그렇게 먹거든요.”
마치 자신의 집인 듯 편안하게 들어와 소파에 자리 잡는 태훈을 두고 시우는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테이블 위에 맥주와 소주가 쌓이고, 둘 사이엔 정말 부숴서 수프를 뿌린 라면이 놓였다.
맥주와 소주를 섞어 폭탄주를 만들어 태훈의 앞에 둔 시우는 자신의 것까지 만들었다.
“군대 간다고?”
“네.”
“언제?”
“‘Journey’ 본방 끝날 때 맞춰서요? 지금 지원 입대 신청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태훈이 잔을 들자 두 손으로 자신의 잔을 잡고 가볍게 부딪친 시우는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어리다고 원샷이냐? 몸 챙겨. 한순간에 훅 가는 거 몰라?”
“저 아직 스물세 살입니다. 걱정하기엔 좀 이르죠. 대표님 걱정이나 하십쇼.”
“나도 아직 마흔 안 됐거든?”
“젊어서 좋으시겠어요.”
대표와 소속 가수의 대화가 맞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편안한 대화가 오갔다.
“형.”
“뭐, 인마.”
태훈이 한 잔을 마실 동안 세 잔이나 마신 시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밉죠?”
“그럼 이쁘겠냐? 하루 종일 사람과 전화에 시달렸는데.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아직 정정하십니다요.”
“조금 전에 까 놓고 이러기냐.”
태훈의 한숨에 시우는 멋쩍은 미소를 짓고 다시 그의 앞에 폭탄주를 만들어 놓았다.
“왜 또 도망가?”
“도망은 무슨.”
“니 새끼를 내가 모르냐? 인마. 넌 방송 몇 번만 타면 바로 승승장구할 놈이 왜 그렇게 몸을 사려? 이번 핑계는 뭐냐? 도망가는 핑계나 한번 들어 보자.”
단도직입적인 태훈의 질문에 시우는 라면을 입에 넣고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씹었다.
“무서워서요.”
태훈은 재촉하지 않았고, 시우도 서두르지 않았다.
“쯧. 한 잔 더 말아 봐라. 기가 막히게 잘 마네.”
둘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벌써 다섯 잔째 폭탄주를 마시는 시우의 얼굴이 발그스름히 달아올랐다. 온몸이 따뜻하고 몽롱한 것이 시우의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죄송합니다.”
“알긴 아냐?”
“모르면 바보지.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 건데요? 닥치고 돌리면 돌 거 아시잖아요.”
“인마. 너 이 짓 왜 하냐?”
“무슨 짓요.”
“딴따라.”
“그러게. 저 왜 할까요?”
술이 피를 타고 몸을 흐르기 시작하자, 몽환적으로 붕 뜨는 기분에 시우의 입꼬리가 계속 슬금슬금 올라갔다.
“군대 다녀와. 가고 싶다는 놈 안 잡는다. ‘Journey’ 잡을 때 너랑 약속한 것도 있고. 다녀오면 다시 이 바닥에 돌아올 거긴 하고?”
“아, 씨. 형은 왜 매번 그러냐. 왜 이렇게 사람이 착해 빠졌어요? 이러니까 맨날 그러지. 아오, 진짜 내가 담에는 형한테 로또 선물로 드릴게요. 알겠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이거 이거 배슬배슬 웃으면서 사람 녹이는 거 보니 취했네. 인마, 난 가련다. 프로그램 타이틀 촬영하고, 그 뒤에 코멘터리, 본방 나갈 때 회식. 일단 이게 공식 일정. 또 궁금한 거 있냐?”
“나 형한테 갚을 빚이 너무 많은데.”
“들러붙지 마, 인마. 정들어.”
“정 좀 들면 안 돼요? 형이 이렇게 해 주니까 나도 약속 하나 해 드릴게요.”
처음엔 마주 보고 앉아 있었지만, 어느새 슬금슬금 태훈의 옆으로 간 시우는 흔들리는 팔로 그를 꽉 끌어안고 웅얼거렸다.
“하지 마. 뭐 이쁘다고 내가 너랑 약속을 해?”
“CF. CF 하나는 뭐가 됐든 꼭 찍을게요. 그리고 그거 저 정산 안 받을 테니까, 회사 공금으로 처리하든 어쩌든 형 마음대로 하세요.”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말자. 시우야, 너 지금 부르는 몸값이 얼만지나 알고 그래?”
어깨를 으쓱한 시우는 태훈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천? 몇억? 돈은 시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걸로 태훈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형. 내가 생각해 봤는데, 제일 억울한 게 뭔지 알아요?”
정말 가려는지 일어나는 태훈을 보며 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마음대로 하고 사는 놈이 억울한 게 있긴 해?”
“지금 계획대로 군대에 간단 말이에요. 열심히 뺑이 치고 고생 다 했는데. 전역 전날 눈떴는데, 열여덟 살인 거야. 그럼 진짜 빡칠 거 같아요.”
“취했네, 취했어. 나오지 마, 인마.”
시간이 흐를수록 술기운이 오른 시우는 비틀거리며 태훈을 따라가 현관문 앞 벽에 기대섰다. 진짜 그럼 나 울어 버릴 거야. 최악이지 않아요? 제일 이상적인 건 지금 눈뜨면 열여덟 살인 거예요.
시우는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태훈은 술 취해서 하는 헛소리로 들으며 그의 집을 벗어났다.
현관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시우는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쪼그리고 앉았다.
