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괜찮아?”
떠밀리듯 차에 탔고 자리에 어떻게 앉았는지도 몰랐다. 아직도 눈앞에 검고 붉은 점들이 둥둥 떠다니기에 시우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괜찮다는 말을 해야 했지만, 온몸이 덜덜 떨려서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가리고 있던 두 손 중 한 손을 내려 목을 만졌다. 어떤 식으로든 목이 졸려 본 건 처음이다. 무엇보다 그 상황에서 에반이 자신을 끌어당겨서 끌고 나오지 않았다면? 뒷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아―.”
입을 열었지만, 제일 먼저 나온 건 떨림을 숨기지 못한 한숨이었다.
“내가 널 이리 만들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중얼거리는 것 같은 작은 목소리에 시우는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자신을 살피고 있는 에반의 눈이 가장 먼저 보였다. 햇빛을 받으면 연초록빛으로 반짝이던 그 눈동자는 지금 짙은 청록색이었다.
“큼, 고마워. 이런 일은 처음이고, 좀 많이 놀라서.”
목을 좀 가다듬은 시우는 겨우 얽힌 시선을 떼고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가 부르는 것 같았다. 일부러 이런 일을 피하려고 급하게 비행기 표까지 바꾸고 입국했건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기자들 다 부르고 요란스럽게 들어왔어야 했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우는 자신의 턱을 잡고 들어 올리는 에반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맞추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고개를 젖히게 한 에반의 시선은 그의 목에 닿았다.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느 정도 소란이 일어날 것은 예상했지만, 그렇게 맹목적으로 시우에게 달려들 것은 예상치 못했다. 자신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의 후드가 잡혔다는 걸 알았겠지만 그걸 놓친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아냐. 정말 예상하지 못해서, 내가 제대로 대응 못 해서 생긴 일인데. 네가 왜 그렇게 얼굴 가리고 빨리 걸으라고 했는지 이제 알았네.”
시우는 민망함에 푸스스 웃으며 손을 들어 다시 목을 가렸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생팬이라 불리는 이들의 무차별적 행동은 알고 있었다. 그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었을 뿐.
“그런 예의 없는 사람들은 팬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들에겐 어떤 모습도 보여 주고 싶지 않거든. 최대한 무시하고 빨리 지나치는 수밖에 없었는데. 어쨌거나 다 내 잘못이니까 미안해.”
“진짜 이렇게 또 하나 배우네. 앞으로 더 조심할게. 아, 그런데 우리 진욱이 형? 거기다 내 차 공영 주차장에 있는데.”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걸려 온 진욱의 전화에 시우는 진득하게 자신에게 달라붙던 에반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 괜찮아요. 형은 어디예요?”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에반이 옆자리에 제대로 앉는 걸 본 시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늦은 오후. 짙은 선팅 때문에 제대로 보이는 건 없었다. 눈을 천천히 깜박여도 강한 빛에 과하게 노출되어 생긴 눈앞의 점들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시우는 다시 손을 올려 눈을 가렸다. 차라리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흥분한 진욱이 두서없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도 그의 뒤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 아직 공항이라는 거잖아요? 아, 그럼 제가 이야기해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직 공항이라는 말과 함께 시우의 SUV 차 키까지 갖고 있다는 말에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적당한 곳에 내려서 진욱과 만나서 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못 돌아가.”
시우가 어떤 말을 할지 추측했는지, 통화를 끝내자마자 돌아오는 대답에 시우는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나도 돌아가고 싶진 않아. 한동안 공항 근처는 쳐다보기도 싫을 것 같아. 진욱 형이 내 차 키 가지고 있다니까, 적당한 곳에 내려 줘. 그럼 진욱 형 만나서.”
“김시우. 아직 상황 파악 안 돼?”
지금까지 자신의 앞에서 정색한 적 없는 에반이었다. 늘 다정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와 그보다 더 차가운 눈빛으로 시우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편하게 거리를 활보하던 평범한 김시우는 이제 없어. 조금 전 그 일도 나 때문에만 생긴 일 아니라고. 생각이라는 것 좀 해. 지금 밴에서 내린다고? 연예인 타고 있어요, 하고 대놓고 티 내는 차에서 내린다고? 그것도 길 한복판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 못 해?”
“야. 말이 심하잖아.”
공격적인 에반의 말에 시우는 미간을 구겼다. 계속 미안하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생각해 낸 방법이다. 왜 이렇게 비꼬아서 말하고 화를 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시우.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할 위치까지 올라가 보고 싶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
그의 차가운 말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누구보다 인기를 얻고 싶었다.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룹 멤버들과 길거리에서 홍보도 해 봤고, 어르신이 가득한 시골 장터 간이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걸 멈추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반복된 실패는 시우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그렇게 실패하고 묻히면서도 여전히 이 판에 있다는 건 아직도 가슴 한쪽에 실낱같은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그 누구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그는 자신의 속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걸 솔직하게 말해. 내가 뭐든 이뤄 줄 테니까.”
