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놓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다. 차에 오르고 벗었던 후드를 다시 썼다. 손으로 대충 얼굴을 훑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치겠다.”
누르고 누르던 것을 폭발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엔 항상 이런 허무함이 남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괜히 지금껏 쌓인 것을 분풀이한 기분이다.
시우의 안에서 거칠게 몰아치던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에반과 함께였을 때였고, 지금과 비슷한 상황, 그와 트러블이 있을 때였다.
머릿속에서 생각은 끊임없이 꼬였고 누적된 피로가 몰려왔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던 눈물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멈췄다.
톱스타? 인기 스타? 에반은 자신을 몰랐다. 겨우 열흘 보고 누군가를 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비벼서 타인의 도움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곳이라면 진작에 올라갔을 테지. 내 노력으로 스스로 올라가지 않는 이상 소용없다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제안이 악마의 거래보다 달콤하게 느껴졌지만, 달콤할수록 끝은 지독할 것이다.
시우는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서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그의 집은 고층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높은 곳을 좋아했을까?
“에반. 사람 잘못 봤어.”
아주 짧은 시간 시우는 복잡한 감정을 쳐 냈다. 대학 졸업 후 병역 의무를 질 생각이었지만, 조금 일찍 입대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 전에 회귀해도 좋고.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시우는 착실하게 자신의 루틴대로 움직였다. 원래대로였다면 여행 가방까지 모두 정리하고 쉬어야 했지만, 그것까지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시우는 휴대전화부터 껐다. 입고 있는 옷을 벗고 깨끗이 씻은 후, 수면제 두 알을 챙겨 먹었다. 마지막으로 침대로 파고든 시우는 몸을 웅크렸다.
머리가 한없이 복잡할 때 시우가 도피처로 선택하는 건 잠이었다. 쉽게 잠들지 못할 것을 알기에 수면제도 먹었다.
일정하게 깜박이던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졌다. 깜박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도피하는 동안만큼이라도 그 어디에도 쫓기고 싶지 않았다.
회귀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자고 눈떴을 때, 늘 회귀가 시작되는 지점 열여덟 살 그 어느 날, 반지하 좁은 방이길.
* * *
“젠장.”
에반은 욕설을 내뱉으며 앞에 있는 의자를 발로 찼다. 결국 울려 버렸다.
자신을 쏘아보는 눈엔 원망이 가득했다.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성급함이 그를 너무 코너로 몰아 버렸기에 도망치는 그를 쫓을 수 없었다.
쓸데없이 착한 그는 이 상황에서도 매니저들을 향해 정중한 인사까지 했다. 그의 발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들썩이는 어깨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작은 인영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시우가 자신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당장 뛰어 내려가 그를 잡고 싶었다. 따라 내린다면 또 그를 몰아붙일 것이 분명했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고, 질끈 깨문 어금니 때문에 턱선이 도드라졌다.
“뭐 해요? 출발 안 해?”
겨우 그가 사라진 복도에서 눈을 떼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애써 쓰고 있는 가면에 금이 갔다. 하지만 이 가면을 벗을 순 없었다. 지금껏 잘 참아 왔지만, 이제 시우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극한으로 몰았다.
공항에서의 일로 하얗게 질린 얼굴과 목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이 아른거렸다. 자신을 노려보며 원망을 숨기지 않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스케줄 좀 잡아 봐요.”
이제 그를 보기 위해선 연락을 해야 했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것도 그가 허락하는 시간만큼만 가능했다. 방금의 일로 자신의 연락을 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를 끌어내야 했다. 몰랐다면 모른 채로 살았겠지만, 알아 버린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Journey’ 촬영 끝나면 쉬고 싶다며.”
“그냥 잡아 주시죠. 김시우도 끼워서 다른 조건은 알아서 조율하고. 대신 김시우 출연 없으면 그 어디에도 안 나갑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끝낸 에반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귓가로 감미로운 시우의 목소리가 녹아들었다. 이 순간 자신보다 답답한 사람이 또 있을까?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정보가 필요했다. 그저 팬으로 핥던 김시우의 겉모습이 아닌 더 깊은, 숨겨진 어두운 부분까지 다 찾아내야 했다.
“젠장.”
시우를 떠올리다 또 에반은 앞의 의자를 걷어찼다. 눈앞에서 사라진 지 5분도 되지 않았지만, 본능은 그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를 자신의 앞에 데려다 놓으라고 그르렁거렸다. 본성을 이성으로 얼마만큼 더 누를 수 있을까?
베타인 매니저들은 에반이 숨기지 않고 풀어낸 페로몬에 영향을 받진 않았다. 하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놓칠 만큼 그를 모르지 않았다.