“아무도 몰라, 아무도. 좀 믿어 주지. 나 엄청 용기 내서 말한 건데. 그래도 내가 다음번엔 형한테 로또 진짜 줄게요. 진짜 약속해.”
두 팔로 다리를 끌어안은 시우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이상하게 다시 울보가 되었다. 회귀가 시작된 이후 운 건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회귀하지 못해 생긴 문제인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무릎에 얼굴을 묻은 시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에반이 보고 싶었다.
그 짙은 어둠에 가라앉은 초록 눈동자를 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상한 말을 하고 제멋대로인 그와 있으면, 그 눈을 보면 알 수 없는 안정감이 찾아왔으니까.
시우는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쥐어 보았다. 천천히 손을 폈다가 느리게 쥐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지금 잡히는 것이 크고 따뜻한 그의 손이라면 어떨까?
시우의 시선이 침실로 향했다. 그곳엔 전원을 꺼 버린 휴대전화가 있었다.
애써 무시했던 [미안해]라는 그 메시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단축 번호를 누르면, 그러면 문명의 이기는 그와 자신을 이어 줄 것이다.
“이제 술도 못 먹겠다.”
조심스럽고 느리게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은 자신을 너무 감정적으로 만들었다.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엎어진 시우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태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는 것이 그의 버릇이 되어 있었다.
그리 긴 시간을 잤지만, 온몸을 잠식한 알코올은 시우를 수면의 세계로 이끌었다.
* * *
“너 진짜 전화 안 켜?”
“굳이 켜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형도 있고, 뭐 딱히 다른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상 한동안 학교도 못 가니까.”
시우는 참으로 요란하게 찢어진 청바지에 헐렁한 니트를 입고 전신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았다. 실로 일주일 만의 외출이다.
컴퓨터를 켜지도 않았고 휴대전화는 계속 꺼 둔 상태였다. TV도 켜지 않았고, 그동안 한 것이라고는 집에 쌓여 있는 책을 읽은 게 전부였다.
자신이 선택한 건 도피였다. 타인에게 의존해서 얻는 것은 제 것이 아니었다. 굳이 지금 자신의 인기 정도라든가 커뮤니티의 반응 이런 것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너도 참 징하다. 진짜 결국 그런 결정 한 거야? 그런 결정을 하는 너나. 그걸 내버려 두는 태훈 형이나. 아, 난 모르겠다. 그러니까 진짜 노 들어왔을 때 물 저으라고!”
거울에 자신을 한번 비춰 본 시우는 서랍을 열어 벙거지를 찾아 눌러썼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젓는 거예요.”
흥분을 잘하는 진욱은 급한 마음에 말을 엉망으로 하는 버릇이 있었다.
“야. 선글라스도 써.”
진욱보다 먼저 나가려던 시우는 자신을 저지하고 앞서는 그의 말에 다시 몸을 돌려야 했다. 이런 게 진짜 인기인의 삶인가? 벙거지 때문에 얼굴이 죄다 가려졌지만, 진욱은 시우가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걸 확인하고서야 현관문을 열었다.
“주위 민원 좀 들어가서 너 이사해야겠더라.”
한강이 보이는 고급 오피스텔이었기에 기자들이 함부로 들락거리진 못했다. 대신 시우가 나오기를 기다리다 보니 주위가 혼잡했고, 그로 인한 민원이 발생한 것이다.
“곧 군대 가는데 이사는 무슨. 오늘 촬영에 취재진 온다면서요.”
“그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잖냐. 넌 일단 일주일 동안 여행으로 인한 피로와 컨디션 난조로 집에서 휴식한 것으로 말해 놨으니 그리 알고 있어. 혹시 누가 물었는데 엉뚱한 대답 하지 말고.”
변변한 밴을 준비할 이유도 없었기에 이동 수단으로 시우의 SUV를 선택했다.
“아, 진짜 내가 할 말이 없다. 이게 다 뭐야.”
조수석이 아닌 뒷좌석에 앉은 시우는 창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암막 커튼에 혀를 내둘렀다. 밖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짙은 선팅이 아닌 생활형 선팅만 해 둔 차는 외부에서 쉽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임시방편으로 암막 커튼을 둘러놓은 것 같은데, 문제는 그 무늬였다.
“왜? 제일 빨리 배송되는 거 찾아보니 이런 거밖에 없더라. 귀엽지 않냐?”
그러시겠죠. 귀여운 동물들이 그려진 암막 커튼에 둘러싸인 시우는 마치 동물원에 온 기분이었다. 동물원, 사파리. 시우는 비어 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보았다. 카메라를 만지고 있는 누군가의 환영이 아른거리다 곧 사라졌다.
평소라면 휴대전화를 꺼내 게임도 하고 이것저것 봤을 시우지만, 가방에 넣어 둔 책을 꺼냈다. 휴대전화가 없는 삶에 익숙해진 그에게 책은 생필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촬영 큐시트 확인했어요?”
“앞서 다섯 명이 먼저 개인 촬영을 하고 단체 촬영 다음에 너, 마지막이 에반. 숍에 가서 준비하고 바로 넘어가야지.”
분명히 읽으려고 꺼낸 책이었지만, 책은 시우의 무릎 위에 펼쳐져 있었다.
이제 곧 그를 만날 것이다. 시우는 짧게 숨을 끊어 쉬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이, 그렇게 그를 대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와 마주치는 순간 시우의 결심은 무너져 내렸다.
“안녕.”
촬영장이 아닌 숍에서 그를 볼 줄은 몰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