뜬금없는 그의 말은 악마의 유혹처럼 무척이나 간질거렸고,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처럼 자신만만했다. 당황하고 놀랐지만,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외쳤을 때 짜릿했다. 오로지 자신과 에반을 향한 카메라와 휴대전화를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어쩌면 이런 과한 관심을 받고 싶었겠지.
숨겨 놓은 자신의 욕망을 그는 정확히 짚어 냈다. 아마도 수없이 회귀하기 전 그런 제안을 받았다면 덥석 악마의 손을 잡을 것이다.
동시에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자 시우는 그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지금 입을 열면 어떤 말이 튀어 나갈지 예상할 수 없었다.
“집이 어디야?”
짧은 침묵 후 들린 에반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청담동.”
이미 중간에 내린다는 생각을 접은 시우는 순순히 자신의 집의 위치를 말했다. 평온해진 에반의 목소리만큼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시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우가 사는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차 안엔 침묵만 가득했다.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운전 중인 에반의 로드 매니저도 조수석에 앉은 매니저도 조용했다.
차가 멈추자 시우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감사 인사의 말을 하고 내리려던 시우의 눈에 에반이 안전벨트 푸는 것이 보였다. 시우가 안쪽에 있었기에 내리기 위해서는 그를 지나쳐야 했다.
“코코.”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반이 불렀지만, 시우는 모두에게 하는 인사말을 꺼냈다.
“너.”
“그동안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에반이 어떤 말을 꺼낼지 몰라 시우는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세요.”
에반은 시우가 아닌 매니저들에게 말을 했고, 차 안엔 둘만 남았다.
“왜 그래?”
“미안해.”
사람을 몰아붙일 땐 언제고 에반의 사과는 담백했다. 하지만 그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사과할 거 없어. 내가 생각이 짧았고, 나 때문에 큰일 날 뻔했으니까. 네가 화내고 짜증 내는 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이런 모습이 시우였다. 감정에 휘둘리고 욱하는 건 제 모습이 아니다.
“이해 못 해. 넌 내가 왜 이러는지.”
“에반. 솔직히 말할게. 지금 너와 나 예민한 것 같아. 조심해서 들어가.”
이상하게 에반은 계속 자신을 자극했다. 조금의 바람도 없이 멈춰 있는, 그래서 조금의 일렁임도 없던 자신의 연못에 아주 커다란 돌을 던졌다. 한 번이 아니고, 그는 연못이 잔잔해지는 걸 지켜볼 수 없는지 계속해서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 물결에 시우는 속절없이 흔들렸고 어지러웠으며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었다.
“참지 마.”
“뭘 참아. 너 진짜 이상한 거 알아?”
겨우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에반은 또 돌을 던졌다.
“난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지금 이 순간도 너 때문에 미쳐 버릴 거 같으니까. 아니 미쳤으니까. 대답해.”
“무슨 대답.”
시우는 그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 못한 말이 가슴에서 휘몰아쳤다. 짜증이 솟구치고 화가 났으며,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졌다. 하지만 눌렀다. 이런 일은 쉬우니까. 생각대로 시우의 목소리엔 큰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말했잖아.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수 있어. 저딴 것들이 감히 널 만질 수 없게, 그렇게 만들어 줄게.”
“혼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우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자신도 한계였다. 여기 더 있다간 폭발할 것 같았다. 같이 프로그램 촬영 잘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가 찍은 사진을 볼 때까지, 아니 출국장을 나설 때까지도 괜찮았다.
밴에 오른 이후 에반은 예민했고, 정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상했다.
“김시우. 대답해. 난 네게 모든 걸 줄 수 있어.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눈에 보이는 인기든 어떤 것이든. 다 내가 할 수 있어. 나만 할 수 있는 거니까. 넌 대답해. 원한다고.”
“재밌네, 에반. 오션의 리더 에반 님. 세상 다 가진 에반 님.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거기 위에 있으니 나 같은 건 우스워 보이지? 네 맘대로 하면 내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것 같아? 그래. 네 옆에 붙어 있으면 잠시나마 거기 위 구경 조금은 하겠지. 그러고 나서는 달라질 것 같아? 네 말대로 인기 얻을 수도 있겠지. 방송 덕분에. 아니면 당장 지금부터라도 네가 날 홍보해 주면 가능하겠네. 절친이니 뭐니 이런 걸로 묶고 네 인기에 비벼서 올라가면.”
거만하고 오만한 에반의 명령에 시우 역시 폭발하고 말았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소리쳐 본 것이 언제일까? 하지만 시우는 말을 끝낼 수 없었다. 그렇게 올라가고 난 뒤 내게 남는 게 뭔데? 어차피 인어공주의 물거품인데, 다시 돌아갈 텐데. 그럼 내 손에 남는 건 뭔데.
시우는 문을 거칠게 열고 차에서 내려섰다. 눈앞에 캐리어가 보였기에 대충 매니저들을 향해 고개만 한번 숙이고 빠르게 걸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올라타고는 닫힘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천천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시우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