5년 동안 미친 듯이 숨겨 온 진실.
오션의 리더 에반의 대외적 이미지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 좋고 잘 웃고 부드러운 옆집 오빠 같은 느낌. 다정하고 따스한 느낌이 물씬 나도록 꾸며 냈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이면서 냉소주의자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고, 그에 맞춰 움직였다. 어쩌면 모든 행동이 계산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연습생으로 기획사와 계약하는 그 순간에도 그는 철저한 갑이었다. 계약서는 기획사가 원하는 조건이 아닌 에반이 원하는 조건으로 만들어졌다. 데뷔 멤버를 정하는 것에서 앨범 콘셉트 및 데뷔일까지 그는 디렉터보다 더 독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계획하에 데뷔한 오션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방송이든 어떤 것이든 뭐든 선택권은 그에게 있었다. 게다가 그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거친 말과 행동을 하기보다 그는 제멋대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단지 분위기로 모든 걸 압도하는 것이다.
열여덟 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나이라고 표현하는 그 나이.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제시한 건 단 하나였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죠. 대가는 직접 보여 드릴 테니까.”
기획사가 시건방진 사춘기 끝물인 그의 손을 잡았던 첫 번째 이유는 흠잡을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완벽한 외모였다. 다음으로 함부로 할 수 없는 그의 집안을 꼽을 수 있었다.
오션에게 힘든 연습생 시절 따위는 없었다. 그의 집안에서 오션을 전폭적으로 서포트했다.
아이돌이 스타덤에 오르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멤버의 실력과 외모, 데뷔부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이슈. 그리고 돈.
일반적으로 가수들은 음악 방송을 통해 데뷔했다. 오션의 첫 무대 역시 한국의 한 음악 방송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 첫 무대가 전 세계 유명 전광판에서 실시간으로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알파였다. 이보다 더 지독한 이유는 없었다.
모두 마다하는 프로그램이라도 에반이 픽하고 출연하는 순간 판세는 뒤집혔다. 반대로 최고의 프로그램이라도 에반이 마다하면 끝이었다.
지금이라도 방송을 잡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어디든 오션 멤버와 함께하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조건이 달렸다.
매니저는 검색창을 켜고 김시우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방금 본 예쁘장한 얼굴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귀찮게 깊이 파고들어 찾고 싶지 않은 그는 검색창에서 벗어나 늘 지켜보는 에반의 SNS에 접속했다.
이런 건 또 언제 올렸지? 시간을 보아서 방금 올린 것이다.
비행기 안. 갈색 계열의 동물 눈을 그려 놓은 귀여운 안대를 쓴 한 사람이 잠든 모습이다. 눈과 코는 안대가 가리고 있었고 하관은 하얀 마스크가 가리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이마선과 검은색 머리카락뿐이다.
‘missed’
매니저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그러잖아도 김시우와 에반에 관해서 묻는 내용이 회사로 몰려들고 있었다. 프로그램 시작에 올린 ‘found’와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올린 ‘missed’의 뜻에 대해 에반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테다.
그를 통해선 어떤 말도 듣지 못할 테니 김시우 이 사람을 직접 만나야 했다. 다시 검색창으로 돌아간 매니저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켜야 했다. ‘Journey’ 측은 오늘부터 나오는 뉴스는 막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제부터 홍보에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벌써 에반과 시우의 동반 귀국 내용이 한 줄 기사로 떴다.
지금은 한 줄 기사지만, 잠시 후면 사진이 들어간 정식 뉴스가 나올 테고, 열두 시간의 텀으로 다른 멤버들이 귀국하면 또 그것은 그것대로 이목을 끌 것이다.
김시우가 속한 소속사는 이름조차 생소한 소규모 작은 기획사였다. 이들은 이 상황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방금도 공항에 어리바리한 매니저 한 명을 달랑 보낸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 상황을 해결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에반을 데려다준 후 직접 그곳으로 가야 했다.
이미 작은 기획사의 홈페이지는 터져 버리고 전화선엔 불이 났을 테니까.
“아! 시우 귀엔 우리 측에서 이런 제안 했다는 건 들리지 않게 하고. 무슨 뜻인지 알죠?”
“촬영하면서 친해진 거야?”
감정 정리가 끝난 것인지 숨이 턱턱 막히던 무거움이 사라지자 매니저는 가장 평범해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고 해 두죠.”
돌아온 간결한 대답에 매니저는 방금 본 시우의 기획사 전화번호를 제 휴대전화에 입력했다. 아마도 이 회사와 긴밀하게 연락할 사이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